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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어린이날 연휴에 아이와 함께 독립운동가이고 승려이고 시인인 만해 한용운의 생가지를 다녀왔다. 이곳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 길 83에 위치해 있다.   

홍성 만해 문학체험관
 
충남 홍성에 있는 만해 문학 체험관에서는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독립 운동에 관한 내용과 그의 시를 만날 수 있다.
▲ 만해 문학 체험관 충남 홍성에 있는 만해 문학 체험관에서는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독립 운동에 관한 내용과 그의 시를 만날 수 있다.
ⓒ 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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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입구에 있는 흰색 건물이 '만해 문학체험관'이다. 오른쪽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동상이 있었다. 4일은 5월 초임에도 한여름 날씨를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바깥과는 다른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입구에 해설사분이 계셔서 담백한 입담으로 한용운 선생님에 대해 들으며 관람할 수 있었다.   
   
'생가'가 아니고 '생가지'인 이유는 예전에 6가구 정도가 이곳에 누에를 치며 살았다고 한다. 문학관을 짓기 위해 군에서 마을 전체의 땅을 매입해서 비슷하게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갑자기 학창 시절 외웠던 '님의 침묵',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 등 한용운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그분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독립운동을 하시는 분이 이렇게 부드러운 언어로 시를 쓰다니 의아했는데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조국을 '님'으로 표현했다고 하니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문학체험관 안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와 삶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  
   
1879년 8월 29일 한용운 선생은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몰락한 사대부였지만 항상 아들에게 의인, 걸사의 언행을 가르치고 또한 세상 형편, 국가사회의 모든 일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런 말들을 듣고 어린 한용운의 가슴에는 이상한 불길이 일어나고 자신도 그 의인, 걸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숭배하는 생각이 났다고 한다. (<삼천리> 42호 1933.9 기고문에 소개) 

어릴 때부터 총명한 한용운은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 <통감>, <서경>을 독파하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6세부터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는 일찍 결혼하는 풍습이 있어서 14세 때 전정숙과 혼인을 하여 얼굴도 모르는 아들을 두었다. 만해 자신도 나중에야 아들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그 아들의 이름은 한보국이다. 이후 장성한 아들은 선학원으로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냉정하게 자신의 혈육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의무적으로 한 결혼이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일제의 탄압 속에서 위험한 독립운동을 하여서 그랬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한용운 선생은 결혼은 했지만 위기에 빠진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 가족을 두고 집을 나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였다. 같은 시기 부친인 한응준은 1984년 12월 5일 참모관에 제수되어 동학 농민 운동 진압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압 도중 전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이 한용운 선생이 출가한 원인으로 짐작되고 있다고 한다.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하였고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였다. 1918년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하여 불교의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였고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3장을 첨가하였다.

1933년 그의 나이 54세에 당시 진성당병원의 간호사였던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딸 한영숙을 낳았다고 한다. 이들 가족은 성북동에 북향집으로 유명한 심우장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1940년, 그의 나이 66세에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셨다.     
     
독립운동과 투옥     
 
홍성 만해 문학체험관에 전시되어는 한용운 선생의 옥중투쟁 3원칙이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옥중투쟁 3원칙 홍성 만해 문학체험관에 전시되어는 한용운 선생의 옥중투쟁 3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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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였다. 3.1 만세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넘겨지고 징역 3년 형을 선고받는다. 이때 변호사와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였다고 한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을 가로막는 어떠한 것도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아래 그 앞부분을 적어보았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후략)


한용운 선생 생가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 위치해 있다.
▲ 홍성 한용운 선생 생가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 318번길 83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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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니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조형물이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얼굴이 있는 비석과 조형물이 있었다. 그들의 넋을 기리듯이 바람개비가 미풍에 돌아가고 있었다.

생가는 조그만 초가집이었다. 예전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이곳에서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위대한 뜻을 세울 수 있었다니 초가집에선 하루도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위한 세 가지 체험이 단돈 5000원   
 
책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 태극기 스트링아트체험이 5,000원이었다. 거기에 특산품인 광천김까지 담아주셨다. 체험은 첫째 셋째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된다고 했다.
▲ 내포문화진흥원에서 준비한 아이들을 위한 체험 책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 태극기 스트링아트체험이 5,000원이었다. 거기에 특산품인 광천김까지 담아주셨다. 체험은 첫째 셋째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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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는 내포문화진흥원에서 어머니들이 '만해생가 가볼만해'라는 제목으로 아이들에게 기념품을 만드는 행사를 하고 계셨다.

책 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 태극기 스트링아트체험이 5,000원이었다. 거기에 특산품인 광천김까지 담아주셨다. 체험은 첫째 셋째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된다고 했다.     

이날은 우리 가족 모두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다. 아이는 무엇을 느꼈는지 스트링아트가 반복해서 실을 거는 활동이라 조금 지루했을 텐데도 참가한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태극기를 완성하였다.

사당 뒤쪽 소나무 숲에는 멋진 시들이 적혀 있었다. 천천히 짙은 향을 맡으며 시를 읽어 내려가기 좋았다.
 
스트링아트, 책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가 단돈 5,000원
▲ 아이들이 할수 있는 체험 스트링아트, 책만들기, 바람개비 만들기가 단돈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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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한용운, #홍성, #만해문학관, #한용운선생생가지, #홍성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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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아름답고 재미난 이야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오고가며 마주치는 풍경들을 사진에 담으며 꽃화분처럼 바라보는 작가이자 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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