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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비극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대개 단종임금을 꼽을 것이다. 힘에 눌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그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슬픈 생애는 역사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영화, 연극으로도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 정업원구기 (정업원옛터) 비각
ⓒ 이승철
우리는 단종하면 멀리 영월에 있는 장릉과 청령포를 생각하게 된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했다. 영월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수습해 암장한 후 중종 11년에 무덤이 만들어지고 숙종 7년에 묘호를 받아 장릉이 되었다. 비극의 주인공 단종의 짧은 생애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지만 단종 비 정순왕후의 생애야말로 어쩌면 더 비극적인지도 모른다.

▲ 동망봉 표지석
ⓒ 이승철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동대문 밖에서 단종과 생이별한 정순왕후는 지금의 숭인동 청룡사 터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 시녀 세 명과 함께 눌러 앉는다. 이곳이 바로 정업원 옛터다.

이때 단종 비 송씨의 나이 18세였으며 이때부터 그녀는 날마다 남동쪽 가까이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단종이 유배된 영월 쪽을 바라보며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삶을 살았다. 그녀가 죽은 82세까지 64년의 길고 긴 세월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산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 지금은 근린 공원으로 변한 동망봉 정상 입구
ⓒ 이승철
정순왕후 송씨는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이다. 단종 원년에 왕비로 간택된 송씨는 성품이 온화하고 검소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공손하여 종묘보존에 적임자라 하여 다음 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왕비로 책봉된 뒤 겨우 1년 반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의덕왕대비가 된다. 그녀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 동망봉의 산죽
ⓒ 이승철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등의 단종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쳥령포로 유배되자 왕대비에서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이때 단종과 생이별한 송씨는 그 후 단 한 번도 단종을 만나지 못하고 82세의 긴 생을 마칠 때까지 정업원과 동망봉을 오가며 단종의 명복을 비는 한 맺힌 삶을 살았다고 하니, 그 깊은 한을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하리요.

▲ 청룡사 정문
ⓒ 이승철
단종비 송씨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던 산봉우리가 바로 동망봉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 정경을 가엾게 여겨 근처에 영빈정을 지어 주었으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송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초가집인 정업원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먹을 것이 떨어져도 조정의 책벌이 두려워 떳떳하게 도와줄 수 없었던 인근 백성들이 밤이면 처마 밑에 몰래 조금씩 갖다놓은 곡식으로 연명하였다 하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 동망봉에서 내려다 본 청룡사
ⓒ 이승철
세월이 흘러 조정에서 먹을 곡식을 보내주어도 결코 한 줌도 먹지 않았다고 하니 그 깊은 한이 짐작이 될 것 같다. 동망봉 아래 쪽 절벽 위에 동망정을 지어 주었지만 그 동망정에도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송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후손이 없어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의 묘역에 장례하였으니,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사릉이 바로 그곳이다. 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고 송씨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능호를 사릉으로 추봉받았기 때문이다.

▲ 동망봉 절벽의 비둘기 떼
ⓒ 이승철
1월 6일 오후 정업원 옛 터를 찾으니 지금은 청룡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다. 절 이곳저곳을 찾아보아도 정업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 문간 사무실의 보살에게 물으니 화장실 입구로 들어가 오른 편 쪽문을 밀고 들어가 보라고 가르쳐 준다.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쪽문 안으로 들어서니 퇴락한 정원에 작은 비각 하나가 덩그렇게 서 있다. 비각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정업원이라 새긴 글씨가 어슴프레 보인다. 영조 47년에 정순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정업원구기 세신묘구월육일 음체서'라는 비문과 '전봉후암어 천만년'(한문 글씨로 써 있음))라는 비각 현판의 글은 영조대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 동망정에서 바라본 영월을 향한 동쪽 전경
ⓒ 이승철
정업원 옛터 청룡사에서 동망봉을 바라보니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제법 가파른 언덕이다. 정순왕후가 오르내렸던 길은 찾을 수 없고, 그 시절의 정순 왕후처럼 가난한 서민주택들이 밀집한 골목길을 허위허위 따라 올라가 보았다.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지더니 제법 넓은 배드민턴장이 나타났다. 바로 동망봉이었다. 멀리 동쪽으로 아차산 너머까지 바라다 보이는 것이 정순왕후가 영월 쪽 임 계신 곳을 향하여 눈물로 빌고 빌었을 통한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동망봉에는 영조 47년에 영조대왕이 친필로 '동망봉'이라고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는데, 일제시대 때 이곳 바위산이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를 깨뜨려버려 아쉽게도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 채석으로 흉물스런 모습이 된 동망봉 서편의 바위 절벽
ⓒ 이승철
남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능선은 모두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산책과 운동하러 나온 몇 사람에게 이곳의 유래를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새삼 세월의 무상함에 마음이 아리다.

채석장으로 흉물스럽게 깎아내린 절벽 위에는 수백 마리 비둘기 떼가 모여들어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하고 정순왕후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던 옛 동망정 자리에는 개축공사의 망치 소리가 을씨년스런 잿빛 겨울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청룡사에서 바라본 동망봉
ⓒ 이승철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단종이 청령포에서 지었다고 전해지는 '자규루 시' 전문)

덧붙이는 글 | - 정업원 옛 터와 동망봉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습니다. 

- 이승철 기자는 시인이며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시인 이승철 을 검색하시면 홈페이지 "시가있는오두막집"에서 다른 글과 시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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