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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국회에서 간신히 의결된 채상병 특검 법안이 또다시 거부권에 직면하고 있다. 현 정부 들어 벌써 열 번째 거부권이 행사될 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양곡관리법부터 노란 봉투법, 방송관련법, 쌍특검법, 이태원 특검법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뿐만 아니라 향후에도 이 거부권은 계속될 전망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과연 정당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제도란 행정부가 의회를 견제하는 권력분립 원칙에 부합하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제도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이라는 제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시스템에서 국민들은 선거를 통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들은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국회와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각각 입법권과 행정권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다. 동시에 국회와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원칙인 권력분립의 원칙에 의하여 대등한 권한을 갖는다. 국회와 대통령은 각각 선거를 통해 부여된 민주적 정당성의 비중이 동일하고, 특정한 민주적 정당성이 다른 민주적 정당성보다 우월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

현행 대통령 법률안 거부권, 미국 제도를 잘못 베낀 제도
 

지금의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미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불행한 것은 세밀하게 살피지 못했고, 그렇게 하여 중대한 결함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우리와 달리 입법권을 의회가 독점하고 행정부의 법률안 제출 권한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대통령의 법률 거부권이었다. 그로써 입법권을 독점한 의회를 견제할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국의 경우와 분명하게 상이하다. 우리나라 행정부는 법률안 제출 권한을 갖는 동시에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더구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회가 다시 의결하기 위해서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라는 의결정족수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지켜온 바와 같이 국회의 재의결은 사실상 봉쇄된다.

결국 대통령은 법률안 거부권에 의하여 국회 위에 확실하게 군림할 수 있게 되고, 국회와 대통령 간에는 명백한 비대칭 상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제왕적 대통령제'는 늘 관철되어 왔다. 이 거부권에 의해 대통령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현 정부가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 제도를 잘못 베낀 결과다.

거부권에 대한 국회 재의결 정족수 2/3, 입법 무력화 '독소 조항'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분명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거부권과 관련하여, 프랑스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프랑스는 행정부가 법률안 제출 권한이 있고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도 주어진다. 여기까지는 우리와 동일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거부권은 극히 제한적으로 행사될 뿐이다. 1958년 이후 지금까지 법률안 거부권의 발동은 겨우 세 차례에 불과하다. 더구나 프랑스는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때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도록 하는 우리와 달리 단지 과반수로 의결되는 재의결 절차를 거쳐 대통령의 거부권을 쉽게 '거부'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에는 아예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이 없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위,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 거부권거부전국비상행동, 전국민중행동, 전국비상시국회의 회원들이 4월 3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윤석열2년, 거부권 거부대회 개최를 위한 각계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권의 거부권 행사는 민생을 외면하고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행동이었다"라며 "22대 총선에서 드러난 국민의 뜻을 받들 것"을 촉구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위,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 거부권거부전국비상행동, 전국민중행동, 전국비상시국회의 회원들이 4월 3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윤석열2년, 거부권 거부대회 개최를 위한 각계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권의 거부권 행사는 민생을 외면하고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행동이었다"라며 "22대 총선에서 드러난 국민의 뜻을 받들 것"을 촉구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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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은 지금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하고 입법부와의 권력분립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심각한 위협요인이다. 그러므로 법률안에 명백한 위헌 요소가 있는 경우에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등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에 제한을 가하는 입법이 적극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재의결 정족수는 2/3가 아니라 과반수

특히 거부권에 의한 국회 재의 시 3분의 2 이상의 의결 정족수를 규정한 헌법 규정은 현 정부 들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국회의 입법 권한에 대한 원천적인 봉쇄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차후 헌법 개정 시 이 조항은 반드시 폐지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행정부의 법률안 제출 권한이 없는 미국에서 대통령에게 의회 재의결에 3분의 2 의결정족수를 규정하는 법률안 거부권을 부여하는 것은 의회 권력에 대한 대통령의 견제 수단으로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과 같이 행정부가 법률안 제출 권한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3분의 2 재의결 정족수를 규정함으로써 국회의 입법권을 사실상 무력화시킬 수 있는 법률안 거부권을 부여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독소 조항'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행정부가 법률안 제출권을 지니면서 대통령 거부권은 극히 제한적으로 행사되며, 동시에 대통령의 거부권에 대한 의회 재의결 정족수는 과반수에 의한 의결이라는 일반적 의결 절차를 준용하는 프랑스의 제도가 우리에게 보다 부합된다고 판단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와 같은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제도는 전 세계에 우리밖에 없다.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이러한 거부권은 당연히 제한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 민주주의가 살 수 있다.

태그:#법률안거부권, #채상병특검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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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 박사,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하였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이상한 영어 사전>,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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