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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미술100년(2부) '전통·인간·예술·현실전' 홍보포스터
ⓒ 김형순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100년 1부'에 이어 한국전쟁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우리미술을 한꺼번에 조망해볼 수 있다. 한국미술 근현대사를 이렇게 집약하여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보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관전 포인트다. 어려운 걸음이겠지만 방학 중이니 가족들과 함께 하면 생생한 현장학습이 될 것 같다.

이번 특별전은 전후 '모더니즘과 실존적 모색(1957~1966)', '실험미술과 단색조미술, 현대미술의 진로(1967~1979)', '80년대 민주화과정, 그 인식과 실천 과제(1980~1987)', '다양성 시대, 대안성 넘치는 정체성(1988~현재)' 등으로 시기를 구분했고, 그 시대별 미술사적 특징을 '전통·인간·예술·현실'이라는 큰 주제를 묶어 감상하게 하고 있다.

박생광의 오방색, 황영성의 향토색

▲ 박생광 '전봉준' 화선지에 먹 채색 360×510cm 1985. 붉은 악마의 깃발은 여기에도 있다
ⓒ 김형순
이번 전시회의 가장 큰 물음은 정체성과 관련된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주체성을 어떻게 정립하느냐도 과제다. 이에 대한 영감과 힌트를 주는 작품은 역시 제1전시실 중앙에 걸린 박생광의 '전봉준'이다.

루브르미술관하면 '모나리자'가 떠오르듯 국립현대미술관하면 '전봉준'이 떠오른다. 박생광이 죽기 직전 심혈을 기울인 대작이다. 그가 민중미술에게 진 빚을 이 작품으로 다 갚은 셈이다. 한국미술이 뭐냐고 물을 때 바로 내 놓을 수 있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무속풍의 이 강력한 오방색 그림 속엔 붉은 악마의 거리응원도 이미 담겨져 있다.

▲ 황영성 '소시장이야기' 194×258cm 1981. 현대적 색감과 대비된 구성이 상승효과를 준다
ⓒ 김형순
이 그림 바로 옆 황영성의 '소시장이야기(1981)'를 보는 순간에도 또다시 그림에 빨려들게 된다. 이런 그림도 가능하구나 싶다. 그만의 독특한 구성과 색채의 대비를 통해 신비한 상응과 변주를 일구어낸다. 그는 주로 광주지역에서 활동하기에 서울이나 뉴욕, 파리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음에도 세계화단에 주목을 받고 있다.

가축 중에는 특히 소가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소는 가축이 아니라 가족이나 사람과 동급이다. 이런 자연과 인간의 친화성은 인류의 보편주의와 연결되면서 색다른 감동을 준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필립 다장은 "그는 시류에 동조하지도 않고 토착적 전통을 고수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뿐"이라고 평했다. 한편 평론가 이일은 그를 한마디로 '향토색 짙은 우화의 세계'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가지런하고 질서정연하다기보다는 옹기종기 놓은 듯 다소곳하고 평화롭다.

무명에 가까운 이림의 재발견

▲ 이림 '4·19' 1960. 혁명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 같다. 아래 이만익 '청계천' 73×60cm 천, 콜라주 1964 당시로는 획기적 소재이다.
ⓒ 김형순
이림의 '4·19(1960)'는 처음 보는 작품이다. 이렇게 멋진 작품이 있었다니 정말 놀랍다.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정말 혁명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다. 궁핍과 일상의 고단함에도 순수한 열정을 쏟아 부은 4월 혁명이 한 작가의 눈에게 이렇게 그려졌나 보다. 이번 전시회를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이만익이 프랑스유학 이전에 그린 '청계천(1964)'은 그의 대표작 '주몽의 꿈'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그림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의 재능은 번뜩인다. 물감도 캔버스도 구하기 힘든 대학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이런 청계천 모습에 끌렸나보다. 당시로는 이런 풍경을 그렸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이다.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

▲ 백남준 '하이웨이 해커' TV 3대 LD LDP 각종오브제 1994. 최의순 '수난자의 머리' 1967. 30년 사이에 한국인의 표정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 김형순
백남준의 '하이웨이 해커(1994)'. 이 전자인간은 엉뚱하게도 우리네 뒷골목 개구쟁이 얼굴을 닮았다. 이런 웃음 뒤엔 우리 민족의 고통과 애환이 숨겨져 있다. 그러니까 백남준은 얼굴을 거꾸로 그린 것이다.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 우는 전통탈의 정신을 서양의 첨단소재에 담아 세계인에게 천연덕스럽게 선보인 셈이다.

반면 우리에겐 낯선 작가인 최의순의 '수난자의 머리(1967)'를 보면서 저건 바로 우리 얼굴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우리 얼굴이 저 정도일까 의구심이 들긴 해도 분명 숨길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게다가 식민의 유산을 떠안고 분단의 고통을 참아내며 개발독재시대에 만연한 부정부패, 지역감정과 끼리끼리 파벌주의, 끊이지 않는 시위와 노사분쟁, 현안에 대한 첨예한 대립과 갈등 그런 우리 근대사의 아픈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찡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 최호철 '을지로 순환선' 종이에 혼합매체 2000. 홍성담 '5·18연작' 목판 1983. 젊은 관객의 그림 보는 모습도 흥미롭다
ⓒ 김형순
젊은 작가 최호철은 '을지로 순환선(2000)'에서 또 다른 우리의 이면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을 모델로 한 것 같은 이 작품은 버스 속 우리 모습도 연상시킨다. 운전기사 월급이 적어서 그런지 시민들이 이를 제어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도 우리는 난폭운전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풍경은 지하철에서도 반복되고 재연된다. 안전 불감증으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은 늘 뒷전이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우리의 얼굴인, 마치 역사의 난폭운전 같은 5월광주의 상흔이 떠올라 오버랩 된다. 이런 모습을 잡아낸 최호철의 안목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능청맞기도 하다. 웃음을 자아내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여성 수난 속 역량 최대 발휘

▲ 윤석남 '어머니2 딸과 아들' 나무에 복사 사진 설치작품 500×230×220cm 1993. 배경으로 쓰인 바랜 가족사진이 효과적이다
ⓒ 김형순
다음은 여성주의 작가로 유명한 윤석남의 '어머니2'를 보자. 여성수난의 질곡에서 잠시도 비켜서기 힘들었던 한국 여성의 기구함을 판자 위에 여과 없이 옮겨놓았다. 영문학도였던 그녀는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단군 이래 수천 년 간 부엌데기로 살아왔고 찬밥신세였던 여자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조명해왔다.

여자가 하는 일을 흔히 '살림'이라고 한다. 그럼 살림이란 뭔가? 그건 살리는 일, 밥을 지어 병든 시부모님을 살리고 직장과 학교에서 반 죽어 돌아온 남편과 자식을 살리는 일, 여성은 이렇게 생명운동의 전위적 실천가들이었다. 윤석남은 바로 그런 그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여 제 위치로 복원시킨다.

▲ 이윰 '매란국죽' 라이트박스 위에 와이드컬러필름 300×120cm 1998. 이 작품은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잃어버린 동양의 정신적 가치 회복을 상징한다. 아래 정원철 '증언' 리놀륨판 1999. 60년간 한국여성의 변화를 한눈에 읽는 것 같다
ⓒ 김형순
그러나 2000년대 여성작가 이윰은 이와는 반대다. '매난국죽'이라는 동양의 전통양식과 고결한 정신을 상징하는 기호를 세계화단에 내놓을 정도로 그렇게 당당하고 떳떳하다. 아래 40년대 일본강점기 최고 피해자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던 정신대할머니들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륨에게 한국인으로 또는 동양인으로의 정체성 혼란은 전혀 없어 보인다. 자신감이 넘친다. 남성의 폭력, 사고파는 섹스, 시대의 우상인 황금의 지배 속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질서를 새롭게 확립하려 한다. 텍스트뿐만 아니라 필름,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 등 다매체, 다형태로 자신의 브랜드화도 마다않으며 종횡무진 질주한다.

이불의 '히드라' 그 자체가 경이로움

또 이전 전시회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중앙홀 이불의 '히드라(1998)'가 한 눈에 들어온다.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비닐 위에 사진을 인화한 것이나, 공기펌프로 작품을 세우는 일이나 일체의 발상도 놀랍다. 한국미술의 대승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국내에서 교육을 받았다니 더욱 고무적이다.

▲ 이불 '히드라(모뉴먼트)' 비닐 위에 사진인화, 공기펌프 600×450cm 1998. 이번 전시회의 백미. 이만익 '흥부가(박타는 장면)' 1979. 과천미술관 자료 제공
ⓒ 김형순
그녀 몸에서는 전통을 현대로 해석할 줄 알고 창조적으로 도약시킬 수 있는 위력이 배어나오고, 남성적 범주와는 다른 여성만의 특이한 힘과 에너지가 마구 쏟아져 나온다. 한국미술은 이제 그녀를 시발점으로 새 희망과 가능성을 열 것이다. 그녀의 붉은색 계통은 이만익의 '흥부가(1979)'를 많이 닮았다.

이번 전시회에 전시된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 김창렬, 이우환, 서세욱, 권진규, 변종하, 김종학, 김흥수, 임옥상, 오윤 그리고 일체의 인위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한 무의 세계를 그려 최근 가장 각광 받고 있는 박서보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지면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를 계속 묻게 하는 이번 전시회는 그런 면에서 하나의 거울이 되었고, 우리는 그 속에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하는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다만 이번 전시회의 아쉬운 점은 아이들을 배려하는 자료나 접근하기 쉬운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아무리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는다고 해도 세련되고 현대적 감각을 지닌 구상계열의 여성작가 작품들이 빠진 것이 못내 아쉽다.

덧붙이는 글 | 홈페이지: www.moca.go.kr 전시장소: 제1,2,7전시실 및 중앙홀 
전화:02-2188-6000 팩스:02-2188-6122 입장료 3000원 중고생 1500원
관람시간: 화, 수, 목 10시~18시 금, 토, 일, 공휴일 10시~19시
작품설명회: 매주 금, 토, 일, 공휴일 오후3시에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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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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