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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통지를 받는 것은 언제나 슬프다. 2020년 1월 15일에는 사전 예고도 없이 3줄짜리 해고통지서만 받았다. 이번에는 4월 24일에 구두로 사전 통고까지 받았다. 법정관리 신청 중에는 직원 해고를 하려면 법원 허가를 받아야 한다. 법원 승인이 나면 30일 후 자동 해고된다. 계약직인데다 필수 부서가 아닌 나는 우선 구조대상자이다. 구조대상명단은 사후 부당해고 분쟁을 예방하고 법원 승인을 받기 위해 노사협의회를 통해 만든 기준에 따라 정해졌다. 절차적 공정성이 갖추어졌다고 느껴서인지 4년 전보다 쉽게 수용했다.  

나를 포함해 직원들 대부분은 신문기사로 회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주주의 판단과 결정으로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회사는 운영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다. 2개월째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고 4대 보험도 미납한 상태다. 5월에 일부 자금이 들어와도 미납한 4대 보험과 세금을 우선 납부해야 한다. 법정관리를 위한 회생 계획안 통과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직원들 월급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어 이번 달 월급도 받기 어렵다고 들었다. 

급여가 지연되면서 고3 수험생을 둔 아빠는 공부하는 아들과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아내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월급이 안 나온다는 말을 하지 않고, 모아 온 비상금을 털고 이곳저곳 대출을 받아 회사를 대신해 월급을 입금하고 있다. 두 달을 우격다짐으로 해결하고 이번 달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 중이다. 생활비와 아파트 대출이자를 내기 위해 퇴직금을 수령을 위한 자발적 퇴직자도 늘고 있다. 직원들 월급이라도 줄 수 있는 자금 여력을 만들수 있었지만, 당시 임원진을 믿지 못한 대주주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재무팀에서는 아무런 대비를 할 수 없었다.

회사를 이렇게 만든 전임 CEO는 주요 부서 팀장을 거쳐 현장소장까지 경험한 부장에서 일약 CEO가 된 전문 경영인이다. 기업회생 직전 이사회의 결의로 공식 해임되었다. 야심만만한 40대 후반의 CEO는 2019년 취임 후 탄탄한 재정적 기반을 가지고 공격적인 경영을 했다. 공공수주와 민간수주의 균형적인 성장을 추구하면서 1조원 매출의 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개발사업팀을 중심으로 2021년부터 본격적인 민간 부동산 개발 사업(PF)에 뛰어들었다. 2021년 한 해에 3건의 PF 사업을 수주하면서 2022년도 회사 매출은 기존 일천억원에서 3배가 뛰어 3천억원 이상으로 늘었다. 하지만 계약했던 3건의 PF 중 2건이나 계약기간을 맞추어 준공하지 못하면서  회생 절차에 돌입하면서 법정관리를 신청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2022년 전면전으로 확대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시멘트 생산에 필요한 러시아산 유연탄 공급을 어렵게 했다. 시멘트 부족 사태가 두 차례나 일어났고, 가격도 급상승했다. 최근 3년간 레미콘은 34.7%, 시멘트는 54.6%가 상승했다. 철근 가격도 같은 기간 덩달아 급상승했다. 2020년 1톤당 68만 5000원이었는데 2021년에는 95만원으로 올랐다. 인상폭이 39%나 된다. 최근 3년간 64.6% 올랐다. 자재비가 상승하면서 건설 원가가 급상승하니 늘어난 매출은 오히려 손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재 수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니 공사 기간을 계약기간 안에 맞출 수 없었다. 계약기간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면 지연된 만큼 보상금을 내야 하는 지체상금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그리고 PF 사업에 투입된 원리금(원금+이자)을 시공사가 갚아야 하는 강제적인 채무 인수도 해야만 한다.

채무인수까지 1700억 원 이상을 투입해야 하니 외적 요인 때문에 법정관리를 신청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실제 여러 건설사가 공사비가 상승 압박으로 개발사업 이해관계자들과 공사비 분쟁과 갈등이 커지면서, 여러 건설 현장이 멈추는 등 몸살을 앓고 있다. 업계 16위인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고 준공 후 미분양이 늘면서 2019년 이후 가장 많은 건설사가 지난 1분기(1~3월)에 부도를 맞았다.

하지만 자연재해와 같은 외적인 이유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다른 진실을 볼 수 있다. 2021년 계약 당시, 팀장급 엔지니어들은 개발사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계약조건을 맞출 수 있는 시공 능력을 갖추지 못한 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 소장 중에는 계약된 현장을 보고 이런 계약은 하면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한 해에 한 건도 쉽지 않은 개발사업이 2021년 한 해에 3건이나 동시에 수주가 되었고, CEO의 결정과 함께 이사회를 통과하면서 무리한 사업이 진행됐다. 무리한 일정으로 문제들이 생겨나면서 떠나는 직원들이 늘고 인사이동도 많아졌다. 그리고 2년 후 지금 법정관리를 신청 중이다. 

CEO의 결정을 조직 내부에서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CEO의 판단과 결정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은 대주주의 몫이다. 급여를 받는 CEO는 대주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기 떄문이다.  따라서 이사회만이 무리한 개발사업에 대한 판단을 미룰 수 있고 결정을 바꿀 수 있었다.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오늘의 결과를 예방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는 이사회였다. 그러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왜 그런 것일까? 첫째는 개발사업에 대한 무지로 최소 2년 후에 나타날 보상을 제대로 예측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2년 후의 보상을 오늘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잘못된 계약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큰 계약일수록 컨설팅이 필요하고 자문이 필요하고 다각도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소통 채널과 소통 시스템이 살아 있도록 만들어서 돌다리도 두드려보아야 한다. 견제와 감시를 할 수 있도록 최소한 익명으로 투서라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했지만 없었다.

둘째는 시스템보다 관계에 의존한 역동이 문제였다. 감시와 견제 역할을 해야 하는 이사회의 이사나 감사가 CEO와 인간관계로 끈끈해져 있으면 견제와 감시 기능이 약화한다. 사업의 규모가 클수록 관계된 사람이 많을수록 사람은 믿고 신뢰하지만 그 사람의 판단은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데 끈끈한 인간관계는 그런 시스템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외부 전문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록 집단지성이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단단한 소통채널을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외이사를 세우고 기업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이사회에서 견제와 감시 역할을 강화하는 것은 시대적인 추세이다. 2030년부터 모든 상장기업에 의무적으로 적용되는 ESG 공시에서 지배 부문의 핵심 내용은 의사결정의 투명성과 CEO에 대한 견제와 감시 기능이다. 이사회 내에서 견제와 감시 기능이 시스템으로 살아 있지 않으면 기업을 믿고 투자한 투자자가 손해를 보고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고통받고, 고객들이 피해를 본다.

후임 CEO이자 기업회생절차의 관리인은 전임 CEO를 비판하고 문제라고 하지만 전임 CEO는 불법적인 거래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절차적으로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에 결과만으로 그에게 모든 탓을 돌릴 수는 없다. 건설 경기가 활성화된 시점에서 지나친 낙관과 확신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억압한 것은 문제지만 이사회를 거쳐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바로 잡고 견제와 감시를 해야 하는 역할은 이사회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견제와 감시 기능을 해야 할 이사회가 관리 감독이라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제탓을 해야 한다. 최소한 해당 부문 팀장들의 목소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채널이 살아 있어야 했고, 전문가인 현장 소장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통 채널이 살아 있어야만 했다. 이사회의 견제와 감시 기능은 CEO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자와 기업에 소속된 직원들과 가족, 그리고 고객들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지키는 고귀한 책임이다.

오늘까지 근무한다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 서로 인사를 나눈다. 조직에서 만났지만, 또 다른 가족이 되었던 사람들이 떠나간다. 시스템 안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경영진의 무리한 결정과 이를 견제하고 감시하지 못한 이사회가 져야 할 책임을 지고 떠나간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 직원들의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괸리인의 반복적인 호소는 옳다. 떠나는 직원들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회사를 살리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무겁고 딱딱하고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수고하다 떠나는 함께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어머니 같은 리더십을 그리워해 본다. 떠나는 직원들 모두가 더 잘 살기를 기원한다.

태그:#지배구조, #견제와감시, #이사회, #법정관리, #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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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대학교 교육학 석사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경영학박사 한양대학교 컴퓨터소프트웨어학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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