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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달밤 블루스'의 한 장면. 1월 18일까지 일터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으며, 일반시민들의 호응이 좋은 편이다.
 연극 '달밤 블루스'의 한 장면. 1월 18일까지 일터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으며, 일반시민들의 호응이 좋은 편이다.
ⓒ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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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수로 따지면 '일터'가 세계 최고일지 모릅니다. 관중 몇 천명, 몇 만명은 부지기수였죠. 공연이 많을 때는 1년에 150회에서 200회까지 했어요. 하루에도 두 군데씩 뛰고. 음향이나 조명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줄마이크 들고 공연을 했죠."

노동문화예술단 일터 김선관(41) 대표의 말이다. 그의 이런 자부심과 무관치 않게 '일터'는 1987년 창립한 이래 20년 넘게 시위나 파업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웃기고 울리면서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리고 지금은 노동현장을 벗어나 '포장마차에서 펼쳐지는 이웃들의 따뜻한 삶'을 다룬 뮤지컬 <달밤블루스>로 부산 시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덥히고 있다.

가난한 직업의 대명사 연극판에서, 게다가 노동문화예술을 고집하는 이들이 지치지 않고 20년 동안 공연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19일 부산시민회관 옆에 위치한 일터 극단 사무실에서 심종석 기획실장, 김기영 상임연출가, 김선관 극단 대표를 만나 연극과 인생에 대해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동조합 초청 줄고 신입단원 맥도 끊기고

왼쪽부터 심종석 기획실장, 김기영 상임연출가, 김선관 극단 대표다. 12월 19일 부산시민회관옆에 위치한 극단 사무실에서 밤 늦게 만나 연극과 인생에 대해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왼쪽부터 심종석 기획실장, 김기영 상임연출가, 김선관 극단 대표다. 12월 19일 부산시민회관옆에 위치한 극단 사무실에서 밤 늦게 만나 연극과 인생에 대해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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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넘어왔을 때 '일터'는 민주노총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일터를 거쳐간 사람들이 각 단위산업체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위원장을 다 맡았을 정도였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전국철도노조와 전국순회공연을 다니며 노동과 자본의 전선의 축에서 투쟁을 독려하며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1980~90년대는 싸움이 화두였어요. 전선을 만들고, 세를 규합해서 전선을 확대시키는 것이 당시 시대정신이었죠. 공연도 그렇게 갔어요. 조직을 만들고, 노동자들 전투성을 높이고, 조직 안에서 생기는 문제들, 전투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서들을 작품에 담았어요." (김기영 상임연출가)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민주노총이 안정된 조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일터를 보는 노동자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너거는 아직도 뻘건 것 들고 나오나", "야, 이거는 뻔히 다 아는 이야기 아이가" 하는 말이 노동자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 자신들이 그렇게 헌신했던 노동조합원들이 '일터'의 실력과 작품의 예술성을 문제삼기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 노동조합의 초청도 줄어들었다. 이전의 상하반기 조합원 교육시에는 1시간 30분짜리 연극을 보여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차츰 15분 노래공연, 타악공연으로 대체되었다. 불러줘도 정서를 움직이는 역할보다 분위기 띄우는 역할, 긴 시간의 공연보다 짧은 호흡의 공연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길고 지루한 것을 싫어해 집회시간도 짧아졌다.

변화의 칼바람은 '일터'를 위협했다. 신입단원들 맥도 끊어졌다. 몇 년째 신입단원이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때는 15~20명에 이르던 단원들이 5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어디에 중점을 둬야 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게 되었다. 일터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예술단체인가 교육단체인가. 일터의 공연 양식이 노래인지, 연극인지 아니면 통합연희단으로 가야 되는지 내적 논의가 치열하고 분분했다.

"옛날에는 교육의 일환으로 마당극을 하니까 다 붙어서 하면 되었지만 갈수록 전문성을 요구하니까 어느 것에 중점을 둬야 할지 그게 어려웠어요. 그것 때문에 6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토론만 한 적이 있었어요. 1996~97년 정도인가. 출근해서 토론하고 술 마시고 집에 가고. 또 출근해서 논쟁하고 술 마시고 집에 가고. 이것밖에 안 했어요." (김선관 대표)

싸움도 많았다. 어떤 날은 다들 입을 닫은 채 묵묵부답으로 반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막 논쟁을 하다가 별다른 해결점이 없으니까, 서로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으니까, 상호간 접점이 없으니까 괴로웠다. 일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지경까지 갔다. '해체'라는 단어마저 떠올랐다.

"나이로 막내는 아니고 중간쯤 되었는데, 제가 그랬어요. '주디(입)만 씨불이지(나불거리지) 말고 뭘 하면서 하자'고. 예술에 대한 욕망이 강한 친구들은 '왜 우리가 노동조합만 다녀야 되느냐, 지금이라도 배우자'고 말했죠."(김선관 대표)

'놀이패'에서 '노동문화예술단'으로 바꾸기까지

부산 범일동 노동복지회관 지하에 위치한 일터 소극장에서 20주년 심포지엄 '동아시아에서 민중연극인으로 산다는 것'을 끝내고 기념촬영.
 부산 범일동 노동복지회관 지하에 위치한 일터 소극장에서 20주년 심포지엄 '동아시아에서 민중연극인으로 산다는 것'을 끝내고 기념촬영.
ⓒ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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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하는 체계로 바꾸었다. 아침에 춤, 오후에 노래, 저녁엔 연기 연습. 하루 종일 연습하는 일정으로 채웠다. 타 지역 선배들을 초청해 춤도 배우고 민족극학교 연기 수업을 들었다. 배움에 집중하기 위해 풍물 등 외부로 나가는 강습을 모두 없앴다. 힘든 시기였다. 수입이 없어 배고픔도 가중되었다.

"우리 모두 대학교에서 돌 던지다 왔잖아요. 20살 넘어서 '딴따라(배우짓)' 할 것을 배우니까, 10살 때 배운 사람과 다를 수밖에요. 마음과 달리 기교적이고 기술적인 면에서, 몸 움직이는 게 안 되는 거예요. 환장하겠데요." (김선관 대표)

그래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각자 배워 온 것으로 워크숍도 하고 발표회도 열었다. 노래는 노래패 출신 단원에게 더 가르침을 받았다. 춤은 무용학과 출신인 안무가에게 더 배웠다. 어쨌든 열심히 배우고 연습하고 익히는 데 몰입했다.

1998년도 총회에서는 '놀이패 일터'에서 '노동문화예술단 일터'로 이름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1995~96년부터 결혼한다고 떠났던 김기영, 윤순심, 반민순, 손영선 등 여성 선배들이 복귀를 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연출자, 극작가, 안무가, 배우로 자리를 잡으면서 극단의 분위기도, 작품의 내용도 바뀌기 시작했다. 노동현장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작품까지 만들어야 되는 그런 부담에서도 벗어났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의 노동계는 여러 계층으로 나눠져있고, 조직된 노동자들은 문화를 향유하는, 노동계급 내에서도 기득권자예요. 그러나 소수로 존재하는 비정규,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해요. 이런 소외된 사람들의 삶 속에서 누구나 동의하고 공감하는 그런 정서를 포착하고 끄집어내서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김기영 상임연출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가. 행복이란 돈과 명예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인가. 투쟁만이 노동조합, 노동운동의 일인가. 자본가들과 협상해서 임금을 더 올리는 것만이 노동자들의 행복인가. 이제는 연극을 통해 그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거죠." (김선관 대표)

배우고 익히는 삶은 즐거웠지만, 배는 고팠다

20주년 기념으로 올린 연극 '흩어지면 죽는다'의 한 장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터를 떠났던 선배연극인들이 다시 돌아와 주연을 맡았다. 이들은 현재 일터의 든든한 후원자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20주년 기념으로 올린 연극 '흩어지면 죽는다'의 한 장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터를 떠났던 선배연극인들이 다시 돌아와 주연을 맡았다. 이들은 현재 일터의 든든한 후원자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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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삶은 즐거웠지만, 배는 고팠다. 단원들은 처음에 6만원을 받았다. 그 전에는 토큰 30개. 장부에 보면 '120원 빌려감'이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공연이 끝나고 수고비를 받아도 다시 파업 지원비로 되돌려 주고 돌아오기도 했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임금이 8만원으로, 20만원으로 조금씩 올랐다. 이것마저도 생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다. 지금은 40만원 받고 산다.

"어릴 적에는 괜찮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부모님 생신이나 편찮으실 때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또 후배들이 "형님, 나 고민 있어요. 술이라도 한 잔 합시다" 하면 돈 때문에 "나 오늘 바쁜데" 이럴 수 없잖아요. 나도 선배들에게 얻어 먹고 살았는데…. 작은 일에서 한 번씩 마음이 쓸쓸해질 때가 있어요." (김선관 대표)

힘든 재정으로는 연구와 공부가 충분히 이뤄진 깊이 있는 작품, 진짜 하고 싶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가 어렵다. 50명, 100명의 소규모 사업장에서 영화 한 편 못 보고 근근이 살아가는 아줌마 아저씨,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에게 달려가려면,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후원회 만들기에 나섰다.  

"우리가 뭐 잘하는 게 있다고 남한테 돈을 받고 그러냐. 쪽팔리게. 자존심 상하게 그런 걸 해야 되느냐는 말도 있었어요. 하지만 내부 논의 끝에 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어요. 어느 날 현장에서 공연이 끝나고 퇴장하기 전 관객들에게 "우리가 8만원 받고 20만원 받고 삽니다" 고백했어요. 그랬더니 노동자들이 "일터 단원들은 백만원 이상 받는 줄 았았다"고 하더라구요." (김선관 대표)

현재 430명의 후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2년 내에 1000명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고무적인 것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들, 일반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좋다"며 후원회로 가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거예요. 그분들을 보면서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구나 싶고, '일터가 놀고 있지 않구나, 열심히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노력해야죠. 그래서 갈수록 후원회원들이 좀 무섭기도 합니다." (심종석 기획실장)

극단 일터 단원들. 힘들지만 좋아서 한다는, 피대로 산다는 일터 사람들은 싸움을 하도 많이 해서 속이 털리고 닦여져서 무심의 경지에 이르렀다.
 극단 일터 단원들. 힘들지만 좋아서 한다는, 피대로 산다는 일터 사람들은 싸움을 하도 많이 해서 속이 털리고 닦여져서 무심의 경지에 이르렀다.
ⓒ 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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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단원들은 지금 현재 총 14명. 여자가 8명, 남자가 6명이다. 거칠고 투박할 수 있는 노동문화계에서 일터 배우들도 거칠었다.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면, "에이, 씨~" 하며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다. 하지만 여성 단원 수가 늘어나면서 그런 폭력이 사라졌다. 서로간의 배려심도 많아졌다. 여성 단원들과 부대끼면서 부드러움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여성 단원들은 다들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 어머니 품성을 갖고 있어요. 남자들은 약간 딱딱한 구석이 있잖아요. 그런 것이 많이 순화되고 부드러워졌어요. 제가 5대 종손인데, 설거지가 어디 있어요. 챙겨주는 밥이나 먹고 그러다가 일터에 와서 다 바뀌었죠. 지금은 아줌마가 다 됐어요. 배역도 아줌마 배역을 맡고. 하하." (김선관 대표)

남녀불문, 나이 불문, 밥 당번도 정해져 있다. 식사할 적에 밥 나르고, 설거지 할 때 그릇도 날라다 준다. 순회공연을 다닐 때 짐을 싣고, 의상을 정리하고, 분장도구를 챙기고, 뒷자리를 정리하는 역할들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자신의 역할과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한다. 극단 청소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사람이 물걸레를 잡는다. 청소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오늘은 니 해라" 그러면 그냥 한다.

"대본 들고 리딩할 때 어떤 사람은 누워서 읽고, 자유분방하게 해요. 연습할 적에는 대본 말고 배우들의 힘에서 나오는 것도 있으니까. 자유스럽지 않으면 '뭐가' 안 되죠." (김선관 대표)

"무대 못 떠나는 이유? 이유 없어요, 내 피가 그러니까"

극단 일터는 1, 2집 노래앨범을 만들었고 연극 대본집도 발간했다.
 극단 일터는 1, 2집 노래앨범을 만들었고 연극 대본집도 발간했다.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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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일이라도 몇 십년씩 힘들게 가다 보면 어떤 때는 자신의 일에 회의가 들고 세속적인 유혹에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다. 사회는 이른바 잘 나가는 주류들에게만 박수치기 때문에, 겉으로 폼나고 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하고 입에 올리기 때문이다. 해서 "힘든 길인데 왜 계속 이 일을 합니까"라고 조금은 얄팍하고 통속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처음에는 사회가 조금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소명의식으로 했어요. 그 다음에는 쳐다보는 눈길, 해놓은 약속, 미련도 남고, 재미있는 구석도 있어 했어요. 사실 힘들어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방송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이 길을 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어요. 요즘은 그냥 좋아서 가요. 피가 그러니까, DNA대로 사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김기영 상임연출가)

그냥 좋아서 한다는 말에 떠오른다.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아무런 흔들림 없는 상태'를 이르는 '장자'의 우화 싸움닭 이야기가. 일터의 단원들은 모두 투쟁의 끝과 변화의 시련 속에서 자신을 덜어내고 비워낸 무심의 경지, 그 깊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고수'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일터의 연말공연 뮤지컬 <달밤블루스>는 오는 1월 18일까지, 부산시민회관 옆 일터소극장에서 열린다. 문의 635-5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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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다음블로그에도 올립니다.



태그:#극단 일터, #달빛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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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tracking photographer. 문화, 예술, 역사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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