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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훈련소의 훈련병들이 각개전투 훈련을 받고 있다(자료사진).
 논산 훈련소의 훈련병들이 각개전투 훈련을 받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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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으로 군에 갔던 아이가 제대 일주일 만에 백혈병 판정을 받고 죽었는데, 군복무와 병이 발생한 것에 인과관계가 없다니요? 하도 기가 막혀서 '그럼 우리 아이는 개죽음을 당한 것이냐'고 따졌더니 담당 공무원은 '그렇게 생각하셔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더군요."

충남 천안시에 사는 박형준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큰 아들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고 말했다. 박씨의 장남 주혁(사망당시 22세)씨가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것은 지난 2008년 9월, 이후 주혁씨는 전투경찰로 차출되어 같은 해 12월 제주도 우도 레이더 기지에 배치를 받았다. 박씨는 아들이 군복무 내내 육체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신병 때 부대 안 목욕탕에서 넘어져서 허리를 크게 다쳤어요. 디스크(추간판 탈출증) 판정을 받고 경찰병원에 후송되어 한 달 동안 입원을 했는데, 그 후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죠. 아이가 휴가 나올 때마다 허리 치료를 해서 들여보내야 했습니다. 성격상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잘 하지 않던 애가 부대 안에서 꾹 참고 견뎠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파요."

10여 명의 소수 인원이 3교대로 24시간 근무하는 레이더 기지의 특성상 아들이 몸이 아파도 내색을 하거나 근무를 빠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혁씨가 몸에 이상을 느꼈던 것은 지난해 6월 중순, 전역을 한 달 보름 정도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쉽게 숨이 가쁘고, 어지러운 증상이 계속되자 주혁씨는 6월 24일 제주대학병원을 찾아 외래 진료를 받았다. 당시 의사는 엑스레이와 CT 촬영을 통해 그의 간과 비장이 부어있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특별한 이상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병원을 다녀온 후에도 설사와 고열, 복통은 일주일 넘게 계속되었다. 우도 보건소에서는 외래 진료를 권유했지만, 주혁씨가 부대 분위기와 근무 여건상 다시 병원에 가지 못했다고 박씨는 말했다. 아들의 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안 것은 주혁씨가 말년 휴가를 나왔던 7월 중순경.

"핏기 없이 새하얀 아이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혹시 큰 병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됐지만, 제주대학 병원에서도 별 말이 없었고 해서 그냥 실내근무를 오래해서 그런 거겠거니 하고는 제대 날짜만 기다렸죠."

주혁씨의 병명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진단내린 단국대 병원 진단서. 전역한 후 12일 만이었다.
 주혁씨의 병명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진단내린 단국대 병원 진단서. 전역한 후 12일 만이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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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일주일 만에 "백혈병으로 의심된다"

하지만 7월 29일 전역을 하고 집에 돌아온 주혁씨의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이제는 안색뿐만 아니라 눈동자와 입술까지 하얗게 변했고, 아침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어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 박씨는 8월 6일, 아들을 데리고 동네 내과를 찾았다. 검사결과 빈혈수치와 적혈구, 혈소판, 척수기능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비장은 일반인의 1.5배로 부어 있어 백혈병으로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다. 제대한 지 꼭 일주일 만이었다.

황급히 주혁씨를 옮긴 단국대 부속병원에서 박씨는 아들의 병이 급성백혈병이라는 확진 판정을 받았다. 혈액검사를 위해 피를 뽑을 때 실신했을 정도로 이미 주혁씨의 상태는 심각했다. 골수이식밖에는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주혁씨는 다시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 9월 13일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렇게 갔어요. 집사람과 내가 들어갔을 때 아이 두 눈에서 눈물 한 방울만 똑 하고 떨어지더라구요."

황망하게 아들을 가슴에 묻은 박씨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국가보훈처의 태도였다. 아들이 소속돼 있던 제주지방경찰청에서는 '공상'인정을 해줬지만 보훈처에서는 지난 6월 30일 백혈병 발병과 군복무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국가유공자' 지정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강남 성모병원 주치의는 '환자의 병세 및 증세 등을 종합해볼 때, 군 복무시기에 발병하였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는 소견을 밝혔다.
 강남 성모병원 주치의는 '환자의 병세 및 증세 등을 종합해볼 때, 군 복무시기에 발병하였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된다'는 소견을 밝혔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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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백혈병 발병과 군 복무 간에 인과관계 찾기 힘들다"

현행 국가유공자법시행령 제3조에는 '해당질병의 발생 또는 악화가 교육훈련이나 공무수행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의학적으로 판단되거나 인정된 질병에 의해서 사망한 자 또는 상이를 입은 자'를 공가유공자로 인정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각종 암이 발병된 청구인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① 암 발생이 교육훈련이나 공무수행 때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든지, 아니면 ② 기존의 질환이 교육훈련이나 공무수행 때문에 악화되어 암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여야 한다는 것이 보훈처의 입장이다.

보훈처는 그 근거로 서울의료원에 의뢰했던 의학자문 결과를 박씨에게 공개했다. 서울의료원은 '치료가 적절히 이루어졌고, 자연상태보다 급격히 악화된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징후(비장비대, 범혈구감소증, 고열)이 있었으나 백혈병의 자연 진행 속도는 다양하고 신청인이 보인 징후는 급격히 악화되지 않아도 나타날 수 있는 급성 백혈병의 흔한 징후들이므로, 군 복무와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박씨는 보훈처의 심의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주대병원과 우도 보건소의 진료기록을 보면 급성백혈병의 발병시점이 군복무 기간이었고, 복무 여건상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질병이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발병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주혁씨의 치료를 맡았던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이아무개 교수도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의 정확한 발병 시점을 판단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진단시점으로부터 3~4개월 전쯤이 발병시점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환자의 과거 병력 및 증세 등을 종합해 볼 때, 군 복무시기에 발병하였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소견을 밝혔다.

또 박씨는 "서울의료원이  어떤 근거로 '치료가 적절히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미 6월 중순 주혁씨에게 급성백혈병 증세가 나타났고, 전역할 때까지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을 키워왔다는 것이 명확한데도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박씨는 심사위원회가 치료를 담당했던 주치의의 소견은 배제하고 아들의 상태를 직접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료만 보고 내린 의학자문결과를 근거로 심의를 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제대 2주만에 위암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사망한 고 노충국씨의 영정.
 제대 2주만에 위암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사망한 고 노충국씨의 영정.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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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고 노충국씨 사건 전후 5명에 대해서는 유공자 판정

또 박씨는 과거 보훈처가 전역 직후 암 판정을 받고 사망했던 병사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던 사례와는 다른 잣대를 가지고 심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보훈처는 지난 2005년 10월 전역 6주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3개월 만에 사망했던 고 노충국씨를 포함해 비슷한 시기에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고 윤여주(간암), 고 오주현(췌장암), 고 박상연(위암), 고 김웅민(위암)씨에 대해서는 국가유공자로 판정한 바 있다.

박씨는 지난 2005~2006년 국가유공자로 결정되었던 이들 예비역 병사들의 처리 사례에 대해 정보공개를 신청했지만 보훈처는 '개인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어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런데 고 노충국씨의 아버지 노춘석씨는 지난달 27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아들이 숨지기 하루 전 국방부 관계자가 '국방장관의 특별지시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으니, 안심하고 치료에만 전념하라'는 전화를 걸어왔다고 증언했다.

전역 후 20일 만에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20개월 만에 숨진 고 윤여주씨의 경우도 처음에는 보훈처 국가유공자 등록심사에서 거부되어 행정소송을 제기한 상황인데, 노충국씨 사망 이후 언론을 통해 장교의 경우와 차별취급 문제가 비판되자 소송 중 재심의를 거쳐 2006년 6월 8일 국가유공자로 결정됐다.

당시 국방부와 보훈처가 전역장병들의 말기암 진단 사례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재발방지책을 촉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자 '소나기 피하기식'으로 판정을 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국가 책임이 없다면 죽은 아이의 탓인가?"

주혁씨의 아버지 박형준씨는 지난 8월 초 보훈처를 방문한 자리에서 해당 심사관이 '현재 보훈 처리는 가능하면 취소 결정을 하는 쪽으로 업무처리를 하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보훈처가 백혈병 발병 사실에 대한 '사실관계'보다 '인과관계'만 따지고 있다"며 "아이가 군 생활 중에 겪었던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 발병의 원인일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아니란 결론이 내릴 수 있는 것인가"고 반문했다.

"나도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을 했고, 큰 아이와 둘째 아이 모두 현역으로 성실히 국방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건강하게 군대에 갔던 아이가 전역한지 1주일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데도 국가가 책임이 없다고 한다면 죽은 아이의 탓인가요? 아니면 부모의 책임인가요?"

한편 1일 보훈처 관계자는 지난 2005~2006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노충국씨 등 5명 이외에 말기암이나 백혈병 등으로 국가유공자 인정이 된 사례가 있는지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질의에 대해 "그 이전과 이후에도 지정된 사례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다만 보훈심사위원회에서는 특정 질병명만 가지고 유공자 지정요건에 해당하는지 심의를 하지 않기 때문에 질병명만 가지고 따로 통계를 내지는 않아서 구체적 사례를 확인해 주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태그:#박주혁, #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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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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