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양북면 송전리 149-2에 있는 두산서당은 임진왜란 경주 지역 의병장 김석견(金石堅, 1546∼1614)을 기려 세워진 제향 공간이다. 두산서당은 강당 경의당(景義堂)과 사당 상절사(尙節祠) 등을 거느리고 있다. 본래 1798년(정조 22) 사당 두산사(斗山祠)가 세워져 김석견을 모셔 왔으나 1872년(고종 9) 서월 철폐령 때 훼철되었고, 1919년 중건하면서 '斗山書堂(두산서당)'이라 편액했다.
1592년 4월 21일 경주가 함락되자 김석견은 5월 1일 세 아들과 가동(집의 종) 등 열 명을 거느리고 문천에서 창의했다. 그가 개인 재산으로 군자금을 마련하고 말 다섯 필을 내놓자 의병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양동마을 수졸당 주인 이의잠의 『동호일고』 등 경주 지역 의병장들의 문집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난 해(1592년) '봄에 김석견, 손시, 권사악, 최봉천, 백이소, 이의잠, 이준, 이눌(김석견의 사위), 김윤복, 황희안 등은 남천 문옹정(김석견의 정자)에서 시국을 의논했다.' 그 무렵 동해안에 거주하는 김득복, 박춘영, 박인국, 황희안, 김응택, 김몽택 등은 바닷가 공암(孔岩)에 모여 단합을 도모했다. 지식인들은 이미 전쟁 발발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5월 16일 명활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첫 전투를 치른 김석견은 7월의 영천성 수복전, 9월의 경주성 수복전에 참전했고, 그 외 유포 전투, 휴항퇴 전투 등을 치르며 1592년을 보냈다. 그 후 김석견은 조선 정부를 배제한 채 명과 일본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진행한 1594∼1596년이 지나갈 무렵인 1596년 9월 팔공산 회맹에 사위 이눌(李訥)과 아들을 참가시켰다. 일본이 재차 전쟁(정유재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의병장들이 회동을 한 것이 팔공산 회맹이다.
그러나 그해 11월 김석견은 왜적과 전투 중 차남을 잃는 아픔을 겪는다. 3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 의병의 군량미를 옮기던 중 곽천(내남면 일원 형산강 상류)에서 일본군 수백 명의 기습을 받았다. 아버지 김석견을 지키기 위해 용맹 분투하던 차남 김몽량이 26세의 나이로 전사하는 비극이 이 전투에서 빚어졌다.
두 달 전인 1596년 9월 29일 창암(영천 동쪽 끝) 전투에서 김석견은 동지 최봉천과 백소이 의병장을 잃었다. 함께 창의를 했던 두 의병장과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헤어진 김석견은 본인도 이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두 동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 찬 김석견은 구미산 서쪽 끝 능선 작산 비탈에 창암 전투 참전 일본군의 잔여 병력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김석견은 기병 10명을 보내어 적을 유인, 매복지로 끌어들인 후 수십 명을 죽였다.
전쟁이 끝나고 김석견은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고 훈련원정(정3품) 벼슬이 내렸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과거 급제 후 의병 활동을 했던 장남 김몽수와 막내아들 김몽남도 3등공신으로 인정받았고, 장남은 고부현감에 임명되었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사위 이눌도 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눌은 1597년 팔공산 전투 때 입은 총상이 악화되어 1599년 병사했다.) 김석견은 전쟁 중 세상을 떠난 둘째아들을 그리워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1614년 향년 69세로 삶을 마감했다. 김석견이 세상을 떠나자 경주 선비들은 지역 유일의 유림장(儒林葬)을 치러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였다.
짙은 숲에 가린 두산서당은 차도에서 150m 거리인데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김석견과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사위 이눌의 임진왜란 당시 붉은 마음을 거의 잊은 후세인들을 책망이라도 하는 듯한 정경이다. 사당 앞에 서니 문득 의병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벼슬도 다 사양했는데…. 다만 살아생전 적과 싸울 때 우리 다섯이 전장에 함께 섰던 것처럼 지금도 상절사 안에 나란히 있었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