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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인의 모습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인의 모습 ⓒ 조진구

올 여름은 한일 관계사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3월 30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표기한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한일 간의 독도 갈등은 자민당 의원의 울릉도 방문 시도와 한국 정부의 입국 금지, 일본 <방위백서>의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 자국 영토 표기에 이어 미 국무부의 일본해 단독 표기 방침 발표로 이어져 독도와 동해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이 식을 줄 모르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라는 또 하나의 광풍이 기다리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잘 알려진 대로 도쿠가와 막부가 타도되고 메이지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진전쟁(戊辰戰爭)의 관군 측 전사자를 위령하라는 메이지천황의 뜻에 따라 1869년 6월에 만들어진 도쿄쇼콘샤(東京招魂社)가 그 전신이다. 10년 뒤 도쿄쇼콘샤는 야스쿠니신사로 개칭되어 국가신도의 중심시설이 되었으며, 패전 후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신도지령에 의해 종교법인이 되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사실상 전전과 다름이 없다.

야스쿠니신사의 제신(祭神)은 무진전쟁에서 사망한 관군에서 일본에게 개국을 강요했던 미국의 페리함대의 내항(1853년) 시의 사망자로, 그리고 마지막 내전이라 할 수 있는 서남전쟁(西南戰爭, 1877년 지금의 구마모토, 미야기, 오이타, 가고시마 현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반란으로 관군의 승리로 끝났다. 사이고는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시키려던 정한론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을 지키기 위해 사망한 사람들로 확대되었다. 제신을 추가하는 것을 합사(合祀)라고 하는데, 제신을 선정하는 것은 야스쿠니신사다. 신사 측은 창건 이후 "전시 또는 사변에서 전사, 전상사, 전병사 또는 공무로 순직한 군인, 군속 및 이에 준하는 자"를 합사 대상자로 하고 있다.

한국인 생존자는 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나

이런 합사 기준이 일관되게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전전 일본의 국민들은 국가(천황)를 위해 전쟁에서 싸우다 죽으면 구단(九段, 야스쿠니신사가 있는 곳의 지명)의 사쿠라로 산화하는 것을 가장 명예로운 것으로 인식했었다. 천황을 위해 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은 사람을 영령(英靈)으로 현창(顯彰)하는 곳이 야스쿠니신사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사람들을 신으로 모시는 곳은 야스쿠니신사가 유일했기 때문에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어 야스쿠니신사의 신이 되고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예로운 전사 여부를 판정하는 것은 천황의 의지였다. 1968년 일본의 한 목사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는 자신의 두 형의 합사 취소를 신사 측에 요청했지만, 신사 측은 유족의 의지에 관계없이 천황의 의지에 따라 전사자의 합사가 이루어졌다면서 거부했다.

일본인 전몰자 유족 9명과 야스쿠니신사에 영령으로 모셔져 있는 한국인 생존자가 야스쿠니신사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 7월 21일 도쿄 지방법원은 "법적이익이 침해되었다고 인정할 수 없다"면서 청구를 기각했다.

 야스쿠니신사의 자료관이라 할 수 있는 유슈관 내 서점에 진열된 야스쿠니관련 서적들. 대부분이 총리의 참배를 지지하거나 지난 전쟁을 미화하는 것들이다.
야스쿠니신사의 자료관이라 할 수 있는 유슈관 내 서점에 진열된 야스쿠니관련 서적들. 대부분이 총리의 참배를 지지하거나 지난 전쟁을 미화하는 것들이다. ⓒ 조진구

신사는 1959년 일본 정부의 전몰자 정보에 입각해 일본군의 군인․군속이었던 한국인 11명을 합사했는데, 여기에 올해 86세의 강제 징용 피해자인 한국인 생존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법원은 생존자가 합사된 것과 관련해 "당시의 정보는 제한되어 있어 일정한 과오는 어쩔 수 없으며" 합사에 관한 정보가 일반적으로 비공개이기 때문에 "인격권이 한도를 넘어 침해당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거부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법적 구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몰지각한 판결을 내렸다.

우리가 야스쿠니신사에 주목하는 것은 그곳이 단순히 전몰자를 추도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며, 신사 측이 과거 일본이 저지른 전쟁을 자존자위의 불가피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5개월 재임하면서 매년 한 번씩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2005년 6월 2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공산당의 시이 카즈오 위원장이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야스쿠니신사의 전쟁관이나 역사관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추궁하자 '일본 정부의 입장은 야스쿠니신사와 같지 않으며 자신이 참배한다고 해서 야스쿠니신사의 생각을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변했다.

전범들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다
6월 20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결코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해서 참배하는 것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전쟁에 참가한 전몰자를 추도하기 위해……앞으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참배"한다는 지론을 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부전의 결의를 다지는 장소로 적합한 곳은 아니다. 야스쿠니신사는 식민지 획득과 저항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군이 저지는 모든 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보고, 이 전쟁에서 사망한 일본군을 영령으로 현창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11조가 규정한 전쟁재판수형자(전범)도 합사되어 있다. 1946년 1월 19일 맥아더 사령관 명의로 발포된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 제5조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범죄행위에 대해 심문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했다.

(A)평화에 대한 죄 : 선전포고를 하거나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침략전쟁 또는 국제법, 조약, 협정 또는 서약에 위반하는 전쟁의 계획, 준비, 개시 및 수행 또는 위의 여러 행위들을 달성하기 위한 공통의 계획 또는 공동모의에의 참가
(B)통상의 전쟁범죄 : 전쟁법규 또는 관례 위반
(C)인도에 대한 죄 : 전전 또는 전쟁 중에 행한 살인, 노예적 학대, 추방 및 기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본 재판소 관할 하의 범죄 수행 및 이와 관련된 정치적 또는 인종적 박해행위

A, B, C는 범죄의 유형을 말할 뿐 경중(輕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소위 A급 전쟁범죄에 관해서는 도쿄에 설치된 국제군사재판소에서, B와 C급의 전쟁범죄는 9개 연합국 국내에 설치된 군사재판소에서 재판이 열렸다. 1946년 4월 29일 검찰 측은 기소장을 제출했으며, 5월 3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약 2년 반 뒤인 1948년 11월 12일 정신장애와 사망자 3명을 제외한 25명 전원에 대해 유죄판결이 내려졌는데, 총리와 육상을 역임한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교수형을 선고받은 7명은 12월 23일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처형되었지만, 나머지 A급 전범용의자가 모두 석방되면서 A급 전범에 대한 재판은 종결되었다.

전범 가운데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14명이 1978년 10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었으며, 이 사실은 1979년 4월에야 알려졌다. 더구나 전범들의 합사는 후생성이 작성한 제신명표(祭神名票)를 바탕으로 1959년부터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1952년 3월에 제정된 '전상병자 전몰자 유족 등에 관한 원호법'의 대상이 되는 전몰자가 기본이 되어 작성된다. 1953년 8월 이 법의 일부가 개정되면서 전범들도 다른 전몰자들처럼 전쟁에 의한 공무사로 인정받게 되어 전범들의 유족도 원호 대상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전범들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경위에 비춰볼 때 2005년 6월의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총리가 어떤 마음으로 참배를 하든지 한국 국민들은 과거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야스쿠니신사의 종교법인화 이후 야스쿠니신사를 처음으로 참배한 것은 1951년의 요시다 시게루였으며, 198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을 기념하여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공식 참배하여 외교적인 물의를 일으킬 때까지 하토야마 이치로와 이시바시 탄잔을 제외한 거의 모든 총리가 1회 이상 거의 매년 참배했다.

1985년 이후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를 했던 2001년 8월 13일까지 참배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던 미야자야 기이치(1992년 11월), 자신의 생일날 참배했던 하시모토 류타로(1996년 7월)를 제외하면 총리의 참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각료나 정치가들의 참배는 있었다. 그러나 1991년 1월 센다이 고등법원이 천황이나 총리의 공식참배는 종교적 활동에 해당하며, 이는 정교분리원칙을 규정한 헌법 제20조에 위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참배가 공적인 것인가 사적인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일 관방장관, 개인 판단에 8.15 참배 맡겼지만...

  치도리가부치 전몰자 묘원
치도리가부치 전몰자 묘원 ⓒ 조진구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은 12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종전기념일(8월 15일)에 맞춰 내각으로서 공적 참배 계획은 없다면서도 "각료라고 해도 공적인 입장과 사적인 입장이 있다. 사적인 입장에서는 정교의 분리와 신교의 자유가 있다"면서 각료들의 참배 여부는 개인의 판단에 맡길 것임을 시사했다.

총리나 각료가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누구나 전몰자를 추도하고 비전(非戰)․평화를 맹세할 수 있도록 특정한 종교성을 갖지 않는 새로운 국립추도시설의 설치를 위해 노력한다"(중의원 선거에 임하는 민주당의 정책집 <INDEX 2009>, p.1)는 종전의 민주당 입장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전몰자에 대한 추도의 뜻을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2004년 4월 후쿠오카 지방법원은 총리의 공식참배는 명백한 위헌이라면서 야스쿠니신사 참배 이외의 방법으로 전몰자를 추도할 수 있기 때문에 종교시설인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적절하지 않다고 일침을 놨다. 야스쿠니신사 인근에는 1959년 일본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치도리가부치라는 전몰자 묘원(墓苑)이 있는데, 여기에는 해외에서 전사했지만 신원을 알 수 없는 약 35만 명의 유골이 묻혀 있다.

제3의 추도시설 건립문제와 관련해 에다노 장관은 8월 12일의 기자회견에서 국회에서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시설 건립을 위한 조사비를 내년도 예산에 계상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3의 추도시설 건립문제는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늘(8월 12일) 개최 예정이던 국회 독도특위 전체회의가 기상 악화로 연기되기는 했지만, 8월 15일 광복절을 전후해 여야 대표의 독도 방문이 예정되어 있어 또 한 번의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일부 누리꾼들 사이에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며, 매년 광복절을 전후해 벌어졌던 한일 누리꾼들 간의 사이버 대전은 과거 어느 때보다 치열해질 전망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식에서 일본의 독도 도발을 비판하고, 민주당 정권의 각료와 자민당 의원들이 대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한일 관계는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수렁 속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일 뿐인가?


#야스쿠니신사#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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