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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환
10월 21일 아침 7시 38분, 성수대교 위에서 바라본 아침 햇빛은 아름다웠다. 청량한 햇살은 하루를 출발하는 분주한 자동차들을 다독거리고 있었고, 쌀쌀한 공기는 특유의 쾌적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 9년 전 성수대교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 학생들은 아름다운 햇빛이 비치는 강물을 쳐다보면서 아침을 거르고 나온 배고픔을 잠시 잊었을 지 모른다. 출근하던 시민들은 하루동안 할 일을 머릿속에 그리며 동호대교를 무심히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38분, 버스와 승용차 그리고 48m 상판과 함께 강물 속으로 쳐 박히고 말았다.

"연수야, 너무 억울해. 넌 아직 할 일이 많잖아"

성수대교가 끊어진 지 4분만에 교통방송을 통해 최초로 사고 사실을 전파했던 이장춘 경사는 기자에게 "동료였던 이선호 경장이 첫 제보자였다. 그런데 가슴이 떨리고 긴장이 돼서 방송을 못하겠다고 하더라. 현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가고, 헬기가 뜨고, 방송은 연결돼 있지…"라며 급박했던 순간을 들려줬다.

특히 무학여고의 피해가 컸다. 8명의 여학생이 숨졌고, 그들의 꿈은 거꾸로 추락한 버스 안에서 참혹하게 우그러지고 말았다. 그때만 해도 행당동에 위치한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압구정동 방향에서 오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성수대교에 오기 전날 만난 무학여고 오희석 교감은 "사고 이후 한강 다리를 건너는 등하교가 금지됐다. 학교 배정 원칙이 변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압구정 방향에서 바라본 성수대교. 오른편에 716번 시내버스가 보인다. 당시 16번 버스(현재의 716번)를 운전하던 유성열씨 역시 목숨을 잃었다
압구정 방향에서 바라본 성수대교. 오른편에 716번 시내버스가 보인다. 당시 16번 버스(현재의 716번)를 운전하던 유성열씨 역시 목숨을 잃었다 ⓒ 이정환
1994년 그날은 비가 내렸다. 9년 전 비극을 기억하기라도 한 것처럼, 태양이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오희석 교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성수대교 사고로 희생된 故 이연수(당시 17세. 고등학교 2학년)양의 친구 김모씨를 취재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해 둔 터였다. 하지만 오희석 교감은 축축한 목소리로 "아무래도 힘들겠다.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김모씨는 1994년 10월 23일 압구정동 천주교회에서 열린 고별 미사에서 "연수야, 어린이 같은 순수함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불같은 정열로 그림을 그리던 너. 지금 간다는 건 너무 억울해. 넌 아직 할 일이 많잖아"라며 눈물을 흘렸던 친구. 그러나 다시 17살 소녀로 돌아가 새 살이 돋지 않는 시커먼 흉터를 보여달라는 요구는 잔인한 주문임에 틀림없었다.

당시 연수양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부치지 못한 편지'때문이었다. 수신인은 사흘 전 자신에게 사랑의 매를 들었던 아버지. 연수양은 편지를 통해 "저를 때릴 때 마음 얼마나 아프셨어요. 아빠, 부족한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애틋한 사랑을 전하고자 했다. 미처 아버지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가방에서 발견된 편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연수양의 마지막 편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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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빠 보세요. 아빠. 저는 요즘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아빠가 저를 때리셨을 때 제 마음보다 백배, 천배나 더 마음 아프실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빠! 저를 때리신 것이라 생각지 마세요. 제 속에 있던 나쁜 것들을 때려서 물리치신 거라 생각하세요. 그래서 착한 것들로만 가득한 딸이 되게끔 하신 거라 생각하세요….

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설사 고통과 괴로움이 따를지언정 아빠가 저를 얼만큼 사랑하는지 또 제가 얼만큼 더 발전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지날 수도 있었겠지요. 아빠가 얼마만큼 힘드신 지도 모르고….

저를 혼낸 것을 몹시도 마음 깊숙이 괴로움이 있으시다면 아빠, 저를 위해서 한번 더 마음을 풀어주시지 않겠어요? 아직은 덜 익은 열매이지만 비바람과 천둥 번개 서리를 이겨 낸 아주 멋진 열매로 아빠 앞에 서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빠, 부족한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제 마음이 아픈 만큼이나 저도 정말로 아빠를 사랑합니다… 아빠. 저도 잘할께요. 아빠! 꼭 즐겁게 해드리겠어요. 이제부터! 아빠도 파이팅!

94년 10월 20일 아빠를 사랑하는 연수가 드려요. / 1994년 10월 22일자 동아일보 발췌


말라비틀어진 화분, 쓸쓸한 이연수양 묘소

성수대교에서 연수양이 잠들어 있는 곳까지는 꼭 2시간이 걸렸다. '경기도 용인군 천주교 공원 묘지 입구'. 표지판 부근에서 화원을 운영하는 아주머니는 "30분 정도 걸리겠지만, 남자 걸음이라면 괜찮을 것"이라며 꽃다발을 건네줬다. 오솔길,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들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랬다. 9년 동안의 망각에 비한다면, '괜찮은 거리'였다.

공원 묘지 관리소에서 고인의 묘지 위치를 물었다. 이동근 관리소장(45)은 "1994년 10월 23일에 안장됐다"는 말에 서류를 찾아보더니 지도를 한아름 안고 왔다. 그리고 "3558, 3558"이라고 되뇌면서 지도를 뒤척였다. 갸웃거리는 고갯짓에 초조함이 더해갔다. 그만큼 오랫동안 잊혀진 죽음이었다. 마침내 그는 "여기 있다"며 지도 한 부분을 가리켰다.

全州李살로메娟受之墓(전주이살로메연수지묘) 1978. 2. 12 - 1994. 10. 21. 사랑하는 예쁜 살로메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 영원히 간직하도록 엄마 아빠 동생은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아버지 ○○○(안드레아) 어머니 ○○○(마가다) 동생 ○○○(그레고리오).

어느새 따스한 햇볕이 연수양 비석에, 다른 수많은 삶과 죽음의 경계석에도 내려앉고 있었다. 많은 묘소 앞에서 살랑살랑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들의 색깔은 햇살아래 더욱 도드라졌다. 하지만 연수양 묘소 앞에는 말라비틀어진 화분만이 외로이 놓여 있었다. 관리소장은 "몇 개월 동안 가족들이 찾지 않은 것 같다. 추석 때도 안 왔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이정환
연수양의 아버지는 1996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7년 7월 3일자 <동아일보>는 성수대교 재개통을 하루 앞둔 무학여고의 표정을 전하면서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기 싫어서인지 유가족들은 학교측과 소식을 끊고 지낸다"며 "이연수양의 아버지 ○○○씨가 지난해 화병으로 딸 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전부"라고 적고 있다.

쓸쓸한 묘소 앞에서 모자의 소식이 더욱 궁금해졌다. 압구정동 천주교회에 세례명을 불러 주며 교적 조회를 의뢰했지만, 관계자는 "교적이 없다. 본인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사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생전에 연수양이 다니던 성당에서 일했다는 관계자 역시 "(어머니와 아들의 소식은)잘 모른다"며 "아버지가 딸 아이 죽음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얼마 후에 간암으로 돌아가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양의 죽음은 결코 불의의 사고가 아닙니다"

왜 명절에도 연수양을 찾는 사람은 없었을까. 얼마의 보상금 소식과 함께 세상이 그들을 묻는 순간부터 성수대교 붕괴사고 희생자 가족의 고통은 더욱 격렬해졌을 것이다. 성장 만능주의 경제가 드러낸 치명적 약점이 시간과 함께 잊혀지는 동안, 가족들은 무의미한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갔을 것이다.

성수대교에서의 아침이 떠올랐다. 도로 확장공사가 진행중인 성수대교는 활기찼고, 비극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비 또한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맘놓고 통곡할만한 장소조차 마련해주지 않았다. 부끄러운 상처의 증인들은 세상으로부터 퇴장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1994년 10월 23일, 이연수양의 고별미사를 집전한 나원균 신부는 "주일마다 이 자리에서 기도하던 연수양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게 됐지만, 연수의 모습과 깨끗한 마음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9년이 흐른 10월 23일, 교황 명예 전속 사제(몬시뇰)로 임명되는 나원균(60) 신부는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다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이양의 죽음은 결코 불의의 사고가 아닙니다. 이 시대, 이 사회의 부정비리와 무책임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사고였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정치,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낼 때에만 연수양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동아건설은 국민에게 267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

▲ 구 성수대교 준공석
1979년 10월 16일 열린 성수대교 개통식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아마도 이 행사를 '성수대교 준공석'은 분명히 지켜봤을 것이다. 이 준공석이 아직도 성수대교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총연장 1160M, 교폭 19.4m. 설계하중 DB 18톤. 공사기간 1977. 4. 9 - 1979. 10. 16. 시행청 서울특별시. 시공자 동아건설산업주식회사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한 비극의 핵심 원인은 부실 시공이었다. 당시 성수대교 사고 조사반장 장승필 교수(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는 "붕괴의 근본 원인은 설계 도면과 다르게 시공된 핀 플레이트와 수직재의 용접 불량"이라며 "다리가 설계대로만 시공됐더라면 붕괴사고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동아건설산업 관계자들이 잇따라 구속됐다. 하지만 검찰은 조사과정에서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혐의를 상당 부분 입증했지만 기소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초 최 회장은 1977년 2월 동아건설산업 사장직을 그만두고, 그 해 11월 동아그룹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점을 들어 무혐의를 강력히 주장했다.

검찰은 동아건설 관계자들을 통해 '최 회장이 공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트러스(트러스 교량의 핵심 구조물)를 정상 제작한 공장장을 해고시켰고, 실험 조립 과정 없이 트러스를 출고시켰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러나 최원석 회장은 "현장에 3-4차례밖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불기소 핵심 이유 역시 현장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 '사고 예견'이 어려웠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역설적으로 다리 건설 당시 현장을 자주 방문하는 등 열심히 일한 경영인은 나중에 사고가 나면 처벌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994년 9월 원자력발전소 공사 수주와 관련해 한국전력공사 사장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던 최원석 회장은 이후에도 사법처리와 관련해 자주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1999년 재산 해외 은닉 혐의, 2001년 동아건설 분식 회계 사건 그리고 올해 초에는 예금보험공사가 발표한 금융 부실을 초래한 장본인들 중에도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 2002년 6월 동아건설 파산.

사고 직후 최원석 회장은 서울시에 450억 원의 기부금을 내 놓기로 약정했다. 하지만 10월 22일 현재 서울시가 받아야 하는 기부금은 138억 7천만 원에 이른다.

여기에 성수대교 붕괴 사고 손해 배상금까지 더해지면 빚은 더욱 늘어난다. 손해배상금 191억원 중 현재까지 환수된 금액은 63억여원, 아직도 128억4500만원이 남아 있는 상태다.

아직도 동아건설은 국민에게 267억여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시 건설안전관리본부 관계자는 "현재 파산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재산 정리가 되면 채무 지급 비율에 따라 받게 될 것"이라며 "전체 금액을 환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 10월 18일자 한겨레신문은 "동아건설의 채무 지급 능력이 14% 수준으로 잠정 집계됨에 따라 미납금 267억 가운데 37억4천여만원만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국내 건설업체의 국제적인 신뢰도를 하락시킨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준 경제적 여파는 말할 수 없이 크다. 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던져준 정신적인 충격은 금전적으로 따질 수 없다. 그러나 9년이 지난 지금까지 동아건설이 탕감한 부채는 60%선에 머무르고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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