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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글쓰기를 해야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역사가들의 창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소명의식을 갖고 글쓰기를 해야한다. 그 글쓰기의 첫단추는 사실의 정확한 취재를 바탕으로 해야함은 그래서 너무도 당연하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란 EH. Carr의 말도 있고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란 신채호 선생의 말도 있다. 역사를 전공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지적처럼 역사적인 사실은 분명 하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럿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분명 하나일진데 그 하나가 사실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매우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의 문제를 떠나 매우 심각한 역사왜곡을 야기할 수 있다.

<중앙일보> 2월 22일자 '한국사 편견 벗고 새로 읽자'는 기사에서 이영기 기자는 "성공회대 교수인 저자(한홍구 교수)는 "그래서 역사는 골치 아프다"면서 "결국 문제는 역사를 보는 관점과 기준이며 그 판단까지도 의심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기사는 역사인식에 대한 오류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이런 자세 덕에 책은 우리가 현재 처한 문제에 호소력 있는 해법을 제공한다. 친일파 문제를 보자. 얼마 전 건국대 학생들은 현승종 전 총리의 이사장 취임을 반대했다. 반대 논거 중 하나는 현씨가 일제 때 학병에 지원한 친일파라는 것.

그러나 당시 학병은 사실상 강제 징집이었기 때문에 현씨를 '친일'로 몰아붙인 건 무리한 논리였다. 친일잔재 청산을 둘러싸고 이같은 오류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영기 기자는 '저자의 편벽 되지 않은 균형감각은 건강한 보수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게 근현대사의 가장 큰 불행이라는 탄식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건국대 현승종씨 사건의 당혹감

필자는 이 기사를 읽은 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일보> 이영기 기자가 한 교수의 책에서 역사인식의 오류에 대한 예를 든 건국대 이사장 출신 현승종씨 사건을 불쑥 끄집어 낸 것에 대한 당혹감에서부터 그 사건의 역사적 팩트에 대한 충분한 취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 사건을 희생양으로 섣불리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현승종씨 문제에 대한 한 교수의 주장은 틀렸다. 역사의 해석에 대해 승자의 기록일 수도 있다는 관점과 한 교수의 지적처럼 관점과 기준 판단까지도 의심해보는 성실한 자세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의 출발은 어디까지나 기초적이고 숨길 수 없는 사실(raw material)에 대한 취사선택에 관한 문제이지 사실(fact)에 대한 왜곡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 교수는 역사학자로서 그 심지(心志)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는 그의 이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필자로서 의심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 교수가 앞으로 글쓰기를 함에 있어 좀더 정확한 사실 관계부터 충분한 취재를 한 후 역사를 쓰기를 바란다는 소망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친일파에 대한 개념규정과 처벌에 대한 논쟁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에 대한 논쟁이 이어진다면 굳이 그것에 대해 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을 논함에 앞서 역사적 진실이 사료판단의 1차 기준이듯 현승종씨 사건 또한 훗날 역사가 될 이 사건의 사실여부부터 정확히 규명해봄이 또다른 역사쓰기에 대한 충실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한 교수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 史> 104쪽에 ‘친일파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된 것도 또 하나의 문제’라고 지적하며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하나는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아온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과 다른 하나는 해방 당시의 역사적 분위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두 번째 후자의 예로 현승종씨 사건을 들었다. 그 예로 든 한 교수의 팩트에 대해 일단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해 본다.

한 교수는 팩트부터 정확히 취재했어야

'노태우 정권 아래서 총리를 지낸 현승종씨의 경우,(여기까지는 맞다) 학생들이 그의 이사장 취임을 반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썼는데 여기서 두 가지 오류가 있다. 먼저 학생들이 반대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먼저 필자부터 말하자면 나는 당시 건국대 졸업생의 신분으로 민주동문회(청년건대) 회장 자격으로 ‘현승종 이사장 퇴임을 위한 범 건국인 비상대책위(이하 ‘비대위’) 집행위원장이었다.

당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은 현승종씨가 99년 <연합뉴스>와의 3·1절 기념 인터뷰에서 본인이 일제말 일본군 장교임을 고백하면서였다. 이 문제가 알려지자 건국대 구성원들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설립자 사진 밑에 어떻게 일본군 장교출신 현승종씨가 이사장으로 앉아있을 수 있는가, 그 어울리지 않음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동문교수협의회를 필두로 문과대 농과대 교수들이 반대성명을 낸 것에 이어 전체교수협의회 결의로 반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교직원노동조합 성명, 건국대 역대 총학생회장협의회, 이어 졸업생들로 구성된 청년건대 성명이 있고 4월 1일 비대위가 결성되면서 급기야 12만 동문을 대표하는 총동문회가 가세하고 나중에 총학생회가 합류하였다.

현승종씨 반대를 위한 비대위에서 학생들은 주된 역할이 아니었다. 이는 현씨가 나중에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민형사상 소송을 냈을 때 각 단체대표 중 학생대표를 제외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팩트의 왜곡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단지 학생들이 반대를 했다고 하면 어린 행동이라거나 얄팍한 역사지식에 의한 객기쯤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씨를 반대한 주된 세력은 한 교수보다 더 오랫동안 역사를 공부한 문과대 교수도 법을 전공한 전국 사립대 법대학장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현직 법대학장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현승종씨 취임을 반대했다는 데서도 사실관계에서 오류다. 현씨는 이미 건국대 이사장에 취임해 6년 동안 이사장으로 학교를 경영하고 있었다. 아마 현씨가 건국대 이사장으로 취임할 즈음에 만약 이 문제가 불거졌다면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 교수는 ‘학생들은 반대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첫 번째로 현승종씨가 일제말기에 학병으로 나간 친일파이기 때문에 민족건대의 이사장에 취임할 수 없다는 것을 들었다. 학생들은 형식상 지원제인 학병에 나간 것을 친일행위로 본 것인데, 이는 해방당시의 정서와는 큰 거리가 있다. (중략)당시 사람들은 학병을 대부분 끌려간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학병출신들은 일제통치의 희생자로 간주되었고, 해방정국 초기에 학병동맹을 결성하여 미군정의 탄압으로 해산될 때까지 진보진영 내에서 정치적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후략)’고 현승종씨의 경우를 옹호한다.

과연 사실이 그런가? 나는 80년대 이후 한홍구란 이름을 이종석, 정해구, 조희연 등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한 교수의 아픈 부분을 지적하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 한 교수의 글쓰기에 대단히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한 교수는 학병에 나간 것을 학생들이 친일행위로 본 것이라 단정했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 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글도 아니고 역사의 문제를 다루는 학자가 어떻게 기초자료도 조사하지 않고 함부로 글을 쓰는지 놀랍다.

학병의 문제가 아닌 일본군 장교 지원이 핵심 쟁점

학생들의 주장이 아님은 앞서 정정했고 비대위는 현씨가 학병을 나간 것을 친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 1945년 1월 20일 현승종씨가 학병을 나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기념해 1·20동지회도 결성돼 있는데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저명인사가 많다. 일본군 장교 출신 모임인 이 모임에는 정말 깜짝 놀랄만한 추앙 받는 인물도 떡하니 회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친일로 때려잡을 만큼 민족건대 구성원들이 무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인간적이지도 않다.(하긴 학생들이 반대했다고 한 교수가 굳게 믿고 있으니 가르치고 싶기도 했겠다.)

비대위가 문제를 삼은 핵심사항은 현씨가 학병으로 나간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학병으로 나간 이후 자발적 의사(대단히 중요한 팩트다)에 의해 일본군 장교에 자원했고 일본 황국의 장교로서 황국신민의 첨병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현씨는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팔로군과 교전까지 치룬 일본군 전투장교였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비대위는 현씨 개인의 과거에 대해 같이 아파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전력은 적어도 후학을 양성하는 기관의 대표로는 부적격이고 더군다나 설립자가 독립운동가인 민족사학에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음으로 이사장직을 수행할 권위를 상실했다고 판단해 사퇴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눈길을 걸어도 반듯하게 걸으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혹 그 발자국을 따라갈 후대를 위해서 말이다. 하물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상아탑 수장으로 일본군 소위계급장은 어울리지 않지 않는가?

한 교수의 주장처럼 ‘해방당시의 역사적 분위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니 오해 마시라. 사실이 이러함에도 한 교수의 팩트에 기초하지 않은 섣부른 오류 운운은 당시 이 싸움을 전개했던 12만 건국대 구성원에 대한 모독이고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이에 대한 한 교수의 해명을 기대한다.

명예훼손소송-일본군 장교는 친일이 아니다

현승종씨는 결국 이사장직을 사임한 후 비대위 대표 5명을 명예훼손혐의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사실 비대위와 현씨의 3년여의 법적공방의 핵심은 한 교수가 아는 것처럼 학병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인은 팔로군과 전투를 했지 독립군과 전투를 하지 않았다는 항변이었다. 그러나 우리 비대위는 각종 자료와 독립기념관 사료를 들이대며 팔로군에는 당시 독립군이 편제되어 있었고 따라서 현씨가 교전한 팔로군은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과 다를 것이 없음으로 현씨는 독립군과 교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간의 문제였다. 한 교수도 역사를 전공했으니 팔로군에 독립군이 배속되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가?

일본군 소위계급장을 달고 독립군이 배속되어있는 팔로군과 전투를 치른 사실이 도대체 친일이 아니라면 한 교수가 규정하는 친일의 범주는 과연 어디까지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도 3년간의 골치 아픈 명예훼손 재판투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안 사실이 아직까지 우리는 친일파에 대한 규정을 해놓지 않고 있는 관계로 친일과 항일이 애국과 매국이 모호한 교집합을 형성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부하게 되었다. 소극적 친일이니 적극적 친일이니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처벌의 문제에 앞서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으니 대한민국의 역사바로세우기는 참으로 요원한 것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역사의 사실 자체여부도 모호하고 심지어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번 한 교수의 예처럼 왜곡되어 있는 부분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혹한 처벌과 역사바로세우기

본 글과 약간 동떨어져 있지만 처벌에 대한 문제를 언급해보기로 한다. ‘친일파 청산이 꼭 가혹한 처벌을 의미하느냐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는 한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혹하고 가혹하지 않고는 두 번째의 문제다.

프랑스는 민족반역자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가며 독일치하 겨우 4년 동안 독일에 부역자를 사형에 처했는데 공식적으로 발표한 숫자만 1만1200명이고 비공식적으로는 1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다. 부역행위로 구속된 사람이 숫자로 매 10만명 당 프랑스 94명, 벨기에 596명, 네덜란드 419명, 노르웨이 638명이라는 자료가 있다.

우리는 일제치하 35년간(필자는 36년이 아니라 35년간으로 하루빨리 고쳐지기를 바란다. 햇수가 아니라 만으로 계산하자. 뭐 자랑거리라고 1년을 연장하는가?) 우리의 경우 친일을 한사람 누가 처벌받았는가. 가혹한 처벌은커녕 솜방망이 처벌도 하지 못한 이 마당에 가혹한 처벌을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한 가벼운 친일파 처벌도 친일파에 대한 개념 규정도 하지 못할 것이다.

친일파들이 친미파로 독재정권하의 기득권층으로 이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고 그 반대편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위치한 이 반역사적 현장에서 한 교수는 꼭 그렇게 주장을 해야하는지 묻고 싶다. 자신의 친일행위를 교묘히 왜곡하여 민족 지지로 행세하며 친일의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목불인견의 <조선일보>가 곡필을 일삼는 이때에 말이다.

필자는 일본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겨눴을 현씨가 민족사학의 수장으로 어울리지 않다고 주장해 적반하장 현실법정에서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지루한 3년여의 법적 공방과 시달림을 겪은 사람으로서 민족정기와 역사에 대한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한가지 희망을 엿본 것이 있다면 서울지검 동부지청의 한 젊은 검사가 친일파문제를 공부하고 싶다며 필자에게 몇 권을 책을 부탁할 때였다. 그 검사는 친일파에 대한 공부를 마치고 사실을 적시했더라도 현승종씨에 대한 명예를 훼손한 점은 인정되지만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임으로 무혐의라는 현명한 판정을 내린바 있다.

한 교수는 이 검사의 판단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물론 현씨의 항고로 고검에서 재수사를 지시해 동부지검의 다른 검사로부터 재수사를 받는 번거로움을 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친일파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렵다고 판단한 것은 재수사를 지시한 고검 검사는 현승종씨가 재직했던 대학의 법학과 제자였고 동부지검 재수사 검사는 현승종씨가 후원회장으로 있는 모 국회의원의 사위였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기득권층끼리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개인적 끈이 법적 판단의 결정적 영향으로 이어졌다는 속단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친일파의 문제는 이처럼 이미 기득권으로 세습된 카르텔을 깨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체험했다는 점만 언급하고자 한다.

한 교수의 역사쓰기에 기초자료 조사에 충실하기를 촉구하며 좀더 예리한 시각을 기대한다. 그것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이 글을 쓴 보람으로 충분하다.

덧붙이는 글 | 현승종씨는 자신이 쓴 사과문을 제시하며 그대로 게재하면 소를 취하하겠다고 주장해 필자를 제외한 네 명이 사과문에 서명했고 결국 그는 소를 취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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