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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선생이 집에 잘 곳 없다고 호텔 잡아주겠다고 하는데요.”
“뭐라구요? 이런, 말도 안 돼요!”
 
호텔을 잡아주겠다는 건 자신의 집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말일 것이다. 난 또다시 이렇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가 하는 생각에, 원곡동 사무실에서 나를 가차없이 ‘배반한’ 숱한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렸다. '내가 제 선생님에게 들인 공이 그간 얼마나 많은데, 멀리 자신의 나라에 온 손님을 이렇게 문전박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청도에서 천진까지 열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며 분통을 터뜨렸다. '저 멀리 내 고향 제주에서부터 설악산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다 휩쓸다시피 구경을 시켜줬더니 집에서 하룻밤도 못 재운다니? 이건 정말 너무한다.'

 

난 그렇게 제 선생님에게 그간에 들인 공을 천박하게 세어가며, 차라리 천진을 지나쳐버릴까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중국에 오기만 하면 잠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입국에서부터 출국에까지 논스톱으로 대접해주겠다며 매일같이 이야기한 그의 말을 올곧이 믿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집에서 하룻밤 정도는 함께 묵을 수 있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왜 우리를 갑자기 호텔로 데리고 간다고 하느냐고 박 선생님께 물었더니, 방이 하나라서 함께 잘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더 화가 났다. 이젠 거짓말까지 하시는가? 제 선생님! 늘 산뜻한 차림에, 센터에서 여행을 갈 때면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는 분. 꽤 값이 나갈 것 같은 손목시계와 중국에서는 명품 반열에 드는 옷으로 맵시를 보이시던 분. 그가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서 중소규모의 회사 중역을 맡고 있었다고 여러 번 들었다.

 

그런 그가 방이 하나짜리 집에 살고 있다니,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우리를 따돌리려 하는 것일까? 나는 아주 오래된 친구의 집에 가려다가 그 친구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많이 언짢아졌다.

 

새벽 2시 반. 기차가 천진역에 도착했다. 원곡동에 있는 중국노동자들 중 아마 절반 이상은 천진이 고향일 것이다. 우리 센터의 식구들 태반이 천진에서 온 분들이다. 그러기에 나에겐 무척 의미 있는 도시다.

 

플랫폼 안으로 제 선생님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심술이 났지만 애써 속마음을 감추고 약간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제 선생님에게로 달려갔다. 뒤로 시원스레 벗겨진 대머리는 여전하다. 산뜻한 반바지 차림에 볼록한 배는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더 볼록해졌다. 우리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그는 시종일관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가벼운 포옹을 했다. 짧은 재회의식을 치른 후 제 선생님을 선두로 천진역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안내할지 어디로 갈지 그냥 맡겨둔 채 우리는 제 선생님을 뒤따라갔다.

 

한참을 걸은 후 우리 앞에는 아주 오래된 아파트가 나타났다. 6층 정도가 겨우 되는 아파트였다. 어두컴컴한 밤, 비닐로 덧씌운 창문이 군데군데 너덜거리며 간간이 아주 미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아파트. 매캐한 냄새가 입구에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형태. 바로 원곡동에서 아직까지 꿋꿋이 버티고 있는 마지막 철거 대상 아파트와 흡사하다. '설마 제 선생님이 사시는 곳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우리를 이런 폐가같은 곳에 재우고 혼자서 편안하게 집에 가서 자려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차 국장님. 환잉 환잉! 여기. 우리 집. 우리 집.”


전등이라곤 전혀 없는 아파트 계단. 벽을 따라 주섬주섬 올라간 후, 허리춤까지 내려온 입구의 발을 걷어내어 딸깍거리며 버튼을 눌렀다. 오른쪽 벽에 텔레비전 한 대와 원탁 테이블, 왼쪽에 침대 하나와 소파 하나.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방 한 칸! 한 칸짜리 아파트였다.

 

아파트 내부에까지 신발을 신고 들어갔다. 거실도 없고, 부엌도 따로 없다. 그냥 방 한 칸이다. 나는 정말 여기가 아파트가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은 이웃집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부엌과 세면장은 아파트 입구에 좁다란 공간을 따로 두어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 우리는 호기심을 다 채우기에는 너무 졸리고 지쳐 있었다. 제 선생님은 우리 일행을 그곳에 안내하고 다시 집을 나갔다. 우리가 온다 해서 부인과 딸이 모두 부모님 댁에서 신세를 진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 선생님의 부모님 댁은 우리가 묵은 그 아파트보다 더 열악한 집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소파의 접힌 부분을 넓게 펼쳐서 잠을 잘 공간을 확보했다. 한 명씩 차례로 부엌에서 세면을 끝냈다. 침대 위에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기차 안에서 들었던 제 선생님에 대한 섭섭함이, 갑자기 연민이 되어 내 가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깍쟁이 구두쇠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인 중국 한족. 그분들 중에서 유독 돈도 잘 쓰고, 남들에게 대접도 잘 해주며, 늘 넉넉한 모습만 보여줬던 제 선생님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피곤이 밀려왔지만 미안한 마음에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관광으로 중국을 온 것이 아니라 귀환한 중국노동자들의 가정을 방문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목적의식이 오히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을 불편하게 한 것은 아닐까? 틈만 나면 자신의 집으로 놀러 오라는 이야기가 행여 인사치레로 한 말들은 아니었을까?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왔던 것이 되려 누군가에게 큰 폐를 끼치는 것만 같아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아침이 밝았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나는 간밤에 보았던 제 선생님의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마침 제 선생님이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오고 있었다. 아침에 바라본 아파트는 밤과는 달리 그래도 제법 주택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좁다란 계단과 냄새가 조금 역한 공용화장실, 그리고 구석구석 오물로 가득 찬 아파트 뒷골목을 빼면 원곡동의 옛 주택들과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어젯밤 제 선생님께 품었던 섭섭한 마음을 사죄하는 뜻으로 서둘러 시내관광을 하기 시작했다. 천진시는 베이징에서 남동쪽으로 120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베이징, 상하이, 충칭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하나이다. 오래전부터 화북지방의 상업도시로 번창하였는데 한때 열강의 조계가 세워져 도시 곳곳에 이국적인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 제 선생님의 따님이 일하는 옷가게를 먼저 들렀다. 화핑루. 이곳은 서울의 명동과도 같은 곳이다. 예쁜 현대식 건물 사이로, 좁은 골목길에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선 명동과 달리 화핑루는 아주 넓은 대로변을 따라 오래된, 그러나 웅장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두 도시 모두 넘쳐나는 쇼핑몰과 왁자지껄한 젊은이들로 가득 찬 모습은 비슷한 것 같았다. 제 선생님의 따님이 일하는 가게는 하루 수입만 한화로 수백만 원을 벌어들인다 하니 화핑루에서 얼마나 큰 규모의 소비가 이루어지는지 짐작할 만하다.

 

 

화핑루에서 따님과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고문화가를 들렀다. 이곳은 베이징의 류리창에 견주어지는 관광명소이다. 명대 이후 천후궁의 문전거리로 번영했던 이곳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쇠락하였으나, 1980년대 청대의 거리가 복원되면서 톈진의 주요 명소로 떠올랐다고 한다. 1킬로미터가 못 되는 거리 양 옆으로는 청대의 전통 건축 양식에 따른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림과 서예, 도서, 다기 등 미술공예품을 취급하는 곳이 많고 톈진의 특산품인 진흙인형도 볼 수 있다.

 

글쎄. 각국의 문화를 서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서울의 인사동에 비해서 좀 더 ‘갖추어진’ 옛 거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사동의 경우, 곳곳에 인사동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건물들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있다. 반면에 고문화가의 경우 거리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청대의 전통 가옥들만 계획적으로 건축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사람살이를 생각해 보면 인사동이 더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제 선생님 일행과 두 번째로 간 곳은 구불리포자.(포자는 만두를 뜻한다) ‘구불리포자를 먹지 않으면 톈진에 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톈진을 대표하는 만두전문점이다.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기 전 이곳의 만두를 서태후에게 진상한 후부터 유명해졌다.

 

한 판에 일곱 개의 만두가 나오며 만두피가 두꺼운 바오쯔답게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만두 값이 얼마나 비싼지 한 판의 가격이 일반 식당이라면 우리 네 명이 실컷 배불리 먹고도 남을만한 가격이어서 우리는 입맛만 다시고 나와야 했다. 천진에 사시는 사람들도 이 식당에는 아무나 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입맛이 더 씁쓸해져서 서둘러서 식당을 나왔다.

 

일행을 데리고 한족 교회를 방문했다. 원곡동 우리 상담소에서 쌓은 공력 때문일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설교가 큰 여운으로 다가왔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이 교회를 빠져나간 후, 예배당 한쪽 모퉁이에서 피아노를 치시는 분의 모습이 너무 낯이 익어 가까이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분이 보시는 찬송가는 한국어 찬송가이다.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의 전통 선율로 된 찬송가가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얼마 전 미국에서 온 한 목사님이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차. 왜 한국은 어딜 가도 미국, 영국에서 부르는 것과 거의 똑같은 찬송을 부르죠?’

 

나는 그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건 당신들이 더 잘 알지 않나요?’ 우리를 생각하는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무책임한 그분의 질문에 대해 나는 지금도 나 스스로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복음의 기치 아래 문화적 침해행위만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만큼은 확신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동행한 일행들에게 한 마디를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쭝꿔 요우 씨왕’이란 찬송가가 제일 좋아요. 최고죠.” 쭝꿔 요우 씨왕은 ‘중국은 희망이 있다’라는 뜻의 찬송으로, 중국풍의 선율로 만들어져 있는 데다가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부추기는 진취적인 기상의 찬송가이다. 원곡동 우리 사무실에서 종종 부르는 노래다.

 
하루 종일 시장 어귀와 도심 여기저기를 누비다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저녁을 먹을 틈도 없이 유랑을 하다 다시 시내를 걸으며 제 선생님 댁으로 향하던 중 우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천진시청 앞 광장.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고 흥겨운 음악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바로 말로만 듣던 ‘야외 무도회’이다. 이색 풍물을 소개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나 봤을 것 같은 장면. 놀라운 것은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수천 명의 군중들의 대부분이 나이가 꽤 드신 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저녁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무도회에 빠져들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도회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춤 솜씨가 가히 하루 이틀의 연습으로는 나올 법한 실력이 아니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벤치를 객석 삼아 쉴 새 없이 박수를 치며 허리를 살짝살짝 흔들어주는 것으로 춤바람을 참아내야만 했다. 나는 이 장면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수천 명의 군중이 갑자기 나를 쳐다본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무도회가 신기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나 보다. 어둠을 일거에 깨버린 카메라 플래시에 연신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린 후 내친김에 몇 장을 더 찍었다.

 

춤꾼 몇이서 내게로 다가온다. 나는 큰일났다 싶었다. 카메라를 뺏기는 건 아닌지 겁이 났다. 이윽고 그들 일행이 다가오더니 외국인 관광객이냐 물었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사진만 찍지 말고 함께 즐겁게 어울리다가 가라고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리의 끄트머리에 합류해서 아까보다 조금 더 신나게 허리를 흔들었다.

 

 

여기가 서울이라면. 서울 시청 앞에서 과연 이럴 수 있었을까? 그들이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바로 이것. '노인들이 도시의 노른자위, 시청 앞 광장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몰아내고, 도시를 차지한 노인들은 7월의 끝자락. 한여름밤의 무더위와 함께 그렇게 신나게 문명을 즐기고 있었다. 종묘 앞 벤치 위에서 시간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무수한 어르신을 떠올리며, 그 순간만큼은 중국이 한없이 부러웠다.

 

무도회가 다 끝나기까지는 대여섯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무도회가 끝나고 악단들이 악기를 정리할 때까지 무도회를 즐겼다. 매미고기에 이어 두 번째로 크게 받은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까? 바쁘게 사는 것만이 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가 빠르게 간다고 해서 시간이 더디게 가주는 것은 아니잖아.

 

제 선생님 아파트에 다다랐다. 헤어지는 제 선생님을 뒤로 하기 전 한 마디를 건넸다. “제선생님. 저희들 내일 하루 더 묵을래요! 미안~” 우리는 전원 만장일치로 하루를 더 묵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채 시청 앞 광장으로 달려갔다. 무도회가 시작하기 전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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