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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시간(과 여유)이 없어서 연락도 못하고 왔어요. 미안해요, 형수님."

그는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미리 눈물이 나서 감정을 다스렸는데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는 그의 말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10월 5일(일) 있었던 일이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아니 이젠 방글라데시로 쫓겨났으니, 한 때 '이주노동자'였던 사람이다. 3주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 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무닐이라는 것 외에 사실 나는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 그가 가고 나니 내가 그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뒤늦은 후회가 생긴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멀지 않은 시골마을이 고향이라는 사실과 그 고향마을 집 앞에 커다란 망고나무가 자란다는 것이다. 그는 집앞의 망고나무를 언젠가 꼭 한번 구경하러 오라고 그랬다. 그는 자기네 집 망고는 크고 너무 맛있다고 늘 자랑하곤 했다.

망고주스 건네던 무닐, 난 어느새 형수님 됐다

 '이주노동자 추방반대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는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 추방반대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는 이주노동자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런 그는 항상 캔으로 된 망고주스를 사들고 우리를 찾아오곤 했다. 그에게 있어 세상의 가장 맛있는 열매는 망고였던 모양이었고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서른둘, 한국에서 12년을 살았다.

안산에서 4년여를 일하다가 이 곳 남양주로 오게 된 건 8년 전이었다. 가구공단에 많은 이주노동자가 몰려들었다. 그만큼 일손이 필요해서다. 가구공단이 이주노동자의 노동으로 활기를 띨 무렵엔 저마다 국적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을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곳에 이사온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주말이면 일주일간 쌓인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시내로 나온 이주노동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

무닐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시내에서 장사를 하는 우리 부부에게 그가 찾아왔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뭔가 묻기 위해 들렀던 그에게 우리가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을 뿐인데 감사하다며 다음 번 우리를 찾아 왔을 때 예의 '망고주스'를 건네주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그는 가끔 우리 부부를 보러 우리가 일하는 장소를 찾아왔고, 머지않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형님'과 '형수님'이 되었다. 

가끔 토요일 저녁엔 호프집엘 동행하기도 했다. 호프집 거의 반을 차지한 이주노동자들의 떠들썩함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구공단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때 얘기다.

어느 날, 뜬금없이(?) 우리나라는 '4년 이상 체류한 이주노동자'를 불법체류자로 간주한다는 발표를 했다. 가구공단에서 각자 나름대로 '프로 기술자' 취급을 받던 이주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4년 이상 이 땅에 머무른 이들이었다.

"고용허가제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꼽히는 것은 4년 이상 한국에서 일해온 이주노동자들을 강제출국시킨다는 것. 이미 8월 31일자로 자진출국기간이 종료됐고, 오는 11월이면 단속추방이 본격화된다. 해마다 하는 단속이지만, 이번에는 불법체류자를 청산하기 위해 더욱 강경한 단속이 이루어질 전망이다…5년이 넘은 외국인 입국자에 대해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국제법 규정을 감안해 체류기간을 4년으로 잡았다."-<오마이뉴스>(2003년 9월 10일)

정부의 발표 이후 거리엔 이주노동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밤과 주말을 이용해 여전히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그들은 조심스런 외출을 하곤 했다.  밤거리, 특히 주말의 밤엔 공중전화부스가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한때 휴대폰을 가지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이 가족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이 땅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진을 치곤 했다. 그게 오래 전의 얘기가 아니고 불과 4~5년 전의 얘기다.

그러나 그것도 출입국관리소에서 불법체류자를 체포하기 위해 평일에만 '뜰' 때의 얘기고, 평상시에도 밤이면 안전했고 주말엔 괜찮았다. 평시와 다름없이 주말에도 출입국관리소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부터 어느 순간 이주노동자들은 꼭꼭 숨고 말았다.

"베테랑이 된 저를 사장님이 보호해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불법'이란 이름으로 구금된 뒤, 추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불법'이란 이름으로 구금된 뒤, 추방되고 있다. ⓒ 송주민

이주노동자가 빠진 거리가 조금은 허전해졌고, 수출은 잘 된다는데 내수가 부진한 탓인지 가구공단도 서서히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닐은 그 사이 사이에도 가끔 시내에 들렀다가 우리를 보러 왔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그는 자꾸 밖을 의식해야 했고 우리는 '괜찮겠냐'고 되묻곤 했다.

이야기 도중에도 자꾸 밖을 의식하면서도 그는 "괜찮다"고, 자신이 일하는 사장님이 이젠 베테랑이 된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했다. 모란공원 뒤쪽에 있는 작은 소파공장에서 일하는 그도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든 '프로 기술자'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 일 못해요. 벌써 몇 사람이 다녀갔는데 한 달도 못 견디고 나가버렸어요."

소파공장에서 하는 그의 기술이란 게 별거 있겠는가. 그 기술이란 것도 한 달도 못 견디고 나가버리는 사람들 틈에서 거의 8년을 한 자리를 지키며 얻은 기술을 말할 것이다. 그 일은 냄새가 많이 나는 일이라고 했고, 손이 많이 상하게 되는 일이라고 했다.

한번은 팔이 심하게 다쳐서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었던 그의 손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사장님이 보호해주니 걱정이 없다면서도 그는 자꾸 어두운 거리를 의식하곤 했다.

정부는 지난 6월 불법이주노동자를 단속하겠다며 사업장 진입을 허용한다고 발표를 했다. 출입국관리소에서 사람이 '뜰' 때면 공장 뒤편의 산(언젠가 가을 무렵 그와 함께 밤을 따던)으로 피신을 하곤 했던 무닐은 그래도 자신은 괜찮다며, 걱정하는 우리를 오히려 안심시키곤 했다.

"당국은 그동안 불법적으로 해왔던 마구잡이 단속 관행을 아예 법으로 명문화할 태세다. 법무부는 영장 없이 불심검문과 단속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 제46조 1·2항은 '출입국관리공무원은 영장 없이도 직원 판단에 따라 불심검문을 할 수 있고 사업장에 들어가 단속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향신문>(2008년 8월 13일)

늘 웃음을 잃지 않은 그였다. 주변의 동료들이 술 마시고 오락에 빠져 들었을 때도 다른 데 눈길 한번 안주고 묵묵히 일하고 봉급을 받아 가족들에게 보내던 그였다. 이미 만기가 꽉 찬 그에겐 화상으로 선을 본, 그래서 결혼할 여자도 고향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혼은 나중에"라며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던 그였다.

공장 앞마당 작은 연못에 오리새끼를 사다 키우는 중이라며 이웃집 개가 물어 죽여서 세마리만 남았지만, 오리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예쁜지 보여주고 싶다는 그였다. 그 오리를 보러 가마고 약속하고, 나는 잊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방글라데시인인 그의 친구가 전해주었다. 그래놓고 보니 그에게 안부를 전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의 친구 되는 이에게 방글라데시 무닐의 집 전화번호를 물으니 그도 모른다고 했다. 작업장에서 말 그대로 '끌려가다시피' 했으니 그 역시 아무런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그 친구도 소문을 들어서 그리 알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가장 나쁜 방법으로 이 땅과 결별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이 땅과의 가장 나쁜 결별을 하게 한 이 땅의 한 사람인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미안해요 형수님"... 누가 미안하다는 말인가

지난 일요일 그에게 전화가 왔다. 다행히 그에게 우리 연락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가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나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가 말했다.

"미안해요, 형수님."

누가 미안하다는 것인가. 그가 현행법으로 불법체류자 신분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의 송환 방식은 너무도 비인간적이었다.

"너무 무서웠어요."

그가 덧붙였다.

이민국에서 갑자기 자신을 체포했을 때 그는 너무 무서워 빨리 방글라데시로 가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일한 만큼의 봉급도 해결이 안 됐고, 퇴직금을 받을 아무런 조치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이 땅에서 끌려나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전에 일하던 사장과 통화를 했는데 내년에 한국에 오면 그때 해결해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이 너무 불분명해서 가구공단에 있다는 이주민센터에 전화를 넣어 보았다. 그가 아마 내년에 오기란 쉽지 않을 거라면서도 도와줄 방법을 찾아보자며 한 번 들러주라고 한다. 아무 힘이 없는 내가 그를 도울 작은 방법이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작은 노력이라도 보태고 싶다. 나의 '미안함'에 대한 사죄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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