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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가 냉각장치 고장으로 과열되어 녹아내리는 것을 '멜트다운'(melt down, 노심용해)이라고 합니다. 이때 발생하는 극고온의 열은 원자로는 물론 원자로를 지탱해주는 압력조절용 수조와 땅까지도 녹이는데, 이러한 현상을 '차이나 신드롬'이라고 부릅니다. 핵연료가 미국의 반대편에 있는 중국까지 지구를 뚫고 나갈 것이라는 가설에 따라붙은 이름입니다. 어이없는 가설이지만, 그만큼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 폭발과 관련해 세계 각국이 신경을 곧추세우는 대목이 바로 이 '멜트다운'의 현실화 여부입니다. 녹아내린 핵연료가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이 수증기가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격납고에 가득 찰 경우 원자로가 수소폭탄과 같은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986년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이 멜트다운 현상으로 발생한 대표적인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 후쿠시마의 공포를 마치 예견이라고 한 듯한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지극히 민감한 주제에, 원자력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그 어떤 텍스트보다도 원자력의 실체를 이해하기 쉽게 제작한 <도쿄 원발>입니다. 핵의 진실을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영화는 배급처를 찾지 못해 창고에 처박혔다가 제작된 지 2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일본에서 상영됐습니다. 우리가 원자력발전소를 줄여서 원전이라고 부르듯 일본은 '원발'이라고 부릅니다.

도쿄도지사의 폭탄 선언 "도쿄에 원전 유치하겠다"

도쿄에 원자력발전소를 유치하겠다는 도지사 텐마의 폭탄발언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원전을 둘러싼 진실을 긴박하면서도 경쾌하게 풀어나간다.
 도쿄에 원자력발전소를 유치하겠다는 도지사 텐마의 폭탄발언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원전을 둘러싼 진실을 긴박하면서도 경쾌하게 풀어나간다.
ⓒ 필름파트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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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도쿄도지사 텐마(야쿠쇼 코지)가 부지사 츠다(단타 야스노리) 등 주요 간부들에게 긴급회의 소집 문자를 날리면서 시작합니다. 정치생명이 걸렸다는 비서 오이카와의 우려를 무릅쓰고 텐마는 간부들에게 "도쿄에 원자력발전소를 유치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간부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연방 진심이냐고 되묻습니다. 텐마는 빚더미에 앉은 도쿄의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선 이 방법뿐이라고 강조합니다.

간부들은 정전으로 도쿄를 암흑천지로 만들어 봐야 전기의 고마움을 안다는 둥, 원전을 수학여행지에 관광코스로 개발하자는 둥, 가라오케를 못하면 어쩌냐는 둥 사분오열됩니다. 츠다와 환경국장 이즈미는 데모대가 도청을 포위할 것이라고 하고 텐마는 '너희들은 전기가 필요 없느냐'라고 맞받아치라고 합니다.

"원자력발전소는 대도시와 잘 어울린다"며 몰상식한 발언을 일삼던 텐마는 "후쿠시마 원전 등에서 끌어 쓰는 전기로 인해 철탑과 송전선 등이 아름다운 경관을 파괴했고, 핵발전소 인근 어업권은 매입되고 농지와 산림은 망가졌으며, 그 결과 농어민은 떠나고 1차 산업도 쇠퇴했다"고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대체 텐마의 진심은 무얼까요?

영화는 코믹한 인물과 위트 넘치는 대사로 심각한 주제를 풀어주며 원자력정책 논리부터 가공할 원자력의 실체까지 정교하게 분석하며 묻습니다. 현재 55기가 가동 중인 일본 원전은 과연 안전하겠느냐고. 그와 함께 21기가 가동되고 2030년까지 19기를 더 건설해 모두 40기를 가동할 예정인 한국사회에도 묻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장담대로 한국원전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서풍으로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은 정말 걱정할 필요가 없겠느냐고.

"원전 부지는 도청 앞 공원"... 놀라 나자빠지는 간부들

텐마가 그림판을 들어 제시하는 원전유치 논리는 원전 가동 국가와 핵 산업자본의 주장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텐마가 그림판을 들어 제시하는 원전유치 논리는 원전 가동 국가와 핵 산업자본의 주장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 필름파트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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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도쿄 원전유치 논리를 텐마의 입을 빌려 늘어놓습니다. 먼저 핵발전특별조치법을 발표해 정부로부터 지방교부세를 받아 빚을 갚고 건설경기를 살려 세수를 마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운송비 등이 들지 않아 전기를 싼값에 공급할 수 있고, 기업들의 비용 부담이 줄어드는 만큼 도쿄도의 수입원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자치단체의 재정건전성과 운용책임성 등 지방정부의 현실 고민도 아우릅니다.

텐마는 에너지의 유효이용도 제시합니다. 원전에서 전기로 전환되는 열에너지는 30%뿐으로 나머지 70%는 폐열로 바다에 버려 대량 배출되는 온배수가 해수 온도를 높이고 이산화탄소를 방출시켜 오염시키던 것에 비해 도쿄에 원전을 세우면 온배수를 열 파이프로 순환시켜 기존의 열병합발전 시스템을 원자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며, 정책입안자들의 최근 논리까지 들먹입니다.

대신 텐마는 두 가지 조건을 겁니다. ▲ 온배수의 안전성이나 원전 사고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 ▲ 원전 유치로 경기가 회복되고, 일자리가 창출돼 실업문제까지 해결되는 판에 토를 달지 말라는 것. 텐마는 원전이 가져올 막대한 경제효과와 돈으로 배부르고 등 따스운 만큼 대가를 치르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텐마는 도청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신주쿠 중앙공원을 원전 부지로 지목합니다. 이 말에 간부들은 뒤로 나자빠집니다.

영화는 원전 유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난상토론을 통해 원전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함께 우리들의 무관심을 고발합니다. 1954년에 원자력예산이 일본 국회를 통과해 미국식 에너지 정책을 도입했으며, 통산성이 이미 20년 전에 각 지역에 소형 원전 건설계획을 발표했고, 플루토늄 1g이 연간 피폭 허용량의 18억 명 분에 해당될 만큼 가공스럽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허둥대는 영화 속 고위관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무지를 질타합니다. 

반면 영화는 엉뚱하게 텐마를 통해 원전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까발립니다. 시골 바닷가에 들어서는 원전은 수수방관하면서 도쿄는 왜 안 되고, 원전 건설에 따른 위험은 시골이나 도쿄나 똑같이 감수해야 하며, 국가 정책을 방관하는 것은 찬성하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일갈이 그것입니다. 텐마의 기대대로 만약 원전이 신주쿠 공원에 들어서면 도쿄 시민들도 가만있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여기며 달라질 수 있을까요?

'체렌코프의 빛'이 영원히 사라질 때까지 토론해야

영화의 마지막에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체렌코프의 빛'은 핵정책과 원전의 가공할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후쿠시마의 비극을 대변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체렌코프의 빛'은 핵정책과 원전의 가공할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후쿠시마의 비극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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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다가 초대한 동경대 물리학과 에노모토 교수가 등장하면서 원전의 진실은 밝혀집니다. 일본정부는 쓰나미가 덮쳤던 록카쇼에 핵폐기물 저장소를 세운 뒤 지난 1998년 프랑스에서 재처리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반입했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줄곧 대지진이 와도 원자로가 감지해 가동을 멈추며, 무엇보다 일본의 원전들은 관동대지진보다 3배나 더 강한 지진이 와도 견딜 수 있게 내진 설계됐다고 자랑해 왔습니다.

에노모토 교수는 "현재 일본의 일반건축물은 200갈(gal, 지진 흔들림의 가속도단위)로 내진 설계됐고, 도카이 지진대 중심에 있는 하마오카 원전은 600갈, 후쿠시마 등 그 밖의 원전은 400갈로 설계됐다"고 말한 뒤 "그러나 관동대지진 당시 진원지는 900갈이었고, 고베대지진의 진원지는 820갈 이상"이라고 지적합니다.

교수의 지적대로라면 세계 최고의 내진 설계로 원전을 건설했다는 일본정부의 공언은 거짓말이며, 최근 센다이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진 것은 필연적인 결과인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야마카와 겐 감독은 츠다를 빌려 "이런 지진대국에서 지진으로 원전 사고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며 후쿠시마 원전 폭발을 예견합니다. 또한 교수가 제시한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지도는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 범위를 예측하게 합니다.

이윽고 영화는 일본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원자력 정책을 열린 공간에서 논의하기 위해 도쿄에 원전을 세우려 했다는 텐마의 진심을 공개합니다.

시민들이 토론하고 대규모 반대운동을 하고, 원전 반대 투쟁을 왜곡한 언론들이 제정신을 차린다면, 도쿄는 일본의 에너지정책의 근간을 바로 세우는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텐마의 복안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프랑스에서 재처리한 플루토늄을 도쿄만 오다이바를 통해 운반하던 트럭이 납치됩니다. 영화는 "플루토늄 트럭 납치사건으로 원전 유치는 더 이상 필요 없지 않느냐"는 츠다의 말에 "사람들은 과거 일은 바로 잊는다. 끝난 일은 관심이 없다"는 텐마의 화답으로 메시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정치생명이 끝나는 한이 있어도 핵폭발을 상징하는 '체렌코프의 빛'이 일본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고대한 텐마의 고육지계는 그러나 종료 자막과 함께 충격적인 '체렌코프의 빛'으로 되돌아옵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도쿄 원전유치를 매개로, 1973년 오일쇼크 이후 핵으로 이동한 세계에너지 정책의 이면부터 원전의 비밀을 움켜쥔 국가의 비민주성과 폭력성 그리고 대안에너지까지 폭넓게 진단합니다.

사고 처리를 위해 투입된 86만 명 중 5만5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생존자 중 87%가 발병한 체르노빌 사고 당시 강제 피난지역이 체르노빌 북쪽 300km까지였다는 것은 후쿠시마 원전이 대재앙으로 전락할 경우 그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 될지 가늠케 합니다.

지난 2005년 한 환경단체는 국내 여성들의 갑상선암 발생률이 체르노빌 인근 벨라루스와 비슷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역시 벨라루스 등에서 갑상선암이 급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방사능 낙진이 제트기류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는 한국에서 사고가 터졌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후쿠시마 사태 중에 지난 2009년 원전을 수주했던 아랍에미리트 원전 기공식에 들른 뒤 자이드 환경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재난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 국민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국민의 이런 모습은 정부의 재난대응시스템과 사회안전망에 대한 깊은 신뢰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일본은 지진 등 자연재앙에 대해 정부 주도로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를 쏟아 붓는 가운데 동 단위의 주민 재해자치센터를 기반으로, 시 단위의 네트워크 거버넌스체계를 중심으로, 정부와 NGO 등이 유기적으로 참여하는 일본 재해구호 볼론티어 네트워크(NVNAD)를 정점으로 국가재난대응체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상존하고 있었기에 이번 재앙에도 침착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재'라는 가공할 대재앙에 일본이 흔들리기 전까지는. 

그럴진대, 만약 이번 사태가 주먹구구식 재난대응으로 일관하는 한국에서 터졌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입니다. 이번 일본 원전 사태는 4대강과 구제역 파동 등으로 환경을 파괴하며 불신의 벽을 차곡차곡 쌓는 한편 원전수출을 대가로 상을 수상하며 '경제대통령' 위상 강화에 '올인'하는 이명박 정부에 던지는 자연의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 영화 <도쿄 원발>은 국내 미공개 작품으로 환경재단이 지난 2005년 주최한 제2회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동경 핵발전소>라는 제목으로 상영됐습니다. <도쿄 원발>은 환경재단그린아카이브에서 대여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제8회 서울환경영화제'는 오는 5월 19일부터 25일까지 CGV상암 및 월드컵경기장 광장에서 열립니다.


태그:#일본 대지진, #도쿄 원발,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체르노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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