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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맞아 딸아이와 타카하타 이사오 전시회를 다녀왔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우리에게 익숙한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 등을 그린 작가로 유명하다. 그중 주근깨 투성이에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빨강머리앤을 좋아한다. 팬으로서 기대감과 설렘을 안고 입구에 들어섰다.
 
타카아타 이사오 전시회 대형 포스터
▲ 타카하타 이사오 전시회  타카아타 이사오 전시회 대형 포스터
ⓒ 엄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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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는 타카하타 이사오 전시회를 알리는 대형 포스터와 그의 작품들과 함께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이날을 맞아 인파에 차례를 기다리다 딸아이와 기념사진을 찍고 부푼 마음으로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맨 처음 보여진 것은 만화가 아닌 작가가 직접 손글씨로 쓴 오래된 원고지들이 전시 되어 있었다. 일본어로 되어 있어 아쉽게도 뜻은 알지 못했지만, 손글씨로 빼곡히 쓴 많은 원고지에서 말하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오랜 작가의 고민과 노고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시는 그의 유명 작품 만화를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작품들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나 애니매이션을 만들기 전 글이나 그림 등을 정리해보고 배치해보는 레이아웃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된 이야기 등 유익한 노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노트들이 작가의 작품들을 면밀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빨강머리 앤> 작품이 기대만큼 많이 전시되어 있지는 않아 아쉬웠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이 본 것은 만화가 아닌 작가의 원고와 노트였다. 그중 놀라웠고 존경스러웠던 것은 앤이라는 한 인물의 성장 과정을 만들기 위해 각각의 사건이 몇 살 몇 달 무렵에 일어난 일인지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자세히 정리한 일이었다. 일상생활을 축으로 성장해 가는 주인공과 함께 드라마를 그리기 위해서는 이런 설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세상이 내게 뭘 주는 지가 아니라, 네가 세상에 뭘 주는 지가 중요해요." - <빨강머리 앤>
 
전시장을 나온 우리는 광화문 광장을 지나 청계천으로 향했다. 종로는 젊은 날 내가 가장 많이 다녔던 곳이다.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 우울할 때는 종로의 있는 단성사 피카디리극장을 찾아 홀로 영화를 보며 마음을 달랬다.
 
청계천 입구
▲ 청계천 입구 청계천 입구
ⓒ 엄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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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딸아이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추억의 장소를 거닐어 보기로 했다. 주말을 맞아 청계천은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나온 사람들을 인산인해를 이뤘다. 도심에서 즐기는 시원한 폭포와 시냇가는 외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잘 정돈되어 있었다.
 
청계천에 마련된 야외도서관으로 책읽는 맑은 냇가
▲ 서울야외도서관 청계천에 마련된 야외도서관으로 책읽는 맑은 냇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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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책 읽는 맑은 냇가'란 이름으로 마련된 야외 도서관은 시냇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며 책도 볼 수 있는 이색적이고 건전한 최고의 주말 힐링 포인트였다.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 <빨강머리 앤>

청계천 다리 밑 돌계단에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흐르는 냇물 소리를 들으니, 복잡하고 힘들었던 한 주가 씻겨 내려가는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때 젊은 날, 너무 좋아했던 영화 '접속'의 주제곡 Sarah vaughan의 'A Love's concerto'가 흘러나왔다.
 
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쉴 수 있는 청계천 다리밑
▲ 청계천 다리밑 더운 여름도 시원하게 쉴 수 있는 청계천 다리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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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에 있던 피카디리 극장에서 너무나 재밌게 보고 나왔던, 가진 거라곤 오직 젊음이 전부였던 20대 때의 나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설레었고, 두근거렸다.

그때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과연 나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지 너무나 힘들고 막막하기만 했던 때라 지겨워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었는데... 돌이켜보니,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젊음이란 무기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딸아이가 그린 사랑스런 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딸아이가 그린 사랑스런 빨강머리 앤
ⓒ 엄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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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타 이사오 작가는 자신의 세 번째 작품인 tv시리즈로 <빨강머리 앤>을 선택했을 때, 모든 인물들을 조금 떨어진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켜보는 시점을 가지고 점차 성장해가는 앤을 그렸다고 한다.

청계천 길을 따라 걸으니 어느새 종각에 다다랐다. 길가에 서서 종로 길 끝을 한참 바라보았다. 마음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걸어온 시간만큼 오늘 주변의 길들은 달라 보였다.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심지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내가 지켜야 하는 가족이 생겼다. 주근깨 투성이의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했던 나도, 앤처럼 성장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당차게 나아가는 수밖에 내 인생은 주인공은 바로 나니까.
 
"내일은 아무 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해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빠요. 저는 제 인생의 주인공이 될 거예요. 저는 저를 선택했어요. 그럼 절대 실망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 - <빨강머리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타카하타이사오, #빨강머리앤, #청계천, #영화접속, #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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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공부방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강사입니다. 브런치와 개인블로그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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