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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장터의 초입. 잘 엮인 굴비가 손님들을 가장 먼저 맞고 있었다.
ⓒ 서부원

최근 들어 대형 마트에 밀려 신음하는 재래시장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불과 인구 십여 만 명의 중소 도시에도 이름만 대면 다 알 법한 대기업의 할인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영업을 하고 있으니, 도시 속 재래시장의 경우 자취를 감춘 곳도 적지 않습니다.

동네 구멍가게는 24시간 밝은 조명을 켠 채 깔끔하게 단장한 수퍼마켓의 등장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웬만한 동네마다 하나쯤 있었던 수퍼마켓은 지방의 대형 유통업체 탓에 문닫을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랬던 지방의 유통업체도 이제는 대기업의 할인점 등쌀에 이미 인수됐거나, 부도 위기에 처해 있으니 흡사 생태계의 먹이사슬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도시인들의 일과 중 마트로 쇼핑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돼버린 지금, 그래도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사는 풋풋한 정이 넘치는 여전한 재래시장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언제 자리잡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5일장'이 그것입니다.

도시도 시장이 넓어진 것 뿐입니다

본디 읍내라고 불리는 곳, 나아가 도시조차도 시장이 서고 난 후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도시도 따지고 보면 시장이 넓혀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왁자지껄한 시장이 선 곳이 곧 그 고장의 지리적인 중심이고, 민심을 읽어낼 수 있는 통로이며, 다양한 정보들이 오가는 창구입니다.

지금도 시골 장터는 도시의 것을 흉내 낸 '짝퉁' 마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고장의 독특한 지방색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알짜배기 보물입니다.

시골 장터를 찾아가는 일은 다양한 볼거리를 위한 것도, 필요한 물건을 싸게 사려는 것도 아닌, 그 고장의 속살 그대로의 맛과 멋을 느끼려는 여행이자 공부입니다.

▲ 누가 상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언뜻 봐서는 알 수 없다. 시골 장터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 서부원
시골 장터는 번듯한 가게는커녕 진열대조차 갖추지 못한 '좌판'이 대부분이며, 판매하는 물건을 종류별로 나눠놓지도 않습니다. 생닭 파는 집 옆에서 옷을 팔고, 코를 톡 쏘는 홍어를 곁에 두고 수수비와 대바구니를 팔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어떤 물건을 다루고 있느냐 보다는 누가 먼저와 좋은 '목'을 차지하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한 겁니다.

요즘 같은 날에는 따가운 햇볕을 가릴 양으로 검정 비닐과 파라솔 등으로 가림막을 치는데, 보통 키의 남자조차 허리를 굽혀야 다닐 만큼 낮고 엉성하지만 그렇게 큰 불편함은 느끼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끈을 부여잡고 힘겹게 나뭇가지 등에 묶었을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외려 측은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장터 초입에 잘 엮어진 굴비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고, 좁은 통로 양 옆으로 곡류, 생선, 의류, 생활 소품, 심지어 각종 씨앗과 병아리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 없는' 만물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없을 뿐, 말 뜻 그대로 '백화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주인이 없네? 스피커와 흥정하지, 뭐

▲ 스피커와 흥정하고 있는 손님의 모습.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바로 옆자리 주인이 대신하곤 한다.
ⓒ 서부원
다니다 보면 누가 파는 사람이고, 누가 사는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아예 자기가 장터에 가지고 나온 물건을 팔아 그 돈으로 바로 곁 좌판에 가서 손님이 되어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아직도 쌀을 사러 가면서 '쌀 팔러 간다'고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건은 수북이 쌓여있는데 주인이 한동안 자리를 비운 곳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파는 물건을 소개하고 가격을 알려주는 소리는 녹음기의 스피커를 통해 연신 흘러나옵니다. 손님들이 주인을 대신해서 스피커와 흥정(?)하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퍽 재미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손님이 물건을 꺼내들며 '없는' 주인을 찾습니다. 이내 바로 옆에서 수산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헐레벌떡 고무장갑을 벗으며 뛰어와 물건 값을 건네받습니다. 이렇게 주인이 자리를 비울 때 옆자리에서 대신 팔아주는 모습은 여느 도시의 상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풋풋함입니다.

흥정은 주로 그 고장의 사투리에 실려야 제격입니다. 오가는 말 속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되면 흥정은 딱딱한 사무적인 대화가 되기 십상입니다. 적어도 시골 장터에서는 바로 '이물 없게' 쓸 수 있는 사투리가 곧 공용어입니다.

그러다 보니 곡류의 원산지 표시를 위해 (말이 아닌) 글자로 적은 팻말에서조차 사투리가 마치 표준말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소리내어 웃었지만 그 곳의 상인들은 왜 웃는지를 알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이 곳에서는 사투리가 흥정의 '표준'

▲ 장터의 공용어는 그 고장의 사투리다. 이 때문에 '기장'이 '지장'이 되기도 한다.
ⓒ 서부원
물건을 사든 안 사든 장터를 돌아다니다보면 도시의 마트에서는 보기 힘든 기발하다 싶은 물건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옷을 파는 곳이라면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패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시골 장터에서 '1차 검증'을 받아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화투와 화폐, 수표 문양을 '뻔뻔스럽게' 넣은 속옷도 그렇고, 좌판 위에 대충 접어 아무렇게나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렸을 원피스들을 마네킹에 입힌 채 늘씬한 여성들이 패션쇼 하듯 보이도록 한 것도 기발합니다. 비록 화려한 조명 아래 명품 라벨 붙이고 귀부인들을 기다리는 값비싼 것들은 아닐지라도 구매욕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기실 외래어 '마트'가 우리말 '장터'를 대체하고 압도하는 시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양한 상품들에다 품질 좋고, 가격 싸고, 편리하고, 깨끗해서 사람들의 소비 심리 상 시골 장터가 계속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촌로들이 사라지면 따라서 시골 장터는 소멸된다고 '거칠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거친 숨 몰아쉬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시골 장터에는 효율성과 경쟁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기성세대의 아련한 옛 추억 때문이든, 바삐 돌아가는 팍팍한 세상에 여전히 때 묻지 않은 풋풋함 때문이든 장터는 우리들 마음 속에 쉬이 지워질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 고장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원초적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 품질이야 어떻든 종종 '기발한' 물건들을 만나게 된다. '튀는' 문양의 남자 속옷.
ⓒ 서부원

덧붙이는 글 | 장이 선 5월 7일, 관방제 숲을 따라 늘어선 전남 담양 5일장을 찾았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재래시장, #담양, #5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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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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