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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지난 여름에 거창하게 지리산 종주를 목표로 산에 올랐는데 산장 예약이라는 숙박을 해결하지 못해 아쉽게도 지리산의 품에서 하룻밤만 보내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아쉬움이 매우 깊었습니다. 그래서 선선한 가을이 오면 꼭 산장 예악하고 지리산을 종주하자고 약속했건만 매사가 그렇듯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남편의 허리 통증이 이번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난여름에 다녀온 경험을 글로 쓰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 합니다. 지리산의 특별함을, 그리고 거기서 받았던 감동과 깨달음, 그리고 아름다운 산사람에 관해 3회에 걸쳐서 쓰고자 합니다. - 기자 주

 

지리산에 오르려면 산장예약은 필수

 

우리 가족은 8월14일부터 1박2일간 지리산을 다녀왔습니다. 원래 계획은 3박4일간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종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장을 예약하지 못해서 우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이 자신이 산에 다닐 때는 텐트도 치고 했다고 산에서 잘 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해서 그 말만 믿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요즘은 산에서 야영도 안 되고, 산장 예약도 필수라고 했습니다.

 

지리산 종주는 남편이 먼저 제안했습니다. 대학 때 동아리 사람들과 어울려 지리산 종주를 했는데 그게 20년 전 일이라며 한 번 다녀오자고 나를 꼬드겼지요. 지난 번 대청봉에 올라갔던 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안게 된 나는 사실 산의 매력에 빠져 있던 터라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거사인 지리산 종주에 가장 큰 복병이 있습니다. 우리 큰 딸이지요. 지난 번 대청봉 때는 어떻게 꼬드겨서 산에 올라갔는데 올라가서는 힘들다고 '아동학대'라며 온갖 협박을 다하고, 자기 혼자 다시 내려가겠다며 떼를 썼던 큰 딸이 이번 계획에 흔쾌히 동참할 리 만무해서 큰 딸을 꾀는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아동학대라고 협박하던 큰 딸, 군소리 없이 따라 나서다

 

그런데 참 뜻밖이더군요. 별 군소리 없이 따라나서는 것이 아닙니까. 아마도 큰 딸도 나와 마찬가지로 대청봉 올랐던 경험이 힘이 들긴 했지만 그 산에 올라간 자신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됐고, 한 번 올라갔는데 두 번쯤이야 하는 오기도 생긴 모양입니다.

 

큰 딸이 오케이 한 마당에 우리 계획은 순항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다란 실수를 했습니다, 산장을 예약하지 않은 것이지요. 지리산을 오르는 시발점인 중산리 매표소 앞에서 직원의 한 마디에 우리는 깊은 좌절감을 맛봐야 했습니다.

 

"산장 예약 안하면 올라갔다가도 도로 내려와야 해요."

 

종주를 포기하고 어디 바다로 가서 텐트 치고 수영이나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참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가 않는데도 무작정 올라가자고 우겼습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지만 어떻게 될 것이라는 긍정의 힘에 이끌렸다고 할까요.

 

우리가 올라가려는 시간이 오후 1시였는데 천왕봉을 지나서 장터목산장까지 가면 아마도 저녁 7시에서 8시는 돼야 하는데 그런 캄캄한 밤에 도착한 나그네를 그냥 내쫓지는 않을 것이라는 나의 인정주의와 '예약 안한 사람은 절대로 안 재워주니 내려와야 한다'는 매표소 직원의 행정주의 중 누구 편을 들어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인정주의와 행정주의, 누가 이길까?

 

난 원칙을 무시하고 나의 막연한 인정주의에 이끌려 올라가자고 남편을 꼬드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자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작정 지리산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올라가는 길에 한 가족을 만났습니다. 우리처럼 부부가 애들을 데리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산리 매표소서 천왕봉까지 한 번에 오르는 건 힘들 것 같아서 천왕봉 오르는 중간에 있는 로터리 산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일찍 산을 오를 거라고 했습니다.

 

그 가족의 앞길이 고속도로라면 우리 가족이 걷는 길은 꼬불꼬불한 밤길 같았습니다. 지쳐있는데 잠자리도 없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하나 은근히 걱정도 됐습니다. 그리고 애들한테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 부부는 애들을 배려해서 저렇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길을 떠났는데 산에 오르는 것만 신나했지 우리가 애들을 위해 한 게 뭔가, 하는 생각에 참 미안한 기분이 들더군요.

 

올라가다가 중산리 매표소 주차장에서 로터리 산장 아래 순두류까지 몇 킬로미터를 오가는, 절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만났습니다. 이 버스를 타게 되면 좀 더 빨리 지리산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각자 천 원씩 내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지리산은 보통 산이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산이 아니지요."

"저희는 설악산 대청봉도 올라갔다온 사람인데요."

 

설악산 대청봉이라고 하면, 이 사람들이 산을 좀 탈 줄 아는 사람이겠구나, 하고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었는데 셔틀 버스를 운전하는 아저씨는 한심해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저씨의 뜻밖의 반응에 좀 의아했습니다.

 

"설악산이고, 한라산이고 글쎄 그런 산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 지리산만 50번을 넘게 오르는 사람도 봤어요. 그 사람이 지겹게 뭐 하러 자꾸 오겠어요. 지리산은 올 때마다 다른  뭔가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지리산은 특별한 산이에요."

 

나름대로 설악산 대청봉에 오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지리산만 특별하다고 하니까 한편으로는 비웃어졌습니다. 자기가 지리산에서 셔틀버스 운전한다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생각했지요. 솔직히 지리산에 오른 적이 없어서 산이 거기서 거기지 뭐 특별하겠나, 하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천왕봉을 정복하는 자체에 의미를 뒀지 지리산 자체에서 특별함을 찾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의 이 생각은 지리산을 오르면서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지리산은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기암절벽이 둘러쳐진 그런 모습은 아니었고, 한라산처럼 생소한 모습의 나무도 없었지만, 그러나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산이었습니다.


#지리산#증산리#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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