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밤마다 대리운전을 하러 나간다는 것이 부끄러울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굉장히 씩씩할 리도 만무하다. 관성에 몸을 떠맡기듯 절실함 반 용기 반으로 뛰쳐나갈 뿐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정도의 외로움은 기본값으로 따라온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나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콜을 잡아도, "네 대리 부르셨죠 10분 안에 가겠습니다", 이 말을 못하겠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말하거나, 내려서 뛰어가면서 하는 편이다. 그만큼 내 안에는 뭔가 위축된 심리가 있다는 것을 반영해주는 듯하다.

어떤 날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하루 종일 마음이 시달린 날이었다. 조용히 운전을 하면서 마음을 좀 달래줄 수 있기를 바라며 첫 콜을 잡고 나왔다. 1.5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라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달렸다.

급한 것과 빠른 것은 다르기에 항상 안전을 추구하며 달린다. 사람들이 제법 오가는 길을 가야했기에 자전거 도로를 통해서 서행을 하던 중, 조금 앞에 어떤 아주머니가 걸어가고 계셨다.

미리 피하실 수 있도록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벨을 울렸다. 미동이 없었다. 몇 번을 더 울리고 울렸는데도 전혀 인식을 못하셔서 속도를 팍 줄인 다음에 옆으로 슬쩍 지나갔다. 순간 그 아주머니께서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결코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사과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마음이 종일 시달린 날이라 어쩐지 더 낮은 마음으로 누구에게든 정중하게 하고 싶어서 " 죄송합니다, 놀라셨죠" 하고 사과를 했다.

그 순간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던, 아마 남편으로 예상되는 분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야, 이 XX 새끼가 뒤질래?" 황당했다.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첫 번째는 내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고 – 잘못이라고 굳이 따지면 자전거 도로로 버젓이 걸어가시던 그 아주머니가 잘못이다 - 두 번째는 내가 어떤 큰 잘못을 했다고 한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XX새끼라고 어떻게 욕을 할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속상함
 속상함
ⓒ 픽셀스

관련사진보기

 
서러움인지 화인지 모를 것이 범벅이 되었다. 그 아저씨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술에 취한 걸까, 아니면 이 분도 나처럼 마음이 종일 시달린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길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런 욕을 해낼 수가 있는 걸까. 

"아저씨, 제가 왜 XX 새끼인가요? 저는 저희 부모님의 소중한 아들이고, 한 집안의 가장이고, 그래서 지금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대리운전을 하러 나온 건데,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한테 욕을 하시나요? 아저씨도 자녀가 있으신가요? 그러면 그 자녀가 이런 욕을 먹으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아니면 아내분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이 넘쳐서 제가 행여나 위협이 된 것 같아서 그런 욕을 하신 걸까요? 그걸 아내분이 원하셨을까요? 감격적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참 멋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저한테 사과하세요. 저는 XX 새끼가 아니에요."

5초 정도의 순간 동안에 빠르게 스쳐지나간 상상이었다. 뜻 모를 광기에 휩싸인 눈빛을 뒤로 하고 콜을 부른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해버렸다. 손만 대면 펑 하고 터질 것처럼 눈물이 가득 찼다.

여기에 첫 번째 콜을 부른 손님이 진상의 속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는 이 밤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대리 부르셨죠?"

다행히 대리를 부른 손님은 내가 여태까지 경험해본 분들 중에서 가장 젠틀 하신 분이셨다. 젠틀을 넘어서, 그야말로 나를 확실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의자 편한 대로 조절 하세요. 온도가 적절한가요? 운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 중에도 깜짝 놀랄 정도로 모든 걸 나에게 물으셨다. 제가 전자 담배를 피려고 하는데, 창문을 열고 피면 냄새가 들어오진 않을 것 같은데 잠시 피워도 괜찮을까요? 네네 그럼요, 고맙습니다. 라디오 소리가 괜찮나요? 제 취향에 맞는 채널인데, 원하시면 끄고 가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도 좋습니다.

현금으로 3만 5천원 맞죠? 미리 드릴게요 여기 있습니다. 신호등이 멈추면 한번 세어보세요, 제가 세어보고 드리긴 했는데 그래도 다시 한번 확인 해 보세요. 제가 먼저 내리겠습니다, 주차 하실 때 편안하게 천천히 하세요.

여기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시나요? 가까운 역은 이쪽으로 나가셔서, 이렇게 가시면 나옵니다. 버스 정류장은 저쪽으로 나가시면 되고요. 오늘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세요, 라고 말하시며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하셨다.
 
인사
 인사
ⓒ 픽셀스

관련사진보기

 
극강의 온도차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나를 완벽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분을 만나서 였을까. 분노로 견고하게 얼어붙은 마음이 봄처럼 사르르 녹아버렸다. 나도 고개를 바짝 숙여서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인사를 하고 "고맙습니다" 했다. 그 말 속에, 제가 오늘 마음이 시달리는 날이었는데, 또 오는 길에 기분 나쁜 일도 있고 해서 어렵기까지 했는데, 저에 이런 식으로 대해주셔서 마음에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라는 말을 감췄다.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길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저건 억지로 하라고 해서 되는 게 결코 아니라 그야말로 몸과 존재에 배어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데. 다른 의미로 쫓아가서 대화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떤 걸음을 걸어오셨냐고, 도대체 당신은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시냐고, 나도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꼭 되고 싶다고.

몹시도 마음이 시달렸던 날. '사람'을 만났던 날. 태도의 위력을 목격한 날. 돌아오는 길에 많이도 울었던 날. 달이 유난히 밝았던 날. 아무나 붙잡고 오늘 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그 날.
 
달
 달
ⓒ 픽셀스

관련사진보기


태그:#김대리, #달려라김대리, #대리운전, #대리기사, #사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부분 당연스럽게 '내'가 주체가 되어 글을 쓰지만, 어떤 순간에는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나도 '생명체'이지만, 글 역시 동족인 것 같아서, 꿈틀 거리며 살아있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렇게 쓰여지는 나를, 그렇게 써지는 글을 사랑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