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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 겨울이 유난히 추운 건, 다가올 봄을 벌써 밀어내는 시샘일 겁니다. 봄을 환한 얼굴로 맞으려면 겨울을 잘 이겨내야 하는데, 매일 놀라고 사는 게 버거운 사람들에게선 봄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제 저녁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퇴근을 해 집에 도착하니 아들놈이 뜬금없이 "아빠, 엄마 오늘 울었다"하는 겁니다. "왜?"하고 물으니 "아까 일기장 보면서 울던데"하며 오래 되어 색이 바랜 아내의 일기장을 제 앞에 내밀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내가 그걸 왜 가져오느냐고 아들놈에게 핀잔을 주며, 보지 말라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과히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첫 장을 펴는 순간 날짜를 보니 1992년 11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내와 제가 사귀기 시작한 지 1년쯤 되는 시기로 보통의 연인이라면 무작정 서로가 좋을 때이지만, 우리 부부에겐 오직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버텨냈던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처음, 직장에서 만나 동향이란 이유로 오빠 동생으로 살갑게 대하다 보니 어느새 연인이 되어 꿈같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자고 결혼 결심을 굳힐 즈음, 제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사건이 찾아옵니다.

업무에서 시작된 사소한 말다툼이 주막다짐으로 변하고,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 자책감에 도저히 얼굴을 들고 출근할 수가 없어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말았죠. 지금같으면 물론 그런 행동을 하지도 않았겠지만, 설사 잘못된 행동을 했더라도 용서를 구하고 더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만회하려고 노력했을텐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릅니다.

이십대 일이 넘는 공개경쟁 시험을 통해서 어렵게 들어간 번듯한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후회가 밀려들고 견딜 수가 없어 모두에게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렸습니다.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그가 힘들 때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오늘도 밤을 꼬박 새웠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금 시작하면 되는데, 하루 종일 그만을 생각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방황을 끝내고 빨리 돌아와 달라고."
"나는 그를 믿는다. 그는 나보다 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내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아내의 일기장엔 온통 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간절한 기다림과 애틋한 사랑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와 아들놈이 놀려댔지만 주책스럽게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처 몰랐습니다. 그토록 아내가 저를 사랑했었고 저 때문에 그렇게 가슴 아파 했었다는 것을, 그땐 제가 너무 힘들었기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의 기도 덕분인지 두 달 정도의 긴 방황을 끝내고 돌아올 수 있었고 아내는 그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제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정신적·물질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스물 셋의 아리따운 처녀가 서른 일곱의 나이가 되어 이젠 '아줌마'란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보다 나은 직장(?)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그래서 저를 꼭 닮은 건강한 아들 하나를 두고 티격태격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아내의 일기장 속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감동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머릿속을 맴돌아갑니다.

"그가 돌아왔다. 지친 모습이었지만 웃는 얼굴로, 그리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해 주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그를 보면서 적어도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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