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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핑계 삼다보니 어린이날이 순식간에 스킵되었다. 마침 둘째도 아프고 해서 더더욱 무엇을 할지 상상력이 메말라 버린 것도 큰 몫을 했다. 첫째에게 어린이날 비가 와서 슬프지 않냐고 물으니 '슬프지 그래도 어린이날이잖아'라는 근사한 대답을 들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아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포켓몬 가오레 게임이라도 실컷 시켜 주려고 게임기가 있는 롯데월드 몰과 근처에 있는 홈플러스로 향했다. 아이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있는 순댓국 집에 들렀다. 전에 아이에게 맛이 없다고 한 걸 기억하는지 "아빠 여기 전에 진짜 맛 없다고 했으면서 왜 가는 거야?" 묻기에, "내가 그때 느꼈던 맛 없음이 진짜 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테이블에 앉아서 순댓국 하나를 시켜서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나와 아이를 보는 종업원들의 시선이 마치 <우동 한 그릇>에 나오는 풍경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전에는 분명히 맛이 없었는데 오늘은 맛 이라는 게 있었다.

다대기를 빼서 인가, 아니면 같이 나눠 먹어서일까, 비가 오는 날이면 감출 수 없는 순댓국 맛의 증폭인가, 신기했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입에 물고 천천히 걸었다.

문득, 이런 시간은 언제나 참 좋구나 싶었다. 새삼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시간들일 텐데, 지금 네가 발 디디고 사는 이 세계는 참 퍽퍽하구나가 체감 되었다. 입시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기에, 그게 무시 될 수는 없어서 나날이 늘어가는 공부들 때문에 평소에는 이렇게 고요한 시간에 놓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 부자
 아버지와 아들, 부자
ⓒ 픽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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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자라날수록 행복해지기가 참 쉽지 않다는 것이 어지러웠다.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뭘 해줘야 하나, 지금처럼 순댓국 한 그릇에, 아이스크림 하나에, 비가 오는 거리를 함께 우산을 쓰고 걸음에 행복해 함이 실시간으로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아이는 자면서 어린이날 선물로 닌텐도를 사달라고 했다. 그건 아직은 사줄 수 없다고 했다. 왜 못 사주냐고 해서, 그건 꽤 비싸기 때문에 지금은 사줄 수 없지만 아빠가 올 해 열심히 일해서 내년에 꼭 사줄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닌텐도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부자냐고 물었다. 꼭 부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럼 부자가 되면 엑스박스도 사고 닌텐도도 사고 다 살 수 있냐고 묻길래, 부자는 원하는 걸 다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걸 사는 사람이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심술궂게 던져버렸다.

그러자 아이는 갑자기, "근데 아빠 우리도 부자야"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의 속뜻을 생각했다. 마음이 부자라는 건가, 아니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면서 정신 승리하자는 건가, 무슨 뜻일까, 모르겠으면 그냥 물어보자. 아이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비 부(父), 그리고 스스로를 가르키며 아들 자(子), 우리도 '부자'잖아."

순간 하루 종일 밖에서 오던 비와 더불어 마음 속에도 오던 비가 뚝 하고 그쳤다. 환하고 따스한 햇살이 구석구석 비추었다. "그러게, 우리 진짜 부자 맞네"라고 말했다. 그 부자만 부자가 아니었구나. 부자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네 하면서 아이를 끌어안고 뽀뽀를 했다. 내년엔 닌텐도 꼭 사줄게.

태그:#부자, #어린이날, #어린이, #부자관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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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당연스럽게 '내'가 주체가 되어 글을 쓰지만, 어떤 순간에는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나도 '생명체'이지만, 글 역시 동족인 것 같아서, 꿈틀 거리며 살아있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렇게 쓰여지는 나를, 그렇게 써지는 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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