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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 한 점 날개가 된 애마 로페카(Ropeca).
▲ 사막도로 도로 위 한 점 날개가 된 애마 로페카(Ropeca).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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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지 않는 그녀와 터진 타이어

사람의 마음을 깊은 침잠으로 몰아넣고 허탈하게 하는 단어가 있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끝내 그녀의 발걸음이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힘없이 가라앉은 타이어. 둘 다 마음까지 찢어지게 만든다. 펑크다. 송글송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는 바람을 맞다 튜브를 빠져나오는 바람을 바라보는 아이러니란.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막의 도로만큼 거친 게 없다. 자전거 여행자를 무척이나 괴롭힌다. 이번 여행에서도 펑크의 8할 이상은 사막에서 무더기로 난 것이다. 지난 밤 숙소의 악몽을 털고 출발하자마자 앞바퀴가 탄력을 잃더니 펑크가 나 버렸다.

'이게 뭐니 출발부터….'

기운이 쫙 빠진 상태에서 마침 근처에 유일한 그늘을 제공하는 화물트럭들이 몰려있는 휴게소로 들어갔다. 일단 양반 자세로 느긋하게 폼을 잡았다. 몸을 바삐 움직이자니 지치기도 하고 땀의 끈적거림이 싫었기 때문이다. 바퀴를 빼고, 짐을 풀고, 자전거를 모래 위에 엎어놓은 채 공구를 가지고 수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울고 싶어도 눈물까지도 땀으로 다 나와버린다.
▲ 사막에서 펑크 수리 울고 싶어도 눈물까지도 땀으로 다 나와버린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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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전거 헤드라이트까지…

"뭐해요?"
태양을 등지고 거인처럼 다가온 아이는 부쩍 자세를 쭈그리고 낑낑대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수리."

날도 더운데 일일이 세심하게 설명할 기운도 없어 간단히 답했다. 그러고 나서 슬쩍 아이를 쳐다보니 너무 짧은 대답에 되레 계면쩍어하는 듯 보였다. '무심했구나.' 그 무안함을 풀어주기 위해 질문에도 없는 답을 더해야 했다.

"난 한국에서 왔단다. 한국 알아?"

아이는 인문대생이 공대 수학 대하듯 눈만 껌뻑인 채 도무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계속된 침묵 속에 나는 그늘 아래서 묵묵히 1시간이나 걸려 펑크를 수리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휴게소 입구에서 음료와 맥주를 파는 차량에 왔다갔다하며 옆에서 말을 걸며 구경을 했다.

아이가 있는 게 좋거나 싫지는 않았지만 간단간단한 물음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수리의 흐름이 끊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결국 녀석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실수로 자전거를 밀치는 바람에 바로 하루 전에 구입한 자전거 헤드라이트가 깨져버린 것이다.

아이쿠! 아이를 탓해서 무엇하랴. 다 그러면서 자라는 것을. 그저 내 운명이라 받아들여야지. 그렇잖아도 무안해하는 애 더 기죽이기 싫어 아무 트집잡지 않고 허탈한 마음을 있는대로 쭈그리며 조용히 휴게소를 빠져나왔다.

황량함을 더해 주는 장면.
▲ 사목(死木) 황량함을 더해 주는 장면.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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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세번에 믿었던 스페셜 튜브까지… '절대 좌절' 모드로

지루한 정적을 깨기 위해 흥얼거리는 노래는 도로와 바퀴의 마찰음 사이를 파고든다. 구름은 저만치서 내 속도에 보조를 맞춰 따라온다. 생경스런 동물체의 출현에 당황했는지 풀숲으로 도망치는 도마뱀들이 급한 걸음에 달근달근해지며 피식 웃는다. 그렇게 잔재미에 길을 헤치다 또 타이어가 흐물흐물해지더니 바람이 빠져 버렸다.

이번엔 다른쪽 튜브에서 펑크가 난 것. 할 수 없이 자전거를 검문소 쪽에 세우고 양해를 얻어 사무실 앞 그늘에서 수리를 했다.

그리고 또 출발. 하지만 모든 일은 삼세번이 완전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날 가지고 장난치려는 하늘의 뜻인지 가다가 또 펑크가 나 버렸다. 순간 허파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뽑아낸 독소들이 옅은 호흡으로 터져나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기어이 아끼고 아껴둔 마지막으로 하나뿐인 비상 튜브를 꺼내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존 튜브보다 배 정도는 두꺼운 것이라 펑크에 대해서 안전하게끔 믿음을 주는, 그야말로 스페셜 튜브였다.

이젠 오직 그것만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차선책이 없는 단 한 번의 기회라는 게 인생에 있어서도 얼마나 조마조마하던가. 이 튜브로 어떻게든 다음 큰 도시까지는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불안한 눈동자로 타이어를 바라보자니 그래도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튜브를 교체하고 나니 다른 튜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안정감으로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이제야 조금은 안정감을 가지고 달리나 싶었다. 하지만….

"아, 이거 왜 이래 또?"

오후 4시 반 경. 지금까지 써 본 것 중 최고의 안전성을 보장한 튜브였다.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들며 야심차게 추천한 그 튜브였다. 그런데도 펑크가 나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 공기 주입 부분에 말이다. 절대좌절의 경지에 들어섰다. 이 순간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감히 누구인가.

다행히 전방 500m부근에 유일한 쉼터인 레스토랑이 있어 그곳까지 펑크난 좌절을 끌고 나갔다. 청춘이란 한번쯤은 되지도 않는 일에 억지쓰고 부딪혀 깨져도 보는 것. 적어도 지금만큼은 '푸른 봄(靑春)'이 아닌 '검은 겨울' 같은 시련이다.

콜라 한 잔에 쵸코바 두 개로 진한 설탕의 맛을 음미한 뒤 수리 시작. 사막에서 해가 떨어지는 시간은 행군 중 휴식 시간만큼이나 빨리 지나간다. 수리 하고 있는 중에 해는 넘어갔다. 불과 5시가 갓 넘은 시각이다.

공기 주입 부분에 난 펑크는 전문가라 하더라도 한정된 공구에 수리가 쉽지가 않다. 30여분 간 낑낑대며 본드를 사방에다 뿌리고 패치를 두 개 둘러붙이고 겨우 막긴했지만 바람을 넣고 보니 맥없이 공기가 새 나온다.

체념했다.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중 때마침 한 견인차량이 레스토랑 주차장으로 잠시 들어온 것이 보였다. 어둠 사이에서 잠시 배설의 욕구를 풀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잽싸게 그들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고 히치하이킹을 부탁했다. 다행히 순조롭게 받아주었고, 그들의 차를 얻어타고 다음 타운까지 갈 요량이었다.

사막에 어둠이 깔리고 있다. 경이로운 장면을 보기엔 사막만한 곳이 없다.
▲ 어둠 사막에 어둠이 깔리고 있다. 경이로운 장면을 보기엔 사막만한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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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다행히 탑승자 중 조지(Gorge)라는 친구가 영어를 할 줄 알았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노동자라는 그와 그 친구는 차량을 견인하러 가는 길. 난 뒷자석에 가로로 설치된 작은 의자에 앉아 웅크린 채 동행했다.

그런데 운전하는 친구나 그나 모두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며 생수 들이키듯 맥주 캔을 비워냈다. '아차' 싶었지만 어차피 같은 운명체로 선택된 이상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랄 수 밖에.

연신 맥주를 들이키면서도 그들은 낙천적이다. 취하면 일상적으로 떠오르는 그런 주정 같은 게 없다. 속도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는지 왕복 2차선 도로에서 이차 저차 사정없이 추월한다. 살 떨리는 곡예가 따로 없다.

얼마 후 한적한 도로 가에서 견인될 차량을 찾았다. 나 역시 차량을 견인시키는 걸 도와주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랬더니 머리 위로 별무리가 흩어져 있는게 아닌가? 안경을 벗고 보아도 흐늘거리는 미리내가 분명하게 보였다. "이야!" 칠레 어딘가에 세상에서 가장 맑은 하늘이 있다는데 여기가 이 정도라면 그곳의 하늘은 도대체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울까? 별자리는 몰랐지만 그런 걸 모른대도 충분히 감탄할 만한 밤하늘이었다.

이별은 내 별, 저별은 그대의 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도 남을 만큼 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내게로 떨어질 듯 검은 꿈나라에 매달려 있었다. 목이 뻐근해지도록 90도로 눕혀 한 바퀴 뺑 돌았더니 어지럽기만 하다. 그랬더니 제 자리를 떠나 군무를 치는 별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나 멕시칸들은 이런 하늘 아래 살아서인지 그들의 누리고 있는 은하수의 매력에 나만큼이나 감격해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모두들 견인에만 정신 팔려 그들의 시선은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가슴을 펴고 하늘을 한 번 보라구! 저 봐, 저기 저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보석들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잖아.' 희읍스름한 별조차도 보기 힘든 서울 하늘. 그래서일까. 여름밤이면 으레 놀러가던 할아버지댁 뒷산 풀밭에 누워 빨려들어갈 듯 쳐다보던 어린 날의 하늘은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우리의 생각에서 밀려나는 속도보다 더 빨리 별들은 탁한 공기 속으로 묻혀져 가는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다니…

"여기서 자전거를 내려."

수리 중에 조지가 뜬금없이 말했다.

"뭐라구? 여기서 내리면 난 어디서 자라구? 여기엔 아무 것도 없잖아?"

공터엔 어무 것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달랑 다 쓰러져 가는 집 한 채가 있긴 했지만 숙소도 아닌 곳에서 무턱대고 잘 수도 없는 노릇.

"난 숙소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해."

조지는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시 산 루이스로 가야 해. 우리는 그리로 갈 테니."
"뭐? 산 루이스?"

미국 후버 댐에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와야한다? 그런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모하게 어둠 중에 텐트칠 수도 없고 더구나 앞으로 100km이상 더 사막을 달려야 하는데 미국 사막을 생각하고 너무 만만하게 보고 와서 내가 가진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그럼 산 루이스로 가지 뭐."

결국 산 루이스로 가기로 했다. 내일 다시 처음부터 출발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힘이 쭉 빠진다.

버려진 폐차. 관리를 하지 않는지 도로에 폐차들이 널려있다.
▲ 폐차 버려진 폐차. 관리를 하지 않는지 도로에 폐차들이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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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잔은 나의 잔, 이 잔은 너의 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둘러붙어 차량 견인에 힘을 쏟았다. 차량의 바퀴가 견인 수레에 고정되지 않아 생각보다 일처리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두 시간여 만에 차량을 견인하는데 성공해 출발. 하지만 이내 고리 부분에 말썽을 일으켜 얼마 못 가 또 세워야 했다. 이번에도 한 시간 여 이상을 수리한 끝에 운행이 재개 되었지만 또 이음새가 충분히 결합되지 않아 멈추기를 반복. 오늘 내게 일어난 펑크만큼이나 이 차 또한 굴곡 있어 보였다.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두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나만 빼고는 두 차의 남자 일행 모두 술에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공구질 한 번 하고 한 잔, 다시 차 밑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한 잔, 처음 만난 사이에 이리저리 수다떨다 한 잔. 서로 맥주도 품앗이 해가며 수리하는 내내 맥주캔을 비워낸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이 차가워진 만큼 마음도 급해져 나도 최선으로 차량 견인에 힘을 모았다.

결국 5시 반에 합승한 차는 한 시간 거리인 산 루이스 검문소까지 밤 11시 반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난 게 아니었다.

만나게 되는 고산. 저 멀리 내가 가야할 목적지가 숨어 있구나.
▲ 사막을 피했다 싶으면 만나게 되는 고산. 저 멀리 내가 가야할 목적지가 숨어 있구나.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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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강도 사건으로 사진이 없어 미국 사막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자전거, #문종성, #멕시코,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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