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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6급의 강은식(53)씨에게는 28년째 운영하는 그의 구두방이 유일한 가족의 생계원이다.
 장애 6급의 강은식(53)씨에게는 28년째 운영하는 그의 구두방이 유일한 가족의 생계원이다.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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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물도 풀린다는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우수(雨水)에 천안의 한 장애인은 가족의 생계터를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장애인 가장의 가슴은 한 겨울 혹독한 추위보다 더한 앞날 걱정에 얼어버렸다. 또 다른 부부 장애인은 생계터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1평도 채 안되는 구두방안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

19일 오전 11시 천안시 문성동 문성동사무소 담장 양 켠에 인접한 2곳의 노상 구두방에 천안시청 건설과 소속 지도단속반원들이 나타났다.

검은 복장을 한 건장한 체격의 젊은 지도단속반원 20여명을 대동한 윤혁중 천안시 지도단속팀장은 구두방을 운영하는 장애인들에게 철거를 통보하며 구두방으로 사용되는 컨테이너 점포의 이전 작업을 지시했다.

이에 대해 구두방을 운영하는 장애인들은 "이럴 수는 없다!"며 격렬히 항의했다.

장애인 가정의 유일한 생계터인 노상 구두방

19일 천안시 지도단속반원들이 철거에 나선 노상 구두방 2곳의 운영자는 모두 장애인들이다. 구두방 1곳은 장애 6급의 강은식(53)씨가 28년째 운영하는 곳이며 또 다른 구두방은 장애 3급의 지체장애인인 박장규(55)씨가 지난 90년부터 18년째 운영하고 있다.

수급권자 2종으로 14평의 저소득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강은식씨에게 구두방은 가족의 유일한 생계터이다. 강씨네 가족은 부인인 이현숙(46)씨도 5급 장애인인 데다가 부인은 당이 높아 힘든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처지.

매달 30만원 가량의 생계보조금이 정부에서 지급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대학교 1학년인 두 자녀를 비롯해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 가족의 부족한 생계비는 오로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강씨가 구두방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해 버는 일당으로 충당됐다.

단속반의 철거에 저항하며 오열하는 부인 옆에서 강은식씨가 몸에 기름을 붓고 앉아 있다.
 단속반의 철거에 저항하며 오열하는 부인 옆에서 강은식씨가 몸에 기름을 붓고 앉아 있다.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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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화동 일대 경기가 쇠락하면서 구두방을 찾는 손님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하루 수입이 많아야 2~3만원, 적을 때는 종일 천원짜리 몇 장을 손에 쥘 때도 있다고 강은식씨는 말했다.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도 앓고 있는 강씨는 수술도 해야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요즘은 병원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업친데 덥친격으로 대학 1년을 마치고 군에 간 큰아들 마저 최근 군에서 아버지와 같은 질환인 신경섬유종 판정을 받고 의가사 제대했다.

지난 1월 9월에는 가족들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마저 전해졌다. 천안시가 '강씨의 구두방이 천안시 소유의 도로부지를 점유하고 있다'며 철거를 통보한 것. 수십 년을 머물러 오던 곳에서 난데없이 나가라는 천안시의 통보에 그는 생계난을 호소하며 존치를 부탁했다.

몇차례 철거시한을 연기한 천안시가 19일 오전 지도단속반원을 대동하고 강씨의 구두방에 나타나자 강씨는 격렬히 저항했다. 지도단속반원들이 구두방으로 연결된 전선을 끊고 구두방 안에 있던 강은식씨와 부인 이현숙씨를 구두방 밖으로 끌어내려 하자 강씨는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몸에 신나를 뿌리며 저항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지도단속반원들은 강씨의 구두방과 100m도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구두방으로 향했다.

천안시 "한달만 유예해 달라"는 호소 저버리고 철거 강행

박장규씨가 구두방 철거에 항의하며 점포 앞에 앉아 있다.
 박장규씨가 구두방 철거에 항의하며 점포 앞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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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의 구두방과 함께 19일 철거대상에 포함된 또 다른 구두방은 박장규씨의 일터이다. 소아마비로 보행이 불편한 박씨는 지난 1990년부터 구두방을 운영하며 부인과 함께 두 자녀를 키우고 있다.

단속반원들이 컨테이너 박스로 가설된 박씨의 구두방에 올라 현판을 떼어내고 전기를 끊자 박장규씨는 구두방 앞에 앉아 "한달만 더 기한을 달라"며 호소했다. 박씨는 "옮겨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지금 철거를 강행하면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며 "3월까지만 철거를 유예해주면 자진해 옮기겠다"고 말했다.

지도반원들은 한달만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는 박씨의 간청을 외면한 채 철거작업을 강행했다. 이에 주변 상인들 서너명이 합세해 지도반원들의 막무가내 철거방식에 문제제기 했고 정오쯤 철거반원들은 잠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철거는 얼마 후 재개됐다. 철거가 미뤄진 것으로 안 박씨가 구두방을 비우고 점심을 먹고 온 사이 지도단속반들이 철거작업을 재개해 18년동안 한자리를 지켜오던 박장규씨의 구두방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구두방이 없어진 자리에서 허탈해하는 박씨 주변에 모여든 이웃 주민들은 한결같이 천안시를 성토했다.

한 주민은 "교통이나 보행불편도 야기하지 않는데 철거가 꼭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한쪽에서는 장애인들의 자립과 재활을 돕는다고 하면서 또 한쪽에서는 시가 나서서 장애인의 생계터를 허물어버리고 있다"며 "한달만 더 미뤄달라는 간청이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는가"라고 한숨을 토했다.

철거로 구두방이 없어진 자리를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는 장애 3급의 박장규씨.
 철거로 구두방이 없어진 자리를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는 장애 3급의 박장규씨.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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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생계터를 잃어버린 박씨는 "구두방 옆으로 폐업한 다른 불법점포들도 즐비한데 하필 구두방만 철거대상으로 지목한 까닭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날 구두방 철거를 현장에서 지휘한 윤혁중 천안시 지도단속팀장은 "구두방이 점유하고 있는 땅이 천안시 소유의 도로 부지"라며 "문성동사무소와 상가번영회에서 '미관상 좋지 않다'는 민원을 수차례 제기해 철거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윤 팀장은 또 "지난해 9월부터 철거를 계도하는 등 합법적인 절차는 충분히 밟았다"며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어 강행했다"고 말했다.

철거현장을 지켜 본 주민들은 "강은식씨와 박장규씨의 구두방이 관공서인 천안시 문성동사무소와 담벼락이 맞닿아 있어 철거대상으로 지목된 것 같다"며 관공서 미관을 장애인 생존권 보다 더 중요히 여기는 천안시 행태에 불만을 제기했다.

문성동사무소는 구 한전천안지점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난해 9월 18일 현 건물로 입주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천안지역 주간신문인 천안신문 468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윤평호 기자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cnsisa



태그:#천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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