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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버지란 이도 저도 아닌 개흘레꾼에 불과했다."

10년 전 요절한 작가 김소진은 소설 <개흘레꾼>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런 김소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게 아버지란 이도 저도 아닌 '개잡이'에 불과했다. 그 사연을 풀어본다.

나는 20살이 넘을 때까지 청계산 중턱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꽃피는 봄이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러 올 정도로 우리 집은 예뻤다. 그러나 그 집에 살던 아버지와 내 삶은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도 저도 아닌 '개잡이'였다

▲ 김소진의 <자전거 도둑> 표지.
ⓒ 문학동네
원래 우리집은 식구가 여섯이었다. 엄마는 물론이고 두 명의 누나와 형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했다.

그리고 누나와 형을 데리고 도시로 떠났다. 막내인 나만 아버지 곁에 남았는데, 서른이 넘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아버지의 취미는 도박이었고, 특기는 술 마시기였다. 그리고 여자 사귀기에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셨다. 도박, 술, 여자를 좋아하셨으니, 외박은 취미나 특기를 훌쩍 뛰어넘어 거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타짜'가 되지 못해 늘 도박판에서 생활비를 탕진했고, 술고래 경지에도 이르지 못해 언제나 술자리에서 실수를 연발했다. 또 '카사노바'의 내공을 쌓는 데도 실패한 나머지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했지만, 비공식으로 여러 여자를 만나는 바람에 법적으로 두 번 이혼했다. 결국 아버지의 뜻과는 무관하게, 끝까지 아버지 곁을 지킨 사람은 여자가 아닌 바로 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가난했고, 외로웠으며, 쓸쓸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나도 그랬다. 아버지는 내게 좌절의 상징, 눈물의 결정체, 외로움의 대명사다. 그러나 이런 아버지에게도 거장의 반열에 올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눈부신 능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개 잡는 기술이었다.

청계산 중턱에 있던 우리 집은 보신탕을 파는 식당이었다. 상호는 <오작교>. 오작교는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를 위해 칠석날 까치와 까마귀가 몸을 잇대어 은하수에 놓은 전설의 다리다. 이런 아름다운 전설을 품고 있는 다리를 상호로 내건 그 <오작교>에서 수많은 개들은 죽고 또 죽었다.

우리 집은 정체 불명의 개들이 탕으로 변해 식탁에 올라오는 여느 보신탕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 집은 많은 개를 키웠고, 손님들은 자신이 원하는 개를 직접 골랐다. 그러면 아버지는 손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능수능란하게 개를 잡았고 보신탕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보신탕을 맛본 손님들은 대개 우리집을 다시 찾는 단골이 됐다.

우리 집이 보신탕만 했던 건 아니다. 차림표에는 토종닭으로 만든 백숙과 오리탕도 있었다. 토종닭과 오리 역시 손님들이 직접 고르는 시스템이었다. 아버지에게 개보다 덩치가 작은 이 녀석들을 처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수많은 동물들을 '학살'했다. 학살된 동물의 배를 가르고 내장과 살을 분리해 낼 때마다 아버지의 손은 붉은 피로 번들거렸다. 그때 아버지의 칼놀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눈부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표정은 어떤 의식을 치르듯 비장하고 진지했다.

손님들은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며 "대단하네"를 연발했다. 종종 "징그럽다"며 고개를 돌리는 손님도 있었지만, 이들도 아버지에게 학살된 동물이 음식으로 변해 식탁에 올라오면 "맛있네"라는 탄성을 터뜨렸다.

닭의 목을 치지 못한 내 좌절

아버지의 동물 학살은 <오작교>에서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마을에 잔치가 있어 돼지를 잡아야 할 때도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었고, 누구네 집 송아지가 죽었을 때 뼈와 살을 발라야 일 역시 아버지의 임무였다. 청계산 윗동네 마을의 사람들은 아버지의 손을 거쳐야만 신선한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마을 일을 마치면 고기 한 덩어리를 들고 흐뭇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분명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술과 도박으로 문제가 생길 때면, 마을 사람에게 "어쩔 수 없는 백정"이라는 말을 듣는 치욕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린 내게도 아픈 상처였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까.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던 1996년 9월까지 개의 배를 가르고, 닭과 오리를 학살하는 일을 하셨다.

2003년 여름 어느 날 저녁에 있던 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노가다'를 하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아저씨 한 분이 요리해 먹자며 살아있는 닭 두 마리를 가져왔다. 내 가족사를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많이 봤으니까 잘 하겠지"라며 내게 칼과 닭을 건냈다.

사람들의 말처럼 보고 자란 게 있으니 닭을 수월하게 처리할 거라 나는 믿었다. 나는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으로 닭을 고정했다. 칼을 닭의 목에 갖다 댔다. 그렇게 내리치면 끝이다. 아주 잠깐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손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떨렸다. 그렇게 닭의 목에 칼을 대었다 떼기를 몇 번. 결국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좌절했다. 나는 한 번도 내 손에 동물의 피를 묻혀본 적이 없다. 여자 친구와 음악을 들으며 스테이크는 썰어봤다. 하지만 맥박이 뛰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동물의 맥을 끊어보지도, 그 순간 동물이 터뜨리는 처절한 울부짖음도 직접 느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처럼 누군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뜨거운 고기를 대접해 본 적이 없다.

기자가 된 나는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종종 생각한다. 동물의 붉은 피로 번들거리던 아버지의 손과 때로는 "백정"이라는 비아냥을 감내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김소진에게 배운 긍정의 힘

▲ 소설가 고 김소진.
ⓒ 연합뉴스
사실 나는 아버지의 삶을 쉽게 긍정하지 못했다. 우리의 근대 이후 역사에서 '아버지'는 종종 권력과 억압의 상징으로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권력이나 억압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가 부담스러웠다.

살아계신 아버지의 존재는 내 콤플렉스였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그늘에서 나는 자주 도망가고 싶었다. 비루함이 가득하고 나약함이 차고 넘쳤던 아버지의 삶을 똑바로 응시하는 건 내게 무척 고통스런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품위를 지켜가며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봤다. 문득 아버지도 참 많이 힘들었을 것이란 다소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2001년 9월 김소진의 소설 <자전거 도둑>을 읽었다. 그날 밤 나는 소리내 펑펑 울었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고 "그때 나는 그런 끔찍한 다짐을 했는지도 모른다"던 김소진의 소설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김소진의 아버지는 6·25때 북한 원산에서 가정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홀로 월남해 남한에서 새로 결혼했고 강원도 철원에서 김소진을 낳았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김소진의 아버지는 달동네에서 개들을 접붙이는 '개흘레꾼'이었다.

김소진의 소설에는 그런 비루했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김소진이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식은 원망이나 배제가 아니다. 반대로 신산하고 주변부적인 삶에 깊은 애정을 표시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긍정한다.

지금 내가 '개잡이' 아버지의 삶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면, 소수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약간이라도 있다면, 그건 김소진의 영향이 크다. 어쨌든 나는 지금 아버지의 피에 젖은 손을 긍정하고 있다.

내게 긍정의 힘을 줬던 김소진은 1997년 4월 22일 암으로 사망했다. 오늘은 그의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보잘 것 없는 이 글을 그에게 헌사하고 싶다.

소설가 김소진은 누구?

1963년 12월 3일 강원도 철원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82년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1990년부터 <한겨레신문> 교열부와 문화부에서 5년 동안 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95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소설가 생활을 시작했다. 1997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같은 해 타계했다.

1991년 가난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배경으로 한 <쥐잡기>가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가입해 활동했고 1993년 단편들을 묶은 첫 창작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발표했다. 34세로 짧은 생애를 마치기까지 약 6년 동안 장편과 단편소설, 동화, 콩트 등 여덟 권의 책을 썼다. 1996년 문화의 날에 제4회 젊은예술가상을 수상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설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장석조네 사람들>(1995), <자전거 도둑>(1996), 창작 동화 <열한 살의 푸른 바다>(1996)가 있다.

최근 김소진 10주기(22일)를 맞아 추모 문집 <소진의 기억>이 나왔다. 이 문집에는 시인 김정환·김기택과 소설가 성석제·천운영 등의 글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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