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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8월 3일 자 A30면에 실린 '만물상'
 <조선일보> 8월 3일 자 A30면에 실린 '만물상'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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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완전히 졌다. <조선일보>의 뻔뻔함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뚫린 입으로 별말을 다 내뱉는 세상이 됐다지만, 그래도 <조선일보>가 '똘레랑스'(관용)란 말까지 입에 담을 줄은 차마 몰랐다. 정말 몰랐다.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한다', 3일자 '만물상' 칼럼 제목이다. 지난달 30일 미국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 흑인인 게이츠 교수, 백인인 크롤리 경사가 참석한 일명 '맥주 정상회담'에서 나온 말을 제목으로 뽑은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한다"는 말을 한 것은 오바마에게 한 방을 가한 백인경찰 크롤리 경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백악관 회동이 끝난 후 "매우 사적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눴으며 (특정 현안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칼럼을 쓴 박두식 논설위원은 이를 높이 평가하며 "아무리 대통령의 인사권 밖에 있는 지방 경찰공무원이라고 하지만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미국 대통령 문화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듯싶다"고 격찬했다. '똘레랑스'에 대한 언급은 바로 그 뒤에 나왔다.

"'agree to disagree'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으려면 사회 전체에 '톨레랑스(관용)'가 규범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국회에서 해머·전기톱·소화기까지 동원한 난투극이 벌어지고, 도심은 죽창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시위로 몸살을 앓고, 노사분규 현장에 각종 사제 무기가 판치는 우리 현실에선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이번에는 '똘레랑스'가 공격의 무기?

우선 '똘레랑스'를 들먹인 이 문단 자체가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지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조선일보>는 '똘레랑스'와 전혀 상반된 우리나라 현실을 고발한답시고 국회 난투극과 도심 시위 그리고 격렬한 노사분규를 예로 들었다.

그런데 웃기지 않나? <조선일보>가 지적한 세 경우 모두 <조선일보>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똘레랑스'를 빌미삼아 기껏 자기와 정치·사회적으로 상반된 입장에 선 사람들을 공격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똘레랑스'와 얼마나 먼 존재인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거론한 예를 하나하나 따져 들어가면 더 기가 막힌다. 국회 난투극이 왜 나왔나? 숫자를 앞세운 거대 여당의 날치기를 저지하는 와중에서 발생한 것이다. '똘레랑스' 정신에 따라 소수 야당을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국회를 이끌어 가려 했다면 이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따라서 그 책임을 묻자면 먼저 한나라당을 지적해야 옳다.

죽창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도심 시위가 '똘레랑스'에 역행하는 케이스라고? 정당한 집회의 자유조차 제한하고 공권력으로 억압하며 경찰의 조직적 폭력엔 눈감고 시위대의 우발적 폭력만 부각시키는 이런 짓이야말로 '똘레랑스'에 대한 배반이고 모욕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용인·존중한다는 '똘레랑스'의 정신이 이명박 정부에 0.1 밀리그램이라도 있었다면 애당초 이런 소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격렬한 노사분규 현장을 지목한 것도 어이없긴 마찬가지다. 노와 사의 충돌에서 힘을 가진 쪽은 당연히 사측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해 집단으로 대응하는 것도 그만큼 힘이 딸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을 움켜쥔 사측이 노조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공생의 동반자로 인정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자본가의 강고한 마인드에 '똘레랑스'가 조금이라도 자리했더라면 노사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똘레랑스'를 들먹이나

박두식 논설의원이 '똘레랑스'를 들먹이며 내뱉은 말은 <조선일보>에 먼저 들려주어야 옳다. <조선일보>가 이제껏 걸어온 길 자체가 실은 '똘레랑스'를 짓밟는 '앵똘레랑스'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지인가. 모든 사람을 '우리 편 아니면 적'으로 나누고 편 가르는 냉전 이분법의 대가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그가 누구건 무조건 '친북 좌빨'로 매도·단죄·심판하던 사상검증의 대명사 아니었던가. 정치색이 다르고, 이념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일보>에 찍혀 욕를 본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멀리 갈 것 없이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경우를 떠올려보라.

그런데 이런 신문지가 '똘레랑스'를 입에 담다니…. 민주와 자유, 진보를 욕보이는 것도 모자라 이젠 '똘레랑스'마저 넘보는 셈인가. 이는 거짓을 밥 먹듯 하고 불법 탈법 위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대통령이 느닷없이 '법과 질서'를 강조하며 '정직'을 자랑하는 것만큼이나 어이없고 경우 없는 짓이다. 도대체 이런 참람한 광경을 얼마나 더 지켜봐야 하는가. 빌어먹을!

덧붙이는 글 | <조선일보>는 오바마 대통령이 자기에게 반항하고 항변한 백인 경찰을 백악관으로 불러 회담 가진 것을 칭송했다. 만약 한국에서 대통령에게 항변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어떠했을까? 모르긴 해도 그 경찰은 그 날로 옷을 벗거나 검찰 조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 분의 '뒤끝'이 어디 보통인가 말이다. 그리고 그를 포함한 경찰 조직은 <조선일보>의 융단폭격을 받지 않았을까? 아니면 말고!



태그:#조선일보, #똘레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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