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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사회로부터 낙오하지는 않을까. 험한 세파를 헤쳐 가는 요령과 기능을 상실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참 이중적인 태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주류들이 득실대는 세상이 싫고, 세상살이에 요령과 처세술이 전부가 되는 것이 싫어서 시도하는 대안교육인데 말입니다.

자기가 결정 한 것이라야 그걸 지키고 책임진다

제가 대안학교에서 만난 학부모들이 대부분 저희와 같았습니다. 이력과 직업도 틀렸지만 엇비슷한 데가 많았습니다. 시민사회운동 하는 분들이 제일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형태로건 개인의 삶을 공동체적 삶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심하고 실천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런 점이 묘하게도 학부모 집단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기재가 됨과 아울러 갈등과 긴장의 요소가 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큰 애가 실상사 작은학교를 갈 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중학교과정이 의무교육으로 되는 해였는데 담임까지도 나서서 제게 “문제아도 아니고 공부도 잘하는데 왜 대안학교를 보내냐”고 할 정도로 대안학교에 대한 이해가 낮았습니다.

저는 이미 9년 전에 무주에 있는 ‘푸른꿈고등학교’가 개교준비 할 때부터 참여하여 학교 건물 개조하는 일에 자원봉사를 가기도 했었기에 주변에서 걱정하면서 불안 해 해도 전혀 흔들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대안교육을 설명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중학교는 그렇다 치고 인가도 안 난 학교 다니다가 고등학교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맥이 탁 풀리지요. 대답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더란 말입니다. 집안 어른들도 다 그런 질문을 합니다.

“저는 그런 것에 관심 안 둔다”고 했다가는 더 이상 대화 자체가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고등학교 갈 계획이 구체적으로 서 있는 것도 아니니 구구절절 절차적 설명을 하는 것도 상대 걱정의 핵심을 풀어주는 것도 아닌 게 되더란 말입니다.

고심 끝에 하게 된 가장 솔직한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중학교는 고등학교 가기 위해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우리 아이가 좋은 분위기에서 공부하고, 친구랑 잘 어울리면서 생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학교를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일 뿐이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어때요? 명답이죠?

중학교는 고등학교 가기 위해 가는 곳일까? 그럼 고등학교는?

실제 그렇다고 봅니다. 앞날을 요모조모 따지고 고르느라고 그것 때문에 현재의 삶을 강제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것이지요. 오늘 주어진 삶에 열심이고 만족한다면 그 연속선상에서 자연스레 내일은 바람직한 모습으로 닥아 올 뿐이지 않을까 합니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도 그렇지요. 대학가기 위해 고등학교를 골라야 된다면 그 고등학교생활이 뭐가 되겠어요. 그럼 대학은요?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대학 고르는 기준이라면, 또는 그냥 막연히 사회진출이 용이하고 사회에서 알아주는 대학을 고르는 게 기준이라면 그 대학생활은 뭐가 되겠어요.

그다음에 사회에 나가서는 어떻게 됩니까? 좋은 직장은 왜 다니는데요? 사회가 알아주면 뭐가 어떤데요? 그런 태도는 근본이 빠진 삶이라는 것이지요. 제 말은. 판검사 되기 위해 공부한다?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 간다? 다 마찬가지겠지요.

실상사에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두 번인가 함께 간 적이 있습니다. ‘녹색평론 전북독자모임’에서 1박2일 일정으로 천연염색과 생활나누기 행사를 했을 때와 부처님 오신날 행사 때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학교가 개교하기 전부터 학교 소식지도 후원금을 내고 받아보고 있었기에 아이에게도 실상사와 실상사작은학교는 익숙해 있었고 부모와 집을 떠나야 하지만 그 학교 가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안학교는 거의 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을 학교에서 합니다.

제가 이 강의를 준비 하면서 집을 떠나 있는 두 아이에게 전자우편으로 설문조사를 한 게 있습니다. 대안학교로 갈 때 당황하거나 망설여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둘 다 일반학교 갈 생각이 없었다고 답변을 했더군요. 그러리라 여겼지만 확인 된 셈입니다.

왜 대안학교 갈 생각을 했냐고 하니까 작은 아이는 모든 학생들이 같은 책을 펴 놓고 같은 내용을 같이 배운다는 게 끔찍한 일 아니냐면서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학교 분위기가 자유롭고 뭔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다고 했습니다.

큰 아이는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 외에는 망설여지는 게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부모와 헤어져 살아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는 대답이 있기를 바랐는데 아니더라고요. 하하 속으로 좀 섭섭했죠 뭐. 이제 갓 열 네 살 되는 어린 애를 어떻게 떼어 놓고 사느냐는 부모들이 있습니다만 그건 부모 생각이고 자식은 안 그런 게 확실합니다. 부모 곁에 있어봤자 잔소리만 듣고 말과 행동이 다른 부모 모습 보고 사는 것도 괴롭고, 엄마랑 아빠랑 택도 없는 것 가지고 티격태격 하는 것 보기 민망하고 뭐 그렇다고 하더군요.

부모가 더 큰 문제

제가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상담하면서 조사 했던 내용입니다. 부모 곁에 있는 게 제일 불편하다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열 네 살이면 부모 없이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것이 더 좋은 나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제도권 일반학교가 워낙 불안하고 문제가 많다고 여긴 나머지 대안학교에 보내면 아이가 잘 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만 아이를 보낸 경우에는 아이나 부모가 갈등을 빚는 경우를 봤습니다. 새로운 학교 풍토 속에서 쉽게 적응하면서 변화해 가는 아이와, 그에 비해 부모는 전혀 대안적 삶과는 무관하게 관성적인 삶을 그대로 유지할 때 빚는 갈등입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교육의 장은 어른들의 말과 생활이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훈이 되는 좋은 말을 들으면서 그렇게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흉내 내면서 세상을 익히고 자라는 것입니다.

학교와 집에서 접하는 생활문화적 격차가 클 경우 아이가 혼란을 겪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안학교의 학부모 되기는 자기 삶에 대한 재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구요. 저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널리 알려져 있는바와 같이 제도권 학교와는 사뭇 다릅니다. 교과목 중심으로 먼저 살펴보자면 국·영·수로 대표되는 지식교과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습니다. 농사공부와 더불어 식·의·주 중심의 생활공부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특히 예능교육이나 기획수업이 중요시 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얼마나 좋은 것을 배우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그것을 결정하느냐에 있습니다. 정식학교로 인가가 난 풀무학교나 한빛학교마저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의사결정의 중요한 주체로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실상사 작은학교와 마리학교는 ‘식구총회’라는 단위가 있어서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 3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최고의사결정기구 노릇을 합니다. 일반학교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입니다.

모든 결정사항은 자신의 의사가 반영된 정도만큼만 존중받는 법입니다. 이런 점이 대안학교의 큰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 해 보면 실제 상황이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방송통신대 대안교육연수 온라인 티브이 강의 교안이며 <민들레>9월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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