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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배 작가는 일반 직장인처럼 오전 9시에 집필을 시작하여 오후 5시에 끝내며 중간중간 한 시간에 10분씩 쉰다고 했다. 여간 부러운 생활습성이 아니다. 내 경우는 처음부터 버릇이 잘못 들었다. 낮에 근무한 다음 집필을 하다보니 야행성이요, 소나기성이다. 퇴직한 다음 고치려 하지만 한 번 잘못 든 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올 여름에 나올 신간준비로 며칠 바빴다. 신체부위 가운데 가장 혹사한 곳은 아무래도 눈과 어깨 팔목 부분인가 보다. 막 원고 마무리를 끝내자 갑자기 팔목이 몹시 아팠다. 그러면서 그제야 뻐꾸기와 장끼의 노랫소리가 장대비소리처럼 요란히 들려왔다. 이제까지는 주로 어깨가 아팠는데 이제는 통증도 신체 각 부분으로 옮겨 다니나 보다.
좀 쉬라는 신호로 알고 컴퓨터를 끄고는 산책길에 나섰다. 주천강 둑길로 가는데 마침 동네사람들이 양배추 모종을 밭에 내고 있었다. 앞집 노씨가 인사를 하면서 사진이나 좀 박아달라고 부탁했다. 농사꾼들이 모종을 내는 광경이 더 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곧장 발길을 집으로 돌려 카메라를 메고 다시 양배추 모종내는 밭으로 갔다. 전 안흥4리 정희영 이장님 밭으로, 올해는 고심 끝에 계약재배로 양배추를 심는다고 했다. 계약재배는 큰 이익은 없지만 안정성은 있다고 한다. 요즘 농사꾼들은 해마다 뭘 심어야 할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칫 작물 선택을 잘못하면 출하도 못하고 그대로 갈아엎기 일쑤다.
"농사꾼이 심을 작물 하나 통제치 못하는 정치가 그게 정치냐"고, 농사꾼들이 정부를 믿고 시키는 대로 농사지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바랄 것도 없는데, 그 전에는 농사꾼들이 많아 농촌을 우대하더니, 이제는 표가 적어지자 들은 척도 않는다고 품앗이하는 노씨도, 밭주인 정씨도, 한 마디씩 했다.
올 봄은 일기가 순조롭고 비가 알맞게 자주 내린 덕분에 우리 동네 특산물 고랭지 배추농사는 아주 잘 됐다. 하지만 우리 집 앞 1700평 밭에 고랭지배추를 심은 노씨는 풍년이 반갑지 않은 기색이다. 값이 폭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래 머물면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몇 장면을 찍고 능선을 넘자 아랫마을 박용성 박경원씨 부자가 옥수수밭에서 옥수수모종에 흙을 덮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부자상이었다. 내가 밀레라면 이 장면을 캔버스에 담았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부자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인이 되고 싶다. 갑자기 박용성씨가 부러웠다.
잘난 의원, 자치단체장 자식 두면 뭘 하나. 백성들 고혈로 해외연수 가서 딴전이나 하고 와 백성들의 빈축을 사는 그 잘난 자식 둔 걸 부러워할 필요 없지 않은가. 곁에서 부모 봉양하고 흙을 뒤집으면서 바르게 사는 자식이 얼마나 대견한, 하늘에 자랑스러운 자식 아닌가?
조금 더 내려가자 브로컬리 밭에서 가지치기를 한다고 농사꾼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잠시 쉬는 시간인 줄도 모르고 팔자 좋게 카메라 들고 어슬렁거린다고 욕할 것 같아 내 집으로 후딱 돌아와 나도 텃밭의 풀을 뽑았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산마을이다. 뻐꾸기는 가는 봄의 춘정을 아직 풀지 못했는지 뒷산 숲에서 짝을 찾는 세레나데를 줄기차게 부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박도 기자의 안흥 산골이야기가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지식산업사)>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바보새출판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