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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군은 침략을 당한 이라크가 아닌, 미국을 돕기 위해 이라크로 떠났다. 미군들과 근무하게 될 그들을 보면서 문득 20년 전 내가 미군들과 함께 근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은 내게 악몽이었다.

1982년 4월. 어떤 친구들은 한국 최초의 프로야구 개막전에 들떠 있었고 또 어떤 친구들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감옥소에 가 있었고 나는 같은 민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군번 132721**...

나는 아직도 6년 된 우리 집 프라이드 승용차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숫자 외는 데는 젬병이었다. ‘국민학교’ 때도 구구단을 못 외워 늘 나머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숫자에 별 관심이 없는 내가 20년 전의 군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군번을 생각했는데 숫자들이 주루룩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아직도 군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 년에 한 번쯤은 군대 꿈을 꾸곤 했었다. 꿈에서 제대를 하지 않았거나 다시 입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끔직한 악몽이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끔찍한 일이라니? 적어도 내겐 그랬다.

30개월의 군 생활은 아주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30개월은 꿈이 아니었다. 꽃다운 젊은 청춘이었다. 나는 그 꽃다운 젊은 청춘을 악몽처럼 보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의 머리통에 대고 총을 겨눠 본 경험이 있다. 그것도 총알이 장전된 45구경 권총을... 그때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어금니가 깨물어진다. 악몽이었지만 그 사건은 분명 꿈이 아니었다.

내가 군 생활을 할 때 우리나라에는 한국군 헌병과 미군 헌병이 합동으로 근무하던 두 군데의 한미합동 검문소가 있었다. 하나는 ‘주내 검문소’였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근무했던 ‘축석 검문소’였다. 축석 검문소는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가다가 ‘광능내 수목원’으로 꺾어들기 전에 위치해 있었다.(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른다. 43번 국도 변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983년 여름,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 나는 그때 포천에서 의정부로 빠져나가는 버스를 검문하고 있었다. 헌병 화이바는 폭염에 열 받고 있었고, 그 안에 갇힌 내 머리통은 지글지글 타오를 것만 같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지근거렸다. 오로지 군기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쭈쭈바를 빨고 있던 미군 헌병, 말대가리(얼굴이 길쭉하고 코와 입이 부분이 유난히 돌출 되어 나온 그를 나는 ‘호스 헤드’라고 불렀다.)가 다가왔다. 녀석은 쭈쭈바를 빨아 대면서 ‘비즈니스 우먼’(그들은 몸 파는 여자들을 그렇게 불렀다)들이 꼭 ‘거시기’ 하는 것 같다며 추잡한 농짓거리를 늘어놓곤 했었다.

당시 내가 만났던 미군들의 농담들은 거의 다 섹스와 연관되어 있었다. 농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들이 대부분 섹스와 연관되어 있어 보였다.

미군 헌병들은 다른 병과에 비해 나름대로 학교 공부를 할 만큼 했다고 한다. 헌데 ‘링컨’에 대해 한국군 병사들 보다 모르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사실 학교 공부를 할 만큼 했다고는 하나 당시 내가 만난 미군 헌병들의 학력수준은 중졸 정도였다.

인격을 따지는 데 있어서 분명 학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학교 공부 뿐만아니라 이렇다할 기술조차 배운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보니 미국 내에서 조차 마땅히 돈벌이 할 것이 없어 군에 입대한 것처럼 보였다. 한국이나 필리핀 같은 해외로 나오는 경우는 좀더 많은 수당을 받았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돈과 섹스였다.

‘링컨’이 누군인지도 몰랐던 ‘말대가리’. 그는 미군이 없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는 식의 무지한 주둥이를 놀려대곤 했다. 그 날도 역시 놈의 한 손에는 쭈쭈바가 들려져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 내 화이바를 툭툭 치면서 시비를 걸어왔다.(내 키는 반올림해서 173센티미터였지만 당시 헌병치고는 작은 편이었다. 이에 비해 미군헌병 ‘말대가리’의 키는 반올림하지 않아도 180센티가 훨씬 넘었던 것 같다.)

화이바를 툭툭 치던 놈은 나를 내려다보며 아주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흔히 있던 일이라서 나는 짧은 영어로 “돈 텃치 미!”라고만 했다. 놈들과 다퉈 봤자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당하는 것은 늘 우리 쪽 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은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통역을 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놈의 옆에 바싹 붙어 다니던 카투사병은 심부름을 가고 없었다. 짧은 영어실력으로는 놈을 상대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영어를 잘 구사 한다해도 영어로 씨부려 대고 싶지 않았다. 왜 우리 땅에서 멀쩡한 우리말 놔두고 영어로 씨부려 대야 하나? 젊은 혈기에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축석 검문소에는 한국 헌병과 미군 헌병, 전투경찰, 보안대 요원이 함께 근무하고 있었는데 전경은 근무 교대하러 전경초소에 들어가서 깜깜 무소식이었고, 사복 근무자 보안대 하사관(아마 하사관이었을 것이다.)은 늘 그랬듯이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보안대 출신의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라서 당시 군대에서 보안대 끗발이 제일 셌었다.)

땀 범벅이가 다 되어 검문을 마치고 버스에서 마악 내려서는데 놈이 다시 내 머리통을 쳤다. 그것도 버스에 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어금니를 깨물었다. 나는 버스가 저만치 떠나는 것을 보면서 놈을 초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을 뽑아들고 놈의 머리통을 향해 겨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욕설들을 퍼부어 댔다. 놈은 쭈쭈바를 물고 있는 채로 바르르 떨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당했던 수모를 한꺼번에 되 갚아 주고 싶었다.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 내렸다. 당아쇠를 당기는 순간 시원한 쾌감이 한꺼번에 몰려 올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었다.

놈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실 총을 겨누고 있는 나 또한 떨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에 모든 것이 끝나버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저 만치 초소에 뚫려있는 작은 창문 사이로 카투사 병이 아무 생각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투사병은 ‘호스헤드’보다는 오히려 내 구세주였다. 나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서 어떤 식으로든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총을 겨누고 있던 순간이 아마 10 여초 정도였을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 미군 병사의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쾌감을 불러 일으켰었다. 놈의 몸이 바르르 떨고 있을 때 내 입에서는 분명 잔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으리라.

나는 당시 스물 세 살의 피 끓는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이 세계 침략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미군이 월남에 가서 더럽고 추악한 전쟁을 벌이다가 보기 좋게 패전했었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국민교육을 아주 충실하게 잘 받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은 이 땅에 들어와 우리의 딸들을 섹스의 도구쯤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를 자신들의 속국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내가 만났던 그들 미군들의 습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또한 미군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 ‘말보로’나 ‘켄트’ 따위의 양담배 몇 갑을 얻기 위해 온갖 아부를 다 떨고, 단지 미국 국적을 얻기 위해 몸을 파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또한 우리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군대에 와서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미군이 영화하고는 전혀 다르게 얼마나 추악한 군대인가를,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가차없이 총부리를 겨누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나와 함께 근무했던 미군 애들은 겁이 많은 편이었다. 총을 잘 휘두르는 놈들이 총을 가장 무서워하듯이 놈들은 총을 가장 무서워하는 습성이 있었다. 빈총 가지고 장난치는 것조차 죽어라 싫어했었다. ‘호스헤드’ 또한 총구 앞에서는 덫에 걸린 쥐새끼에 불과했다.

놈의 머리통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당시 내 앞에는 어떤 경계선이 있었다. 그 경계선은 말하자면 선과 악의 경계선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경계선을 넘게 되면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떨고 있는 놈을 보면서 어떤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던 그 쾌감은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한 요소가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악마적인 요소가 있다.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을 때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총을 겨눌 만큼 악한 인간이었지만 살인을 할 만큼 악한 인간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이든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악한 것이다. 만약 내 마음 속에 악한 기운이 더 많았다면 나는 분명 그 불쌍한 ‘호스 헤드’의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가 잘려나간 채 비참하게 죽어 간 이라크 어린이... 그 어린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살인자는 분명 악의 화신일 것이다. 그 악의 화신은 단지 미군 뿐만이 아니다. 미군의 우두머리인 부시를 비롯해 전쟁을 찬성한 70%가 넘는 미국인들인 것이다. 그들 미국인 모두가 그 이라크 어린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의 여신상 앞을 지나가는 미국 사람들 10명중에 7명은 악의 화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린이들을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아쇠를 당기는 일을 찬성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 전쟁을 지지했다.

그들은 간접 살인을 통해 어떤 쾌감에 몰입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아무런 원한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그토록 처참하게 죽이는 데 동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 18일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 조사결과에 따르면 참으로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이 72%로 전쟁전보다 상승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고 난 지금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때보다 더 지지율이 올랐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무서운 사실이 있다. 지지율이 72%임에도 불구하고 걸프전을 이끌었던 아버지 조지 부시의 지지율 89%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낙인 찍혀야 함에도 불과하고 72%의 지지율이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집단을 어떻게 악의 화신의 집단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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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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