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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이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 홀에서 열린 만주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음악회에서 자신이 직접 작곡한 '만주국'을 지휘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친일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독일 연방문서보관소(Bundesarchiv) 산하 영상기록보관소(Filmarchiv)에 보관 중인 '안익태 영상물'을 <객석> 3월호에 소개한 송병욱(훔볼트대 음악학과 석사과정)씨를 8일 독일 베를린에서 직접 만났다.

▲ 독일연방문서보관소에서 보관 중인 안익태 영상물을 소개한 <객석> 3월호.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안익태 선생의 유럽에서의 행적을 연구하고 있는 송병욱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안익태 선생의 모습은 대부분 1937, 8년 이전, 즉 애국가를 만들었던 1935년을 포함해 그가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의 모습과 2차대전 종전 이후"라고 설명했다(안익태 선생은 1937, 8~1945년 까지 베를린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송병욱씨는 "안익태 선생 생존 당시의 신문 인터뷰와 그가 스승 슈트라우스와 주고받은 편지 등의 자료를 검토한 결과, 안익태 선생이 일본과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주장했다.

송씨는 이번에 밝혀진 사실만으로 성급하게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로 재단하려는 일부 언론의 태도에 우려를 나타내며 "이번 일을 계기로 안익태 선생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아래는 송병욱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아쉽게도 사진 촬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익태 동영상 확인 후 "믿을 수 없었다"

▲ 친일 논란이 일고 있는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
- 안익태 선생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음악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안익태 선생에 대한 관심이 많다. 서양음악계에서 잊혀진 안익태 선생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그를 부활시키고픈 마음에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1937년부터 해방되던 1945년까지 안익태 선생에 대한 자취는 거의 알려진 게 없기 때문에 그의 자취를 찾아 안익태 선생 전기를 완성하자는 마음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안익태 선생이 1942년 베를린에서 직접 지휘했던 동영상을 확인하다가 뜻하지 않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애국자', '한국을 지극히 사랑한 사람'이라는 안익태의 이미지와는 많이 차이가 나는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접한 후 정말 충격에 빠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 이번에 소개한 동영상은 이미 지난 2000년 언론에 소개된 것인데 또 다른 새로운 내용이 있는가?
"2000년에 소개된 바 있지만 당시에는 영상 내용이 자세히 보도되지는 않았고 지금까지 안익태 선생이 '만주국'을 지휘했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작곡까지 했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번에 안익태 지휘로 연주된 곡이 어떤 곡인지 분명히 확인됐다고 할 수 있다.

동영상 자막을 통해 만주국 10주년을 기념하는 '만주국'이 안익태 선생이 작곡, 지휘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국환상곡과 만주국의 선율 가운데 두 부분이 사실상 동일한 멜로디라는 것도 확인했다. 두 선율이 음악적인 면에서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다."

- 일각에서는 동영상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동영상을 통해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꾸밀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친일 의혹'

- 동영상 외에도 지금까지 안익태 선생에 대해 연구한 내용에 대해 알려 달라.
"우리에게 알려진 안익태 선생의 모습은 그가 1937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하던 것이 대부분이다. 1938년부터 해방되던 1945년까지의 안익태가 유럽에 머무는 동안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7, 8년 동안 그가 베를린에 머물렀으며 유럽의 여러 악단에서 지휘를 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는데 2차대전 이후 스페인 마요카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특정한 악단에 정식지휘자로 고용되었다는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독일을 포함해 스페인, 이탈리아, 동유럽 등 그가 지휘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자료조사를 하고 있는데 연구 자료를 찾는 것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 1937년 전후로 안익태 선생의 행보는 어땠나.
"1935년 애국가를 만들 당시까지 안 선생은 분명 일본과 차별되는 의미에서 한국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터뷰 기사를 보면 적어도 1936년경까지 안익태 선생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 숙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1938년 영국 더블린 연주 당시 지역 신문 인터뷰를 보면 친일 의혹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안익태=친일파' 너무 성급... 연구 계속돼야"

- 당시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안익태 선생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했나.
"계속 연구 중인 부분이라 조심스러운데 지금까지 안익태 선생의 지휘가 탁월했다고 평가한 자료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월간지 <객석>(2000년 5월)에서 안익태 선생이 지휘했던 악단의 단원과 인터뷰했던 내용에 따르면 당시 단원들 사이에는 안 선생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 동양인이 베를린 필과 같은 악단에서 지휘를 했다는 사실은 센세이션한 일이고 그러한 것은 당시 신문이 충분히 다룰 만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신문 등을 중심으로 자료를 계속 찾고 있다."

- 이번에 소개된 동영상으로 또 다시 친일 논란이 불거질 듯하다.
"계속 연구가 필요한 부분인데 안익태 선생의 인터뷰 내용, 그가 스승 슈트라우스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근거로 판단해 볼 때 그가 당시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안익태 선생을 친일파로 바로 연결하려는 듯한 일부 언론의 성급함에는 우려를 표하고 싶다. 나는 안익태 선생을 훌륭한 서양음악의 선구자라고 생각한다. 지금 애국가 재검토 등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너무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안익태 선생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상황에서 이를 먼저 제대로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런 연유로 1938년~1945년까지 7~8년간의 행적에 대해 면밀히 고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유족들에게 어떤 모욕을 주겠다는 의도가 전혀없음에도 그렇게 비춰질까 개인적으로 매우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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