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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완기 청와대 인사수석 내정자.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노무현 대통령이 정찬용 전 인사수석의 후임으로 김완기(61) 소청심사위원장을 택했다.

노 대통령은 정 수석의 후임으로 이학영 YMCA 전국연맹 사무총장을 점찍었으나 '강도미수' 전력에 대한 부담 때문에 끝내 이학영 카드를 접었다. 노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정 수석과 붕어빵'인 이 총장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나, 국민 정서를 고려한 거의 모든 참모들의 반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강도미수' 전력이 있는 이 총장 대신에 '수배자 도피 및 방조' 전력이 있는 김 위원장을 택했다. 두 사람 다 노 대통령이 후임을 천거해달라는 주문을 받은 정 수석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이로써 '고졸 9급 면서기 출신 인사수석'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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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차관급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20일 청와대 인사수석으로 내정된 김완기 소청심사위원장은 고교를 졸업하고 9급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차관급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하위직과 최고위직 직업공무원을 지낸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사추천을 하는 데 적임자라고 판단해 그를 인사수석에 내정한 것으로 보인다.

김완기 인사수석 내정자는 호남지역의 명문인 광주동중(光州東中)을 수석 졸업하고, 광주고(光州高)를 역시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김 내정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중3 때부터 가정교사로 어머니와 2남4녀 형제들을 건사해야 했다.

김 내정자는 64년 광주고 졸업후에도 흙벽돌 장사를 하면서 대학 진학의 꿈을 버리지 않았으나 결국 22살 때인 66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9급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해 공직을 시작했다.

첫 부임지는 전남 광산군 서창면사무소. 그는 그곳에서 면서기(9급 공무원)로 출발해 전남도청, 내무부 본부 근무를 거쳐 전남 구례·나주 군수를 역임했다. 특히 전남지역에서 가장 인구가 적고 낙후된 구례군에서 군수를 지날 때는 참여정부의 '혁신'에 해당하는 선진개혁행정으로 군민들이 공덕비를 세우려고 할 만큼 지지를 받았다.

김 내정자는 이어 고졸 출신으로 처음으로 내무부(현 행자부) 행정과장, 광주시 기획관리실장, 국무조정실 자치행정심의관, 광주시 행정부시장을 지내는 등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졸 출신으로 보기 드물게 '텃세가 센' 내무부에서 요직을 거치다보니 여러 가지 일화를 많이 남겼다.

우선 김 내정자는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전에 전국 시장·군수를 '발령'내던 요직인 행정과장을 고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역임한 '기록'을 갖고 있다. 지금은 내무부가 지방자치 시대를 계기로 행자부로 바뀌었지만, 행정과장은 지방시도를 관장하던 당시 내무부에서도 지방공무원의 인사와 정보(동향 파악 및 여론관리) 업무를 맡은 핵심 과장이었다.

특히 역대 행정과장의 면면을 내무부 행정과장이 고위 관료의 산실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27대 행정과장을 지낸 최인기씨는 행자부장관을 지냈고, 그 뒤로 28대 임사빈 전 국회의원, 29대 윤한식 전 경남지사, 30대 이해봉 의원, 31대 임경호 전 경기도지사, 32대 이의근 경북도지사 등 역대 행정과장 출신들은 '줄줄이 차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지냈다.

긴급조치 시절에 수배중인 조영래 변호사 숨겨준 강단 있는 공무원

그러나 김 내정자는 내무부 소속 공무원이면서도 70년대 '서슬 퍼런 긴급조치 시절'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인권변호사인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경찰에 수배되어 은신중일 때 집에 숨겨줄 만큼 강단(剛斷) 있는 공무원이기도 하다.

그 시절은 시국사건 수배자를 숨겨주다가 발각이 되면 공직에서 해임될 만큼 엄혹한 때였다. 김 내정자는 나중에 폐암에 걸린 조영래 변호사가 투병중일 때 자신의 고향인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요양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민변' 변호사 출신으로서 조영래 변호사와 김 내정자의 인연을 알기 때문에 지난 2003년 6월 행자부 산하 지방자치국제화재단 상임이사였던 그를 차관급인 소청심사위원장으로 발탁해 임명장을 줄 때도 이와 관련된 가벼운 환담을 나누었다는 후문이다.

바로 이런 '전력' 때문에 김 내정자는 5·18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시민사회조직과 흉허물없이 대화가 통하고 고향인 전남·광주에서 신망받는 몇 안되는 출향(出鄕) 공직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 2003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민주당 '광주시장 경선 파동' 이후, 당시 중앙당에 반기를 든 민주당 광주시지부와 시민단체들이 연합 후보로 추진했던 두 후보 중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당시 광주시 행정부시장(1급)을 끝으로 명예퇴직해 행자부 산하 지방자치국제화재단 상임이사로 자리를 막 옮긴 김완기 상임이사와 함께, 광주시장 후보로 천거된 인물이 바로 정찬용 전 인사수석이다. 그런데 정치에 관심이 없던 김 내정자와 정찬용 전 수석은 당시 각각 주소가 '서울'과 '담양'으로 돼 있어서 광주·전남지역 시민단체가 추진한 '연합공천 거사'는 끝내 무산되었다.

김완기 내정자는 자신의 고졸 학력을 '콤플렉스'가 아닌 '트레이드 마크'로 활용할 만큼 낙천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사석에서 "나중에는 대학에 갈 기회가 있었지만, 고졸 학력을 '커버'하기 위해 야간대학이나 특수대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이 싫어 대학을 가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광주시 행정부시장 재직 당시에도 `학력 콤플렉스가 없느냐'는 질문에 "학력 때문에 불편한 적은 있었지만 특수대학원 수료 등으로 적당히 학력을 장식하려는 생각은 없다"며 "공복(公僕)의 자세를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할 만큼 공직자의 자세를 중요시하는 청백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염색하지 않은 허연 '백두'(白頭)가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인 김 내정자와 가까운 인사로는 광주일고 출신의 정찬용 전 수석과, 광주고 동기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경호실장을 연임한 안주섭 전 국가보훈처장 등이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둘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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