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유트게이트에 휘말린 호주 여야 지도자들을 보도한 시드니모닝헤럴드.
유트게이트에 휘말린 호주 여야 지도자들을 보도한 시드니모닝헤럴드. ⓒ 시드니모닝헤럴드

 

지난 2월 중순경, 한국의 청와대에 해당하는 호주 총리비서실로부터 재무부 고위관리에게 이메일 한 통이 전달됐다. 내용은 "총리의 친구가 경영하는 자동차판매회사를 배려해 달라"는 청탁성.

 

이메일을 받은 재무부 관리는 6월 19일, 상원 청문회에서 그 사실을 폭로했다. 언론은 대서특필했고 여론은 들끓었다. 케빈 러드 총리와 웨인 스완 재무장관은 사퇴 압력에 이어 실형 선고를 받을지도 모를 긴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 후 1주일 동안 스릴과 미스터리로 가득 찬 정치드라마가 신문과 TV로 연일 생중계 됐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공무원이 작성한 이메일 한 통이 호주에서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보기 드문 사례였다.

 

총리실로부터 날아든 '청탁성 이메일' 한 통

 

사안이 중대하다 보니 사건의 명칭도 세 개나 생겼다. 큰 사건이 발생하면 '○○○게이트'라는 식의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언론에서는 '소형자동차게이트(utegate, 이하 유트 게이트)'라고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뜻밖의 호재를 만난 야당에서는 '오즈카 사건'(OzCar affair)이라는 부정적인 명칭을 고집했다. 반면, 집권 노동당에서는 야당의 생트집으로 발생한 '먹칠하기 캠페인'(smear campaign)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번 사태가 '유트 게이트'로 불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퀸즐랜드 출신의 케빈 러드 총리 친구 중에 입스위치 지역에서 기아자동차 딜러상을 운영하는 존 그랜트 사장이 있다. 그는 러드 총리의 중요한 정치후원자이기도 하다. 그는 2007년 11월 총선 당시, 11년이나 묵은 소형화물차(1996년 마스다산)를 선거홍보용 차량으로 제공했다.

 

야당 당수 입장에서 전국 단위의 선거운동을 펼쳤던 러드 총리는 "선거홍보물을 붙이고 돌아다녔던 모발 오피스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관심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고 밝혔으나 언론은 차량을 무상으로 제공한 친구에게 특별대우 해주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그의 집무실에서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언론에서 '유트 게이트'라는 명칭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러드 총리 지지도 곤두박질... 여론 "즉각 사퇴하라"

 

'유트 게이트' 보도가 나가기 시작하자 국민 여론도 급속히 변했다. 취임 후 1년 반 동안 평균 60%대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러드 총리의 인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총리는 즉각 사퇴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절대다수로 나타났다. 총리나 장관의 의회 발언이 거짓으로 판명되면 실정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상원 청문회 이틀 후인 6월 21일 <데일리텔레그래프>가 긴급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러드 총리 사퇴 찬성이 69%, 반대가 31%로 나왔다. 특히 러드 총리의 출신지역인 퀸즐랜드에서 발행하는 <쿠리어메일>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퇴 찬성률이 더 높게 나왔다.

 

여론의 뒷받침에 고무된 말콤 턴불 제1야당 자유-국민 연립당 당수는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의회 대정부 답변을 통해서 거짓말로 국민을 오도한 러드 총리는 즉각 사퇴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러나 야당과 언론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러드 총리는 "나는 그런 메일을 보내라고 지시한 일도 없고, 그런 얘기를 전해들은 사실도 없다"고 해명하면서 "나를 포함한 모든 관련자들에 대해서 연방경찰이 즉각 수사에 착수할 것을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야당의 맹공 "부패정치인의 '오즈카 스캔들'"

 

 첨예하게 맞붙은 케빈 러드 총리와 말콤 턴불 제1야당 당수.
첨예하게 맞붙은 케빈 러드 총리와 말콤 턴불 제1야당 당수.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말콤 턴불 당수는 이번 사태를 '오즈카 어페어(OzCar affair)' 또는 '오즈카 스캔들'로 칭하며, 러드 총리를 부패한 정치인으로 몰아붙였다. 특히 야당 소속 토니 애보트 의원은 호주국영 abc-TV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국민들은 러드 총리의 허상에 속았다, 마침내 그의 추악한 진면목이 드러났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야당이 이번 사태를 두고 '오즈카 스캔들'로 이름 붙인 이유는 이랬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후 호주의 자동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특히 판매부진의 영향으로 자동차판매상들의 폐업이 속출했다. 러드 총리의 친구인 존 그랜트도 마찬가지였다.

 

호주정부는 자동차업계 수습책으로 20억 호주달러 규모의 '오즈카 계획'을 내놓았고 그중에서 5억 호주달러의 긴급자금을 <포트 크레딧>에 의뢰해 자동차 판매상을 지원했다. 그 업무를 재무부에서 맡았고, 담당 실무책임자가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한 고드윈 그리치 국장이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이메일이 고드윈 그리치 국장의 개인 컴퓨터에 발송된 것.

 

의혹... 왜 정부 주요공직자가 폭로전 선두에?

 

총리실에서 보낸 것으로 된 이메일의 내용은 아주 간략했다.

 

"하이! 고드윈,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퀸즐랜드 소재 '존 그랜트 모터스'에 자동차 판매상 지원금융이 가능하면 도와주라고 총리가 부탁했다. 가능한대로 빨리 이 사안을 챙겨주면 좋겠다. 그랜트씨는 총리 지역구의 특별한 후원자다."

 

그리치 국장은 그 이메일이 총리실 소속 경제자문관인 앤드류 찰튼 박사로부터 온 것으로 짐작했다.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도 "그 메일을 처음 본 순간 총리실이 외압을 가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메일 사본을 웨인 스완 재무장관의 팩스로 전송했다"고 증언했다. 야당은 상원 청문회를 통해서 그리치 국장을 추궁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민감한 사안들을 계속해서 폭로했다.

 

그러나 그리치 국장의 이런 폭로전은 집권 노동당으로부터 의혹을 불러 왔다. 또 상원 청문회 이전에 그 메일의 사본이 턴불 당수에게 건네졌고, 이어서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 소유의 <데일리텔레그래프> 스티브 루이스 정치기자에게 제공된 점도 의심을 키웠다.

 

노동당 정부는 CEO출신의 말콤 턴불 당수와 보수성향의 언론인들이 뭉쳐서 진보성향의 '캐빈 러드 총리 죽이기'에 나선 것으로 판단하고 역공에 나섰다. 특히 노동당 정부 출범 이후 중요한 직책에 중용된 그리치 국장의 태도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턴불 당수는 "터무니없는 의혹"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고위 공직자가 여당에 정보를 제공하면 내부고발이 되고, 야당에 제공하면 두더지나 프락치가 된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반전..."그 메일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가짜"

 

 유트게이트 중심에 놓인 그리치 국장을 보도한 <쿠리어메일>.
유트게이트 중심에 놓인 그리치 국장을 보도한 <쿠리어메일>. ⓒ 쿠리어메일

6월 19일 청문회 이후 3일 동안 매우 곤혹스런 입장에 처했던 러드 총리는 초조하게 연방경찰의 조사 결과를 기다렸다. 마침내 6월 22일 오후 연방경찰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다. 그리치 국장이 받았다는 이메일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가짜라는 것.

 

사태는 빠르게 반전됐다. 러드 총리를 강도 높게 추궁했던 말콤 당수는 이메일의 진위 여부에 대한 조사는 물론, 이메일 사본조차 확보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야당 당수로서의 신뢰성과 판단력에 결정적 흠집을 남긴 것.

 

러드 총리의 반격도 즉각 이뤄졌다. 그는 의회 답변을 통해 "호주는 불행하게도 아무런 객관적 사실도 확보하지 않고 총리의 퇴진을 주장하는 야당 당수를 만났다, 그는 즉각 국민에게 사과하고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러드 총리와 함께 사퇴 압력을 받았던 웨인 스완 재무장관도 반격에 나섰다. 그는 "야당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는 노동당 정부에 흠집을 내기 위해 '먹칠하기 캠페인(smear campaign)'에 나선 것"이라고 공박했다.

 

뒤바뀐 여론 "말콤 당수, CEO 출신 정치인의 한계"

 

가짜 이메일 파동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정치인은 말콘 턴불 당수다. 불과 3일전 "거짓말로 국민을 오도한 러드 총리는 즉각 퇴진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의 말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갔다. 25일 아침 <채널9>의 '투데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노동당 맥신 맥큐 의원은 "말콤 당수는 같은 당 소속 의원들한테도 리더로서의 신뢰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야당 소속 의원 4명은 공개적으로 턴불 당수의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노동당 정부가 발의한 환경, 난민, 알콜음료법 등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천명했다. 자유당 소속의 한 중견의원은 "턴불 당수는 의원경력이 4년에 불과하다, 그는 이번 사태로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호주국영 abc-TV '블랙퍼스트 쇼'에 출연한 한 정치평론가는 "말콤 턴불 당수는 성공한 CEO 출신이다, 그는 짧은 정치경력에도 불구하고 당수직에 올랐지만 가짜 이메일 사건으로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며 "결과만 중시하는 CEO 출신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턴불 당수는 지난 5월에 호주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서 같은 CEO 출신으로서 경제정책에 관한 교감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대통령을 "경제위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정치 리더"라고 치켜세웠고, 청와대 또한 턴불 당수의 발언을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호주 '이메일 해프닝'과 신영철 대법관의 '압력 이메일'

 

25일 현재, 연방경찰은 가짜 이메일 발신자를 추적하고 있다. <시드니모닝헤럴드>는 "경찰 조사를 이유로 턴불 당수는 입을 다물었다"면서 "상원청문회 직후 <고드윈 그리치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꿋꿋한 용기를 칭송을 받았던 그리치 국장은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그가 오랫동안 재무부의 비밀정보를 야당에 흘린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한편 호주국영 abc-TV의 브루스 하이 기자는 "연방경찰을 레퍼리로 만든 호주 정치계는 반성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라며 "호주 국민들은 연방경찰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결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호주는 지금 겨울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특히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행정수도 캔버라 지역은 혹한에 시달리고 있다. 가짜 이메일 사건이 불거진 국회의사당만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어 호주 국민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청탁성 메일' 한통이 호주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번 사건은 우리에겐 매우 부러운 부분이다. 판사들에게 촛불재판 압력메일을 보내놓고도 사퇴여론에 꿋꿋이 버티는 신영철 대법관이나 MBC PD수첩 작가의 개인 이메일을 공개하고도 "국민의 알 권리"라고만 말하고 있는 검찰을 보고 있는 우리로서는 말이다.


#호주 유트게이트#케빈 러드 호주 총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