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0~11일(금~토) 양일간 산과 들을 바람 따라 떠나는 사색여행인 '트레킹(trekking)'을 좋아하는 몇몇 친구들과 충북 제천시에 다녀왔다.

청풍호를 품고 있는 자연치유 한방(韓方)도시, 유유자적하며 풍요로운 마을을 뜻하는 '슬로시티'인 제천에는 호수주변을 순회하는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곳에 난 작은 오솔길인 '자드락길'이 유명하며, 이번에 걸은 '황사영(黃嗣永) 선생 순례길'이 최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다.

시랑산 박달재 박달산 표지석
▲ 시랑산 박달재 박달산 표지석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하여 오전 9시 30분경에 '시랑산 박달재'에 도착했다. 바람이 부는 흐리고 약간 추운 날씨다. 그러나 도리어 이런 날이 걷기에는 적당한 편이다. 박달재는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하고,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1948년에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울고 넘는 박달재'는 친일논란이 있는 반야월이 작사를 했고, 작곡은 김교성이 했다. 반야월의 친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박달재휴게소 입구에는 박달도령과 금봉이의 동상은 물론, 노래 가사를 적어 넣은 '박달재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물론 노래는 귀가 찡찡 울릴 정도로 하루 종일 정신없이 틀어 놓았다.

박달재 주변에는 자연휴양림이 좋고, 고려시대 거란군과 싸웠던 김취려 장군의 기념관, 대종교 나철 교주 후학들의 동상과 함께 성각스님이 지난 10년 동안 조성한 '목굴암' '오백나한전'이 유명하다.

시랑산 박달재 목굴암 내부의 부처님
▲ 시랑산 박달재 목굴암 내부의 부처님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특히 목굴암과 오백나한전은 800년된 느티나무를 성각스님이 각각 3년 넘는 기간 동안 직접 조각해 만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으로, 나무속을 도려내 조각해 놓은 것이다. 나무에 뚫린 엄지손가락만한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황금 빛나는 부처님의 얼굴은 과히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이웃에 조성된 조각공원과 목각공원과 함께 요즘 박달재 관광의 최고 명소 중 하나이다. 현재 박달재는 땅 아래로 1997년 새로운 터널이 생겨 도로의 이용가치를 상실하였으나, '박달재 옛길'이라는 등산 및 트레킹 상품으로 개발되어 가족 및 연인들의 여행코스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제천시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제천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제천시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제천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특히 박달재는 근현대사를 통하여 대종교와 불교의 영향도 받고 있고, 주론산(舟論山)과 배론성지(舟論聖地)까지 있어 기독교의 성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산과 계곡은 물론 주변의 터가 생각보다 좋은가 보다.

우리들은 박달재에서 출발하여 주론산 기슭을 돌아 임도를 천천히 걸어 천주교 배론성지까지 6KM 정도 되는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두어 시간 동안 걸었다.

걸으면서 생각을 해보니, 주론산(舟論山)과 배론성지(舟論聖地)의 한문이 같다. '배(舟)밑창을 닮았다 하여 배론(舟論 말씀 론, 밑바닥 론)'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적으로 보면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주님의 배안에 있어 포근한 터'라는 의미일 듯하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산과 계곡이 좋다. 제천시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산과 계곡이 좋다. 제천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제천시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제천시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소나무와 참나무 및 가을 홍 단풍과 박달나무 등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 등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정말 천천히 걸었다. 가을이 이제 천지만물에 가득하다. 새벽에 비가 와서 그런지 공기가 더 싱그럽고 좋다. 골짜기마다 넘쳐나는 가을의 향기를 담고 있다.

떨어지는 단풍과 날리는 바람 속을 느릿느릿 거닌다. 임도를 따라 걷기도 하고 물 맑은 작은 시냇물을 건너기도 했다. 동행한 한국트레킹학교의 윤치술 교장 선생과 우리의 천주교 전래 역사와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 및 박달재의 가을 정취와 올바른 걷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황사영 선생이 종이보다 오래 보관되고, 또 손상이 적은 명주천에 글씨를 쓴 이유와 배론성지에 신학교가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아울러 이전에는 몰랐던 윤 교장이 직접 창안한 등산스틱 이용법인 '마더스틱 워킹(Mother-Stick Walking)'에 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안짱다리에 좌우의 균형감이 부족한 내 걸음걸이에 대한 보정방법도 알려주었다. 등산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한국인에게 맞는 제대로 된 스틱사용법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는 현실에서 윤 교장에게 앞으로도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배론성지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배론성지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한 시간 정도를 걷고는 잠시 쉬면서 윤 교장의 우쿨렐레와 하모니카 연주에 맞추어 잠시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간식을 먹었다. 이어 천천히 길을 걸어 가을이 완연한 봉양면 구학리의 한국 천주교의 유서 깊은 배론성지에 다다른다.

제천시의 문화관광해설사인 이순여 선생이 박달재부터 동행하며 같이 걸은 관계로 종교적인 이야기는 물론 지역의 인물과 산길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현장에서 추가로 들을 수 있었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최양업 신부상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최양업 신부상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낙엽이 최고인 가을이다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낙엽이 최고인 가을이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처음 방문한 배론성지는 정말 봄부터 가을까지 계절의 향기를 가득 품고 산화한 낙엽 천지다. 어느 망명정부의 쓸모없는 지전보다 훨씬 가치 있고 아름다운 낙엽들이다. 이곳의 가을은 이렇게 끝이 나지만, 문뜩 연인과 함께 가족과 같이 첫눈을 기다리며 성지순례를 하는 방문객들은 추워져도 점점 늘어날 것 같다.

배 모양을 닮은 성당내부의 모습이 참 멋지고 좋다. 건축가의 이름을 불러본다. 외부는 노를 짓는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보인다. 우리의 천주교 역사를 보자면 지난 1801년(순조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권철신,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주문모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 충청도의 첩첩산중에 있는 주론산 아래 배론마을에 숨어든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黃嗣永:1775∼1801)은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글을 명주천에 곱게 7~8개월 동안 토굴 속에 숨어서 작성한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배론성당 내부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배론성당 내부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황사영은 남인으로 1790년(정조14)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고 처가의 인도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1794년 한국에 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지도하는 명도회에 가입, 교리를 공부하였다.

황사영은 오랫동안 배론마을의 토굴 속에서 주문모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의 교세 및 박해의 상황, 천주교를 널리 펼칠 방책 등을 적어서 동지 황심, 옥천희에게 동지사 일행을 따라가 북경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시킬 계획을 세웠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한글로 써진 스테인드글라사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한글로 써진 스테인드글라사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3인이 모두 처형당했다. 이 밀서를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라 하는데, 이 사건 이후 천주교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한층 가혹해졌다. 현재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후일 바티칸에 기증되어 교황청 박물관에 전시 중에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 이곳 배론성지에는 1856년(철종7)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를 세우고 성직자를 양성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신부들이 처형당하고 신학교는 폐쇄된다. 아쉽게도 졸업생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황사영 선생 동상, 후손들이 대부분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라서 북에서 제작하여 한국으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황사영 선생 동상, 후손들이 대부분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라서 북에서 제작하여 한국으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현재 이곳 배론성지에는 황사영이 머물던 토굴과 예전 신학교로 쓰던 초당, 조선 천주교사상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崔良業:1821∼1861) 신부의 묘, 새롭게 건축된 배 모양의 대성당, 뒤편의 납골당 등이 있다. 배론은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이다.

박달재는 이제는 별로 내왕도 없는 옛날 고개지만 마루에 목굴암과 오백나한전이 있고, 또한 대종교 위인들의 동상도 있고, 주론산을 따라 천천히 갈지(之)자로 산길을 걸어가면 천주교의 배론성지에 닿을 수 있는 멋진 곳이다.

200여 년 전 우리 땅에서 천주교의 박애와 평등한 삶을 실천하던 사람들의 흔적과 공부하던 신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거닐던 길을 함께 걸어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좋은 의미가 되는 것 같다.

앞으로 제천에 다시 방문하게 되면 조금 더 천천히 천주교와 황사영 선생을 생각하면서 순례길을 걷는 명상의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배론성지의 옛 성당
▲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 배론성지의 옛 성당
ⓒ 김수종

관련사진보기




#황사영 선생 순례길을 걷다#제천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