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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을은, 공동체는 다 옳은가? 세상에 이곳 말고 다른 곳은 없는가. 이 길 말고 다른 길로 가면 안 되나. 사람이 살만한 마을은, 공동체는 대체 어디쯤 있는가. 있기는 한 것인가."

도시를 떠나 농촌 마을로 내려와 살아갈수록 이런 의심과 오해가 줄어들지 않는다. 해소되기는커녕 자꾸 점증한다. '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을 고민하고 연구할수록 예측 가능하지 않은 마을생활의 미래가 불안하다. "마을에서 사람 꼴을 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사는 건 힘겨운 일"이라는 합리적 의심만 굳어진다. 무력감이나 패배의식이 자꾸 시비를 건다.

알고 보면 전적으로 개인의 무능력과 무기력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아닌듯하다.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사는 일'은 개인의 노력이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인 분석의 결과는 아니지만 살아보니 그렇게 체감된다. 결국, 마을이 문제가 아니고 나를 둘러싼, 마을에 딛고 선 사회가, 국가가 문제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도시 난민 처지 일 때는 물론이고 마을로 하방해 마을주민으로 살면서도 '먹고 살아야 하는 공포', '타인이 가하는 상처와 불신'은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는다. 

아무리 마을 속으로 깊이 들어가 조용히 지내려 숨죽여도 마찬가지다. 설사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문제라 해도 결코 개인들끼리 사사롭게 해결할 수는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요행히 지구 끝이나 하늘 끝에 닿는다 해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국가나 정부의 통제와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개인주의나 무정부주의로 철저히 무장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공공이 개인을, 사회와 국가가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보살피고 돌보지 않으면 마을에서 잘 살아갈 수 없다는 게 결론이다. 마을공동체는 국가나 정부 앞에 아직 역부족인듯하다.

그런 사실과 진실을 국가와 정부를 전혀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 앞에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앞에서 당당하거나 오만하다. 심지어 마을이나 공동체가 먹고 사는 책임은 온통 마을 사람 너희들에게 있다고 자꾸 주입하고 겁박하고 있다. "너희들끼리 자급하고 자조하고 자치해서 끝내 자족하라"는 것이다. 그토록 미신 같은 '마을공동체론' 또는 '사회적 경제기술'을 법으로, 제도로, 정책으로 만들어 시중에 무차별 유포하고 선동하고 세뇌하고 있다. 심지어 본디 마을도 아닌, 마을이 될 수 없는 도시에서, 단지 마을을 그리워할 뿐인 순진하고 순정한 도시민들에게까지.

무주초리넝쿨마을 고흥에서 무주초리넝쿨마을로 마을공동체 견학을
무주초리넝쿨마을고흥에서 무주초리넝쿨마을로 마을공동체 견학을 ⓒ 정기석

사회와 국가가 마을공동체에 책임을 전가했다는 의심

그렇다면 이런 의심에 자꾸 사로잡히게 된다. 중세 봉건사회 이후 산업화, 근대화 시기에 일찍이 사회와 국가가 마을공동체에 먹고 사는 책임, 안전하게 살 책무를 온통 떠맡긴 건 아닐까. 순진하고 선량하기만 한 신민들은, 마을 사람들은, 또는 시민과 국민들은, 권력과 자본의 고도의, 또는 치졸한 기획과 상술에 말려든 건 아닐까. 마치 재고 시멘트를 처분하느라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한국의 전근대적인 새마을운동 같은 공권력의 장난에 거국적으로, 총체적으로 온 국민이 휘말려든 것처럼.

그렇다면 오늘날, 마땅히 사회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적 의무와 국가적 과제까지 운명처럼, 원죄처럼, 천형처럼 당연하다는 듯 마을이 떠안게 된 건 아닐까. 그런 억울한 생각이 들면서 답과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마을공동체의 활로를 고민하고 걱정하다 보면 저절로 화가 난다. 결국, 국가나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우리 국민, 시민, 주민에게 짐을 떠넘긴 꼴이 아닌가. 대체 왜, 가뜩이나 개별화, 파편화, 원자화된 무력한 시민들이 이런 난제를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하는가.

사실 마을공동체를 잘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선행, 선결되어야 할, 서로 믿고 돕고 보살피고 돌보는 '사회적 자본'의 기술, 서로 사이좋게 나누며 먹고사는 '사회 안전망'의 기반,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자유와 평화'의 방법은 본디 사회와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무책임하고 비겁한 국가와 정부에게 성실하게 세금을 갖다 바치는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혁명하지 않고 얼마나 더 참고 버틸 수 있는가.

괜히 아무 힘도, 답도, 전망도 가지고 있지 않는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끼리, '마을공동체'를 계획하고 건설하다 보니, 밑도 끝도 없는 지리멸렬한 소모전에서 빠지는듯해 곤혹스럽다. 심지어 마을이나 공동체의 겉모습이 마치 행정의 말단 심부름꾼이나 대학교 동아리처럼 변형되지는 않았는가. 마을학교나 마을축제가 마치 말장난이나 소꿉장난, 또는 이벤트나 퍼포먼스처럼 변질되지는 않는가. 마을정책이나 제도가 미봉책이나 위무책에 불과한 진통제나 신경안정제의 약효에 그치지는 않는가. 마을공동체를 염원하다 보면 이런 소모적인 걱정과 우려를 좀처럼 멈출 수 없다.

무주군  국가와 사회가 마을과 마을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은 아닌가
무주군 국가와 사회가 마을과 마을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은 아닌가 ⓒ 정기석

정부가 개발하는 마을, 정부가 재생하는 공동체가 '마을공동체'일까?

그럼에도 마을을 만들려는, 마을공동체를 하려는 노력은 민과 관을 넘나들며 줄기차게 이어진다. 특히 예산을 틀어쥐고 있는 정부가 마을공동체사업을 주도하는 형국이다. 행자부, 농식품부, 심지어 국토교통부 등에서 매년 수조 원의 간접지원방식 보조금 예산이 투여된다. 지난 십여 년간 이런 방식의 사업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사업의 어려움과 문제를 정부는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을공동체나 지역공동체를 잘 개발하려는' 사업지침과 관련 법률 또한 부단히 개정하고 제정한다. 하지만 그 정책 효과는 늘 기대에 못 미친다. 

행자부는 마을과 지역공동체 관련 정책의 책임부처로서 이른바 '공동체사업 수행지침서'를 펴내기에 이르렀다. 이름하여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길라잡이'다. 이 지침에서는 지역공동체를 이렇게 개념 짓고 있다. '지역성, 사회적 상호작용, 공동의 유대를 바탕으로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그 구성원들이 상호 안명성이 높은 상태에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들이 같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일체감을 갖는 상태.'

이러한 정부주도형 지역공동체는 '지역을 기반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정책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 또는 촉진시키는 것은 '신뢰와 협력의 사회적 환경, 즉,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진단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가 지향하는 마을(지역)공동체는 '협력과 신뢰의 공동체 관계망'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정책의 목적도 정확하고, 진단도 근본적인데, 왜 정부가 주도하는 공동체사업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가. 그 원인은 한국적 농촌 지역개발사업의 역사, 그 태생적 한계와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마을 또는 지역공동체 정책의 출발지점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바 지역사회 개발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부락민 자조 개발 6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다. 이어서 1961년 국가재건 국민운동, 1970년 새마을운동 등,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20여 년 동안 '공동체 재건과 산업화'라는 목표에 집중한 지역공동체 정책이 이어진다.

홍천군  정부가 개발하는 ‘새 마을’도 마을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홍천군 정부가 개발하는 ‘새 마을’도 마을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 정기석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민간주도, 생태공동체운동이 태동

그리고 1980년부터 10여 년 동안은 '정주 환경 개선, 생훨권 개발'에 매달렸다. 시장 개방을 시대적, 사회적 배경으로 깔고 기반시설, 정주 환경을 중심으로 정주생활권 개발사업이 마을 단위로 추진되었다. 주로 토건 공학에 의한 물적 기반 조성과 기능적 정비라는 전시행정의 정책목표에 초점을 둔 셈이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마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민간 차원의 자생적 마을공동체운동이 촉발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지역 단위 공동체 제도도 본격화되었다. 지자체는 물론 중앙정부도 주민참여, 상향식의 마을 만들기에 나섰다. 2000년 진안군의 '주민주도 마을 만들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서울 등 도시에서도 마을공동체 사업이 전개되었다. 소외, 단절, 사회적 인간의 몰락 등으로 나타난 현대 도시사회의 병리 현상이 심각하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로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른바 한국의 생태공동체운동 또한 민주화 투쟁 이후인 1990년대부터 본격 싹을 틔웠다. 사회의 민주화, 경제의 선진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대안을 찾으려는 기층 민중의 요구가 분출한 것이다. 다만 오늘날 대표적인 생태공동체의 사례들은 그 이전에 이미 자생적으로 태동된 경우가 적지 않다. 경기도 화성 야마기시(산안) 경향실현지, 경남 함양 두레마을, 전북 부안 변산공동체, 경북 울진 한농복구회 등의 정주형 생태공동체들과 홍성 문당리 친환경 농업 마을, 남원 실상사 들녘공동체, 장성 한마음공동체 등의 지역공동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안군  2000년대초부터 민간주도 마을만들기를 선도했던 진안군
진안군 2000년대초부터 민간주도 마을만들기를 선도했던 진안군 ⓒ 정기석

한국적 생태공동체의 원형과 본질은 '마을'에서

황대권 등 국내 생태공동체 운동가들에 따르면, 한국에서 생태공동체운동은 미국, 유럽 등 서구 선진국에 비해 30년 이상 뒤졌다는 평가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는 신사회 운동의 기폭점을 1968년 68혁명으로 간주한다. 직후 유럽에서 세계로 공동체운동이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한국의 3공화국은 딴 세상이었다. 군부독재 정권이 국가주도 경제 일변도 개발정책 드라이브를 걸며 조국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로 국민들을 내몰던 반혁명적인 암흑기였던 것이다

그 시절, 그런 한국에서는 오직 먹고 사는 게, 남을 이기고 살아남는 게 최고의 목표이자 지고의 가치 기준이었다. '생태'니 '공동체'니 하는 배부른 철학이나 비전이 생활에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도 배가 고프거나 굶어 죽을 지경의 상황은 벗어난 셈이다. 국민 대다수는 양극화의 수렁 속에 빠져있으나 그 속을 잘 모르는 세계 자본주의 진영에서 나름대로 선진국 대접까지 받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이나 생태적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더 이상 '생태공동체'가 유럽 등 서구 선진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과 인간적 각성도 충만하다.

무주초리넝쿨마을  마을학교부터 살아나야 마을공동체가 되살아난다
무주초리넝쿨마을 마을학교부터 살아나야 마을공동체가 되살아난다 ⓒ 정기석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면서 어느덧 한국의 생태공동체(Ecological Community)는 저마다 정치, 영성, 교육, 치유, 과학 등과 같은 특정 목적을 중심에 놓고 그 가치체계를 지향하고 있다. 무엇보다 생태공동체를 하려면 애초에 정체성과 목표의식부터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역할과 기능, 목표와 존립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한 자기확신과 미래비전을 설정해두어야 한다. 한마디로 "왜, 공동체를 해야 하는지" 스스로부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적 생태공동체를 이식하거나 조성할 기반 환경은 이미 좋지 않다. '현대 대한민국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고 포위된 '한국의 마을'은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 다수가 일개 관료적 행정 단위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농촌관광마을이니, 농촌체험마을이니 '돈벌이'에 급급한 일부 관제 기획 마을이 대표적 증상이다. 여러 마을을 동일한 생활권, 경제권 또는 생태적이고 인문지리적인 동질성으로 한데 묶은 면, 읍, 시․군 단위의 지역공동체는 공동체로서의 진정성이나 지향점이 약화되거나 상실한 지 오래다. 심지어 과소화 지점을 이미 지나쳐 공동화의 단계로 접어든 곳도 적지 않다. 한국의 농촌 마을, 생태 마을이 점점 병약해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을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87년 체제의 한국형 마을공동체 방법론에서 이제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닌가.

하동군  지리산자락에는 생태공동체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하동군 지리산자락에는 생태공동체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 정기석

덧붙이는 글 | ※ 마을학개론(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 : 귀농을 하거나 자발적 하방을 해서 마을에서 먹고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마을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을, 공동체, 마을시민. 마을기업, 대안마을, 대안농정, 그리고 대안사회를 열심히 공부해서 체화해야 한다. 그러면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살 수 있다.



#마을공동체 #마을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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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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