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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는 수송선(LST) 갑판에 피란민들이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올랐다. 부두에는 미처 수송선에 오르지 못한 피란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1950. 12. 19. 흥남부두).
 후퇴하는 수송선(LST) 갑판에 피란민들이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올랐다. 부두에는 미처 수송선에 오르지 못한 피란민들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1950. 12. 19. 흥남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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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에 비친 6·25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표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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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 여섯 살 난 소년이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길고도 무더웠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로 귀청이 멍멍했다.
논이나 밭, 들길에는 뽕나무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체들, 전투기들의 융단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이런 장면들이 또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여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2004년 정초, 나는 <오마이뉴스> 여러 누리꾼들의 성원으로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갔다. 그때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 War' 파일을 들치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이것이다' 하고서.

여기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트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신병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물을 먹이면서 무운장구를 비는 어머니(1950. 12. 18. 대구역 광장)
 신병 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물을 먹이면서 무운장구를 비는 어머니(1950. 12. 18. 대구역 광장)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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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유엔군들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하듯 남하하는 피난민 모습,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난민들이 어린 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역에서 남행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난민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가져다가 우리 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은 허용된다고 하여, 재미 동포의 도움을 받으며 40여 일간 수만 매의 사진자료를 들춰 그 가운데 480여 매를 가려 복사해 왔다. 귀국 후 곧장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언론들이 대서특필해 주고, 독자들의 성원도 컸다.

인민군 소년병이 포로로 붙잡혀 미 조사관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 가운데 여인은 통역이다(1950. 8. 18.).
 인민군 소년병이 포로로 붙잡혀 미 조사관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 가운데 여인은 통역이다(1950. 8. 18.).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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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사진 수집코자 세 차례 미국에 가다

나는 아카이브(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미처 들춰보지 못한 사진들이 눈에 어른거려, 다시 지난 2005년 11월과 2007년 2월에 워싱턴 행 비행기에 올랐다. 1차 방미 때 곁에서 도와주신 박유종 선생(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 손자)이 다시 소매를 걷어주셨다.

2차 10여 일, 3차 10여 일 동안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아카이브에 출근해서 마지막 퇴근자로, 자료실을 샅샅이 뒤져 모두 1300여 매의 한국전쟁 사진을 입수해 와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2, 3>과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을 엮었다.

누가 이 단발머리 소녀를 모르시나요? (1951. 1. 12. 부산임시포로수용소)
 누가 이 단발머리 소녀를 모르시나요? (1951. 1. 12. 부산임시포로수용소)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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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박유종 선생은 아카이브 5층 사진자료실에서 하루에도 수만 장의 사진을 살피면서 산삼을 캐는 심마니의 심정으로 사진을 찾았다. 자료실의 사진 상자를 들출 때마다 수십 년 묵은 먼지를 마시는 고통도 있었지만, 지난 역사를 반추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15, 16세의 애송이 인민군 포로가 심문당하는 장면은 그가 교실에서 장난치다가 교무실로 불려 와서 담임선생에게 야단맞는 개구쟁이처럼 보였다. 포로수용소 천막 막사 앞에서 유엔군 포로감시병이 분무기로 이를 박멸하고자 포로들의 온몸에 디디티를 뿌리는 장면은 '믿거나 말거나'라는 프로를 보는 듯했다.

포로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 포로도 이따금 눈에 띄였다. 단발머리 앳된 소녀가 낡은 군복을 입은 채 천막막사 앞에 체념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은 어딘가 처절해 보였다.

국군 인민군 유엔군 중공군 가릴 것 없이 전사자들의 시신들이 가을 낙엽처럼 산길 들길에 나뒹구는 장면도 숱하게 많았고, 전주 진주 대전 함흥 등지의 끔찍한 민간인 학살자 사진도 이따금 나왔다.

그 시신들이 철사 줄로 꽁꽁 묶인 채로 누워 있는 장면 앞에서는 나와 박유종 선생은 깊이 묵념을 드렸다. 이런 참혹한 학살 사진들은 대부분 가해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었다. 이런 학살에 어느 편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멀쩡한 사람도 야수로 만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시신들의 영혼은 아직도 구천을 헤매고 있으리라.

세계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

엄마는 일터로 가고 소녀는 동생을 데리고 노천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1950. 10. 서울 은평).
 엄마는 일터로 가고 소녀는 동생을 데리고 노천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1950. 10. 서울 은평).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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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더미 속에는 이따금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다. 전란으로 교실이 불타버려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는 한 소녀가 동생을 무릎에 앉힌 채 공부하는 장면과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처마 아래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마치 한국인의 저력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좋았다.
사진 속의 소년 소녀들이 남루한 차림이지만 그들의 해맑은 표정과 미소가 폐허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내가 본 사진 가운데 가장 감동작인 장면은 한 남정네가 시각장애인에다가 병중인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난을 떠나는 장면(1950. 9.)으로 아름다운 부부애의 극치였다. 그 사진을 찾고는 그 성스러움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세계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그것은 동족간 총부리를 겨누었던, 한 형제간 이편저편이 되어, 심지어는 한 사람이 남에서 북에서 총을 들었던 골육상쟁의 전쟁이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이기 때문이다.

워싱턴 기념탑 옆 한국전쟁 전몰자 위령비에 새겨진 전사자 수는 미군 5만4천여 명, 유엔군 62만여 명, 부상 미군 10만여 명, 유엔군 100만여 명, 실종 미군 8천여 명, 유엔군 4만7천여 명으로 자유진영 전체 사상자가 200만 명에 가깝다. 공산 진영의 인민군과 중공군 전상자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350만여 명이라고 하니,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사상자는 어림잡아 오백만 명은 넘었다.

북한의 한 학생이 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든 채 살려달라는 애원을 하고 인민군 병사는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1950. 10. 21. 평양).
 북한의 한 학생이 자기가 그린 태극기를 든 채 살려달라는 애원을 하고 인민군 병사는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1950. 10. 21.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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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기록을 능가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자료를 다른 나라에 가서 찾는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한국의 귀중한 자료는 국내보다는 미국 일본 러시아 영국 중국 등지에 더 많이 있다. 고대사는 중국에, 근대사는 일본에, 근 현대사 자료는 미국 러시아 영국 중국 일본에 산재돼 있다.

우리 나라의 자료를 다른 나라가 더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단적으로 지난날 우리의 국력이 그만큼 약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기록을 중요시하지 않은 탓도 있고, 있는 자료조차도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훼손한 일도 없지 않았다.

"기록하는 자가 앞서 간다"는 말은 진리다. 선진국일수록 기록에 철저하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기록을 능가할 수 없다. 고려 때 청자를 빚었던 도공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 비법이 끊어지고 말았다. 진실한 기록, 한 장 사진은 역사의 물줄기를 틀기도 한다.

현명한 백성들은 조상이 남긴 기록을 보고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는다.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해야 할 가장 큰 책무는 역사의 진실을 남기는 일이다. 외람되지만 나는 이런 소명으로 이 사진들을 찾아와,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김원일·문순태·이호철·전상국 선생의 생생한 체험담과 함께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눈빛 출판사 펴냄)을 엮었다.

원로 문인들이 겪은 6· 25 한국전쟁

피란 못 간 서울시민도 입에 풀칠은 해야 했다. 화원시장에 나가보면 사람 떼거리로 시골대목장을 방불케 했다. 집에 있는 온갖 것을 갖고 나와 난전을 펼쳐놓고 팔았다. 사람들은 양식과 푸성귀를 구하려 혈안이 되었다. 청계천 쪽으로 나갔다가 청계천 바닥에 걸레처럼 던져져 있는 시체도 숱하게 목격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던 때인지라 옆집 사람이 폭격을 맞고 죽어도 그러려니 했지 놀라지 않았다.
- 김원일 '서울에서 겪은 인공치하 석 달' 가운데서

뜨거운 전우애로 부상단한 전우를 업고서 후송시키는 국군(1950. 7. 29.)
 뜨거운 전우애로 부상단한 전우를 업고서 후송시키는 국군(195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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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산까지 가는 동안 나는 너무 많은 시체들을 보았다. 발가벗겨진 채 비를 맞아서 배가 팅팅 부어오른 여자의 시체며, 나무의 중간쯤을 잘라 끝을 날캄하게 깎은 다음 죽은 사람의 항문으로부터 쑤셔 박아 살아있는 사람처럼 꼿꼿하게 세워 둔 시체, 음부에 작대기를 꽂아놓은 발가벗겨진 젊은 여자의 시체도 보았다.
개울가나 길가의 풀섶, 후미진 숲정이마다 시체가 있었다. 마을 어귀의 텃밭에도,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밭이나 흙구덩이와 대밭에도 어김없이 시체가 썩고 있었다. 한번은 연기가 나지 않는 싸리나무를 꺾으러 갔다가 소나무에 등을 기댄 채 빳빳하게 앉아 있는 시체를 보고 질겁한 적이 있었다.
- 문순태 '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 가운데서

내 나이 열아홉 살 때  6·25 전쟁을 겪었다. 그 당시 나는 북한에서 고3 학생으로 군문에 동원되어 현재 경상북도 울진까지 내려갔다가 바로 그해 9월 26일 추석날 저녁에 북상하던 한국군과 밤새 일전을 벌였으나, 박격포 중대에 속해 있던 나는 따발총 한 발도 쏘지 못한 채, 이튿날 9월 27일에는 후퇴 길에 들어서 태백산 속을 북상해 올라오다가 양양 수리 뒷산을 통해 내려오던 중에 포로로 잡혔던 것이었다.
- 이호철 '한국전쟁 속의 희비극'

전쟁이 나기 몇 달 전으로 기억한다. 읍내 경찰서 뒷마당에 잡아다 놓았다는 ‘빨갱이’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경찰서 담벼락에 매달렸다.

어른들이 말하는 빨갱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날 경찰서 뒷마당에 포승에 묶인 채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남자어른들을 보았을 뿐이다. 더 맥 빠지는 일은 그 빨갱이 속에 우리 이웃집 아저씨가 끼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 전상국 '내가 겪은 6·25 전쟁' 가운데서

병중의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길에 나서는 한 남정네의 순애보(1950. 9.)
 병중의 아내를 지게에 지고 피란길에 나서는 한 남정네의 순애보(195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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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내가 겪은 6.25 전쟁

김원일 외 글, 박도 사진편집, 눈빛(2006)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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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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