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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30일 오후 2시30분]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지난 3일부터 국회 본청 앞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한 지 6일 만에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2016년에는 이정현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7일간 단식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대중의 비웃음을 샀고, 결국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비폭력 행동의 방법으로서 정치적 목적의 단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사건을 짚어보고자 한다.

비폭력 행동의 범주 - 비폭력 항의 및 설득 / 비협조 / 비폭력 개입
비폭력 사회운동을 연구한 정치학자 진 샤프는 그의 책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에서 198가지 비폭력 직접행동을 정리해서 소개한다. 이 책이 30년 전에 쓰여졌고, 최근에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비폭력 행동이 많다는 점을 염두한다면 우리가 역사 속에서 현실 속에서 접해온 비폭력 행동은 198가지를 훌쩍 넘을 것이다. 이 다양한 비폭력 직접행동은 특성에 따라 3가지 큰 틀로 묶을 수 있다.
-'비폭력 항의 및 설득'은 평화적인 저항이나 설득을 위한 상징적 행위를 말하며, 성명과 탄원, 연설, 출판, 방송, 집회, 행진, 공연, 추모 등을 포함한다.

-'비협조'는 동맹휴업과 파업, 소비자 보이콧, 상인 보이콧, 납세 거부, 시민불복종, 입법·행정·사법 보이콧처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기대되는 무언가를 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다.

-'비폭력 개입'은 역으로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함으로써 대항하고자 하는 체계의 작동을 적극 방해하거나, 대안적인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전자의 예시로는 단식, 연좌농성, 점거 등이 있으며, 후자에는 대안적인 교육체계나 소통체계, 화폐체계의 창조와 이용이 있다.

단식을 능동적으로 굶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 섭취를 거부하는 것으로 볼 경우 '비폭력 개입'이 아닌 '비협조'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의 구분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이며, 임의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다.


비폭력 행동의 방법으로서 단식

진 샤프는 비폭력 개입의 한 형태로서 단식을 (1) 도덕적 압력을 위한 단식과 (2) 단식투쟁, (3) 사티아그라하 단식으로 나눈다. 이것은 비폭력 행동의 작동방식에 따른 구분에 기초한 것으로, 세 가지 형태의 단식은 각각 조정, 강제, 전향과 대응된다.

비폭력 행동의 작동방식 – 조정 / 비폭력 강제 / 전향
-'조정'은 양측이 입장 차이의 조율과 합의를 통해 타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파업과 노사갈등이 이런 식으로 해결된다. 양측 모두 목표를 일부 성취하지만 어느 쪽도 원하는 것을 모두 얻지는 못한다.

-'강제'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권력관계의 역전으로 상대가 입장에 관계없이 저항세력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대중의 지지와 신뢰를 잃은 권력자는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전향'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상대 혹은 제3자가 저항세력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탄압의 가혹함에 감정적으로 동하거나 그들의 대의가 정당하다고 설득될 경우 저항세력의 목표를 받아들일 수 있다.


(1) 도덕적 압력을 위한 단식은 다른 두 형태의 중간쯤 되는 것으로 비폭력 개입이 아닌 비폭력 항의 및 설득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도덕적 압력을 위한 단식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이지만, 단식투쟁처럼 강제적이거나 사티아그라하 단식처럼 완전한 전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2) 단식투쟁은 상대가 특정한 요구를 수용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음식물 섭취를 거부하는 것이다. 상대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대개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뒤에서 설명할 사티아그라하 단식과 분명히 구분된다. 단식투쟁은 일정 기간 혹은 무한정, 심지어 극단적인 경우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행해지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단식투쟁은 감옥에 갇혀 다른 강력한 저항 수단을 선택하기 어려운 수감자들에 의해 종종 사용되어 왔다. 20세기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과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 당시 수감자들은 집단 단식투쟁을 조직했다. 1980년~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의 경우 1차 단식투쟁에서는 여러 참여자를 모아서 한꺼번에 단식에 돌입했으나, 2차 단식투쟁에서는 순번을 정해 한 주에서 한 달 내외의 간격으로 한 명씩 단식을 시작했다. 이것은 투쟁의 명줄을 가능한 한 연장하여 대중의 지지와 당국에 대한 압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적 전략이었다.

1980~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에서 수감자들의 목표는 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와 같은 특수지위를 누리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정부는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노역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 다른 죄수들과 교류할 권리, 주 1회 면회·편지·소포의 권리 등 5개항 요구를 사실상 모두 수용했지만, 2차 단식투쟁에 참여한 23명 중 10명이 사망했다. 만약 순서대로 단식에 들어가는 전략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요구가 수용되기 전에 투쟁의 동력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비폭력 행동으로서 단식의 효과와 전략에 대하여
 비폭력 행동으로서 단식의 효과와 전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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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의 단식은 생존자에게도 소화장애, 시각장애, 신경장애, 신체장애 등의 후유증과 평생의 고통을 남길 수 있다. 각국 정부는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날 고문으로 간주되는 '강제급식'을 하거나, 수감자를 풀어주었다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체포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단식 중인 사람의 코나 입에 호스를 넣어 억지로 음식물을 주입하는 강제급식은 심각한 건강 악화나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한국에서는 1980년에 김용성과 변형만이 청주보호감호소에서 사회안전법 폐지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강제급식에 의해 사망했다. 이것을 계기로 이후 한국 교정시설에서는 강제급식이 사라졌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아직도 팔레스타인 수감자에 대해 강제급식이 이뤄지고 있으며, 2016년에 대법원에서 이에 대한 합헌 판결이 났다.

(3) 사티아그라하 단식은 자발적 고통으로 상대의 양심을 '찔러' 전향시키는 것이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는 간디가 시작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철학으로, 간디는 사티아그라하 단식을 강제적 요소가 있는 단식투쟁과 구분하고, 이 방법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그것은 아무 상대가 아니라 자신과 친밀하고 감정을 서로 공유하는 사람을 대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발적 고통이 정당화되고 의도된 전향 효과가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 억압자가 다른 모든 수단을 차단한 상황에서는 타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사티아그라하 단식의 예로는 간디가 1948년 1월 델리 폭동 당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합을 위해 단식한 것이 있다.

한국의 정치적 단식 사례

1980년 박관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은 5·18 민중항쟁 직전까지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이끌었다. 이후 보안사의 체포를 피해 도피했던 그는 1982년에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5·18 진상규명과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40여일 만에 사망했다. 송선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그때 박관현이 "5·18 민중항쟁 때 광주를 떠난 죄책감을 안고 죽을 각오로 투쟁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1983년에는 재야 인사 김영삼이 가택연금 상태에서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23일간 단식을 했다. 정부의 언론 검열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의 전현직 국회의원과 종교인, 학생운동가들이 직접 유인물을 배포하며 연대 투쟁을 벌였고, 김영삼의 배우자 손명순은 외신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소식을 알렸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도 주요 언론 인터뷰와 기고, 가두시위를 통해 김영삼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호소했다. 비록 요구를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김영삼의 단식은 국제 사회에 전두환 정권의 독재와 횡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에는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가 여당의 내각제 개헌 포기선언과 지방자치제 전면실시 등 4개항을 요구하며 당사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고, 13일만에 여야 합의로 요구사항이 타결되면서 단식을 중단했다. 비교적 최근의 사례로는 2003년~2005년에 천성산 터널 공사에 반대하며 다섯 차례에 걸쳐 총 300일 이상 단식을 한 승려 지율과 2014년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28일간 단식한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가 있다.

이정현과 김성태의 단식투쟁

요즘 한국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지는 단식의 상당수는 단식투쟁을 표방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단식투쟁은 가장 극단적인 비폭력 행동의 방법 중 하나로 스스로의 건강과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만큼 매우 신중하고 전략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때 고려할 점에는 요구의 수용 가능성과 대중의 지지, 단식을 중단할 출구전략, 본인의 건강 상태 등이 있다. 또한 단식투쟁이 당사자의 자유롭고 숙고된 결정이 아니라, 조직 내의 압력이나 영웅숭배 문화에 의한 것은 아닌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이정현은 "정세균 의원이 파괴한 의회민주주의의 복원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겠다"더니 7일 만에 "민생과 국가현안을 위해 무조건 단식을 중단한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으며 아무 성과 없이 단식을 끝냈다. 이정현의 요구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안도 아니었고, 따라서 의도한 압력을 거의 행사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는 당시 집권여당의 대표로서 사용 가능한 다른 여러 수단을 놔두고 단식투쟁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김성태의 단식은 (그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정현과 비교했을 때 한층 전략적이었다. 김성태가 단식을 시작한 5월 3일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조건부 특검 수용' 의사를 처음으로 밝힌 날이다. 특검 도입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예상되는 시점에서, 김성태의 단식은 '조건 없는 특검'을 요구하던 자유한국당의 협상 카드가 될 수 있었고, 결국 조건부 수용으로 합의가 되더라도 단식을 중단할 명분이 생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드루킹 특검은 찬성 입장이 50%를 넘고, 여당 지지자와 진보층에서도 찬성이 반대보다 많았다.

그럼에도 김성태의 단식이 특검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도 지지가 아닌 조롱을 받은 것은 대중이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표하는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10%대에 불과하며, 김성태에 대한 여론은 최근의 막말로 더욱 땅에 떨어진 상태이다. 지난 5일 주먹질 '테러'를 당한 뒤 "테러가 아니라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중략) 끝까지 분노하고 싸우겠다"고 말한 것도 한몫했다. 결과적으로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6일 만에 단식 중단을 선언한 것은 처음부터 목숨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방증이다.

수용 가능성 있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와 적절한 출구전략 없이 무작정 시작한 단식투쟁은 거의 항상 무력하고 좌절스러운 포기로 끝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식을 하는 당사자와 그의 요구가 대중과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사자 외에도 주변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도 저도 아닌 단식투쟁은 상대에게 압력을 행사해 요구를 관철하지도, 상대나 제3자를 설득하지도 못하고 같은 편의 사기만 떨어뜨리며, 특히 그 과정에서 이정현이나 김성태처럼 추한 모습을 보일 경우 망신만 사기 십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withoutwar.org/?p=14333



태그:#비폭력 행동, #단식투쟁, #김성태의 단식은 왜 성공하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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