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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 tvN <프리한19>에 소개된 동풍신
O tvN <프리한19>에 소개된 동풍신 ⓒ O tvN
 
3·1운동 때 수많은 여성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직업과 신분을 안 가리고 누구나 항일투쟁의 선두에 섰다. 그중에 10대 여성들도 많았다. 함경북도 명천군의 동풍신(董豊信, 1904~1921년)도 그런 분들 중 하나다. 유관순보다 두 살 어렸다.

동풍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8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다. 1919년 3월 15일 명천군 만세시위 때 군중을 감동시키는 용맹을 발휘한 일로 유명하다.

명천군에서는 14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진원지는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이다. 1971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엮은 <독립운동사> 제2권은 이렇게 보고한다.
 
"14일 오전 11시, 화대동 거리에는 집집에서 쏟아져 나온 5천의 대(大)군중이 물결쳤다. 이 숫자는 일제의 공식 기록으로서 함경북도 내 시위 중의 최대 인파였다."
 
 
 명천군 위치.
명천군 위치. ⓒ 위키백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사실장 등을 역임한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의 < 3·1운동사 >는 15일부터의 명천군 시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괄한다.
 
"3월 15일 화가면 화대동에서 5천 명의 군중이 시위를 전개한 후 3월 16일 아간, 17일과 19일 보촌동, 18일 운사장, 21일 운만대, 4월 8일과 9일 우동동, 11일 양화, 14일 산성동과 고성동에도 파급되어 갔다. 화대동에서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에 밀려가 친일 면장을 구타하고 또한 화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그들과 충돌·항쟁하고 15명 이상의 살상 희생자를 내었다."
 
친일 면장을 구타했다고 했다. 이유 없는 구타가 아니었다. 면장이 시위대를 자극하는 망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위의 <독립운동사>에 소개돼 있다.
 
"이번(3월 14일)에는 박승룡·김성련·허영준·김하용 등이 주동이 되었다. 다음 날인 3월 15일, 이들은 화대장터에 모인 5천여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하가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이들은 그동안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면민들을 괴롭혔던 면장 동필한(董弼漢)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의 대열에 참가하여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다."
 
동풍신에 이어 희귀 성인 동씨가 또 등장했다. 면장도 동필한이었다. 명천군은 광천 동씨의 집성촌이었다. "너도 조선 사람이니 함께 만세를 부르자"는 군중의 요구를 듣고도 동필한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조선총독이 임명한 면장이니 총독의 지시가 없이는 만세를 부를 수 없다." - <독립운동사> 제2권.
 
그 말에 "격분한 군중들은 면장에게 침을 뱉고 이리저리 쳤다"고 한다. 이때 시위대 리더 중 하나인 김성련이 칼을 빼서 면장을 찌르려 했다. 그러자 좌수(座首, 자치기구 대표) 현기율이 가로막아 동필한이 헌병분견소로 피신하게 되고, 동필한을 따라 시위대가 분견소로 몰려가다가 기마 헌병대의 발포로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중경상을 입게 됐다. 즉사한 5명 중 한 분이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다.

동민수는 농부였지만, 늘 누워 있었다. 몸이 불편해서 눕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14일 시위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니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분노를 표했다. 그래서 1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질 당시, 동풍신은 시위 현장에 없었다. 집에 있었다. 아버지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동민수)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즉시 지명동 그의 집에 전하여졌다. 그에게는 16세(만 15세) 된 풍신이라는 딸이 있었다. 둘째딸이었던 그는 키가 훤출하고 눈동자가 빛나며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 소녀였다. 15일 아침 병상을 박차고 나가는 아버지의 결연한 표정에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끼기는 하였으나, 그에게 전하여진 화대동의 비보는 너무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났다. 그는 소복하고 머리 풀어 호곡한 다음,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리라 결심하고 화대동으로 달려갔다." - <독립운동사> 제2권.
 
동풍신이 장터에 갔을 때는 이미 시위가 소강 국면에 접어든 뒤였다. 기마헌병대의 발포로 사상자들이 발생하면서 시위대가 골목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동풍신이 시위대에 나타났다. 시위대가 숨어 있는 상태였으니, 장터 마당에서 아버지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동풍신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참 동안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다가 궐연히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목이 찢어들 듯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소 앞으로 나아갔다." - <독립운동사> 제2권.
 
텅 비다시피 한 장터에서, 15세 여성이 소복 차림에 머리를 풀어헤친 채 눈물을 흘리며 홀로 만세를 외쳤다. 이 장면은 골목에 숨어 있던 시위대를 전율시켰다.
 
"그동안 헌병의 발포로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던 군중들도 동풍신의 의기에 감동되어 다시 시위 대열을 정돈하였다. 이때 군중들 사이에는 누가 발설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면장이 일병을 불러들였다는 말이 나돌았다. 동풍신을 위시한 군중들은 다시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이들은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면장 집과 회계원 집도 불태워버렸다." - <독립운동사> 제2권.
 
뒤늦게 출현해 시위대 리더가 된 동풍신은 면사무소 방화 때문에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 당시 상황이 친일문제 전문가이자 국무총리 비서실장인 정운현의 <조선의 딸들, 총을 들다> 동풍신 편에 설명돼 있다.
 
"일본 경찰은 시위를 이끈 동풍신을 '미친 소녀'라며 총을 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놔둘 수 없다고 판단해 현장에서 체포했다. 그 후 함흥형무소에 수감돼 재판을 받던 그는 '만세를 부르다 총살된 아버지를 대신해 만세를 불렀다'고 당당히 말하고는 온갖 고문에도 항쟁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일경이 미친 소녀로 봤던 것은 소복 차림과 머리 상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외양 때문에 동풍신은 시위 현장에서 피살을 피할 수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 ⓒ 김종성
  
동풍신은 함흥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다. 이때 경찰이 회유 작전을 개시했다. 그의 전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동풍신은 생명이 약해지다가 결국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화대동의 화류계 출신 모 여인을 그의 감방에 넣었다. 그 여자는 일인이 시키는 대로 동풍신에게 이런 거짓말을 했다. '풍신아 너의 어머니는 네가 잡혀간 뒤에 혼자서 외롭게 지내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다가 너무 상심한 끝에 실신하여 너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을 떠났단다.' 이 말을 들은 풍신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을 회복한 다음에도 그는 식음을 끊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는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 <독립운동사> 제2권.
 
홀로 계신 어머니 이야기를 전해주면 동풍신이 마음을 돌리리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소식은 동풍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순국에 놀라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동풍신은 부모님과 동족을 위해 충심을 다하다가, 유관순이 순국한 그 감옥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동풍신#3.1운동#함경북도 명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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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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