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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고정미

하인스 워드의 방한 이후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혼혈인들에 대한 한국민들의 관심이 한껏 높아졌다. 하인스 워드가 미식축구경기 이후 태극기를 휘날린 것도 아니었지만, 외국 무대에서 한민족의 후손이 명성을 높인다는 이유만으로도 한국 내에서 충분히 뉴스거리가 되고 남는다. 그러나 한국민들이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보는 시각은 미주에 국한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느낌이 있어 안타깝다.

세계 어느 곳이든 한민족이 모여사는 곳이면 어디나 하인스 워드와 견줄 만한 훌륭한 위인들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구 소련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러시아에서 머라이어 캐리와 같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한국인 3세 가수인 아니타 최는 그래도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류 감독 중 하나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고려인 율리아나 김도 있다.

구 소련과 동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은, 어딜 가서 무얼 하든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문화 전파와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가까이 이해하기 위해서 소련의 서쪽 끝자락이었던 에스토니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서울식당의 주인 아주머니인 류드밀라 김(오른쪽), 그리고 에스토니아어로 통역을 도와준 조카 잔라 (왼쪽).
ⓒ 서진석
"우리도 대장금 보고 싶다"

에스토니아에 여행을 간 사람들이 자주 놀라는 것 중 하나는 의외로 한국식당이 많다는 것이다. 수도 탈린에만 자그마치 일곱 개의 한국식당이 영업 중이다. 에스토니아에 있는 정식 한국국적 교민은 단 6명 뿐이고, 일본 식당이 4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놀 랄만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수도 탈린만이 아니라 인구가 수 만 명에 불과한 시골도시인 발가(Valga), 엘바(Elva)나 공업도시인 코흐틀라-예르베(Kohtla-jarve) 등, 아직 중국식당조차 진출하지 못한 곳에 한국식당이 자랑스럽게 영업을 하고 있고 작은 시골마을에 가도 골목 어귀에서 한국식당 간판을 발견할 정도이다.

▲ 서울식당에서 사용하는 메뉴판, 음식이름은 분명 한국말일텐데, 무슨 암호처럼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하다.
ⓒ 서진석
이 식당들은 전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이주한 고려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식당이다. 탈린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국식당은 아무래도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서울식당'이다. 카자흐에서 이주해서 식당운영을 맡고 있는 류드밀라 김은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 탈린에서 12년째 식당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에스토니아 고려인 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리디아 클바르트와 친척관계로, 그녀의 도움을 받아 에스토니아에 정착을 시작했고 현재 다섯 명의 자녀는 전부 러시아, 미국 등에 이주해서 살고 있다.

주방에서는 역시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주방 아주머니는 그래도 한국어를 조금 구사하는 편으로 한국에서 손님들이 온다 치면 주방일을 마다않고 식당에 나와 손님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수더분한 아주머니이다. 한국의 대장금을 꼭 보고 싶다는 류드밀라 아주머니는 언제쯤 아리랑 TV에서 대장금을 상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를 여행하는 나그네들이, 이 식당에서 김치찌개와 육개장, 삼겹살 등 고향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여행에 필요한 힘을 축적하고자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식당에서 내놓는 음식들이, 한국음식이라고 말하기조차 곤란한 러시아 현지음식과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이 주를 이루어 정작 우리 한국인들의 입맛에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정통 한국음식에 기꺼이 도전해보려 하지만, 비싼 한국주방장을 부르기도, 그리고 마땅히 한국요리에 대한 자료를 구하기도 어렵다며 아쉬워했다.

▲ 돈체르 식당의 입구, 식당 간판에 '한국식단'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 서진석
"내, 에스토니아에서 훈장질하다가 여디래 와서 임식점 열었지"

서울식당이 탈린 중심가에 위치한 이점으로 비교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면, 다른 식당들은 관광객들의 동선과는 거리가 먼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자리를 마련하여 장사를 하고 있다. 탈린 서쪽 한 아파트단지에는 '돈체르(Dontser)'라고 하는 희한한 이름의 식당을 찾아볼 수 있다. 간판에 '한국식단(!)'이라고 씌여있는 것을 보아서 한국식당인 것은 분명한데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돈체르 식당의 주인은 아리나 한이라고 하는 고려인으로 한국어를 곧잘 구사하지만, 연해주나 간도에서 사용하던 고려인 1세들이 말투가 여전히 역력하다. 역지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인 아리나 아주머니는 80년대 말 에스토니아에 러시아어 '훈장질'을 하러 온 것을 계기로 탈린에 남아서 '임식점' 즉 식당을 열게 되었다.

남편은 역시 고려인으로 에스토니아에서 '의사질'을 하다가 얼마 전 정년퇴임했고, 38살인 아들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사업을, 35살 딸은 밀라노에서 모델 일을 하다가 이탈리아 사람과 결혼하여 현재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돈체르'라는 식당 이름은 바로 아들 이름인 '동철'에서 따왔다. 강철처럼 튼튼하게 자라라고 붙인 이름이란다. 에스토니아에서 최초로 정착한 한인 중 하나인 아리나 아주머니는 이미 탈린에서만 한국식당을 네 개나 열었다. 음식은 카자스흐탄에서 시어머니로부터 배웠다.

▲ 콘스탄틴 식당 입구에서 자세를 잡아주신 콘스탄틴 아저씨. '천만에요' 대신 '환영합니다'나 '어서 오세요'라는 구절로 바꾸어보시라고 말씀드렸다.
ⓒ 서진석
또 한 동네에 가면 아파트 한 구석에 '천만에요(!)'라는 한글로 손님을 맞는 '안뇐'이라는 식당이 있다. 상호인 '안뇐'은 우리나라 인사 '안녕'을 그냥 에스토니아식으로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고려겨례음식'이라고 하는 글귀가 선명하다.

이곳 식당을 운영하는 콘스탄틴 강 아저씨는 우즈베키스탄의 군인 출신으로, 퇴역한 후 에스토니아에 남아서 식당을 열었다. 주로 함경도나 평안도 말투가 두드러지는 고려인들의 한국어와는 좀 다르게 '시방', '어드메'라는 전라도 사투리를 간간히 사용하며 많이 어눌하지만 아직도 한국어를 잊지 않고 있었다.

주방에서 일을 도맡아 하는 이라나 아주머니는 그의 부인으로 아저씨보다 한국어 구사력이 좀 낫지만, 한국어로만 대화를 진행하면 말이 막히는 일이 많았다. 한국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콘스탄틴 아저씨는 올해 가을 7살이 되는 손자에게 '철학'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현재 에스토니아에는 전체 200명 정도의 고려인과 그 후손들이 살고 있고, 수도 탈린에는 약 50명 정도가 살고 있으나, 다른 민족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고려인은 5분의 1 수준이다. 이곳에 이주한 이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나 간도 지역에서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후손들로서 거의 친인척관계와 현지인들과의 결혼으로 연결되어 에스토니아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에스토니아에 최초로 발을 디딘 한국인에 관한 자료는 아직 나온 것이 없지만, 현재 에스토니아 고려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지난 5월 8일 정확히 81세 생일을 맞은 로날드 페트로비치 최옹이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에스토니아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으나, 나이 든 층에서는 에스토니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현재 에스토니아 고려인 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리디아 클바르트는 에스토니아 내 소수민족연합의 회장도 같이 맡고 있어, 에스토니아에서 고려인들의 위치를 잘 말해주고 있다.

▲ 돈체르 식당 아리나 아주머니(가운데)와 종업원들. 아리나 아주머니는 아르메니아 사람도, 에스토니아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다 친구처럼 지낸다면서 꼭 사진 속에 종업원들의 모습이 들어가기를 원했다.
ⓒ 서진석
어렵게 한인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뭐라도 어려운 점은 없냐고 물어보았지만, 하나 같이 별로 사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이곳은 러시아처럼 인종차별이나 인종 간 폭력사태가 거의 없고, 사람들은 비교적 성공해서 자리를 잘 잡았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같은 구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에서 비시민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고려인들이라고 역시 피해갈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시민권문제다. 에스토니아 독립 이전에 이주한 사람들은 독립 직후 에스토니아 시민이 되겠다는 각서에 서명한 후 비교적 용이하게 시민권을 얻은 경우도 있지만, 그 후에 이주를 해온 경우 강화된 이민법 규정으로 시민권을 따기가 쉽지 않다. 일단 이곳에서 영주권을 얻은 경우는 많지만, 정작 외국인으로 분류되어있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고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는 등 불이익이 많다.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에스토니아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에스토니아어 같은 어려운 말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고, 시간을 내기도 어렵다. 게다가 카자흐스탄의 경우 본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을 거의 국가에 대한 배반 정도로 치부하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들은 특별히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고려인들 역시 에스토니아 국적을 갖지 못한 러시아계 외국인들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그런 법적인 불이익은 아이들에게까지 자동적으로 넘어간다.

게다가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도, 정식으로 한국어를 공부할 시간이 거의 전무하여 공부할 가능성이 없다. 한국어 강의는 현재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탈린에서 약 180km나 떨어진 타르투에서 진행되는 것이 전부라서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기엔 역부족이다.

소련의 붕괴와 독립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외지에서 정착해야만 했던 그들의 애환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지만, 지금 그들이 사는 모습에선 그런 흔적을 많이 엿볼 수 없어 다행이다. 그리고 고려인 중에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없고, 에스토니아의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좋아서 다들 별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 함박웃음을 짓기만 한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한국 사람 다 안다구, 다들 존중을 하지. 여기서 싹 모두 의사질하지, 훈장질하지, 엔지니어질 하지, 싹 모두 대학 다 필한(마친) 사람들이야. 아주 열심히 일했어."

돈체르 식당의 주인 아리나 아주머니가 함박웃음 지으며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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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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