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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망각을 만들고 빛바랜 감상을 만들지만 또한 속 깊은 상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온 가족이 유럽 여행을 다녀온 것이 2013년이니 꼬박 3년이 지났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일상들이 소중했던 그 순간들을 오롯이 묶어두진 못하게 했지만 그 때의 일들은 묵혀둘수록 깊어지는 장맛처럼 내게 고스란히 그리움과 사랑으로 남았다. 그리고 흘려보내기 아까운 소중한 가치들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우리의 나날들을 이제 돌이켜본다. 묵은 된장같이 구수하고, 짭짤하리라 믿는다.

시작은 그랬다. "할 수 있을까?"

남편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 여차하면 책상을 빼게 될지도 모르는 살벌한 대기업에서 새벽 5시 출근을 하는 샐러리맨이며 나는 수업시간을 몇 분만 어겨도 맹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교육 선생님인데 말이다. 아들 녀석은 고등학교 1학년. 대학입시에 발목이 잡혔고, 딸아이는 중1. 내신 관리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어머니, 그 여행 꼭 가셔야해요? 방학 중에 보충수업을 참석하지 않으면 성적이 떨어질 텐데요. 이제 대학입시에 집중하셔야죠."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여행을 만류했다.

"자네. 직장생활 그렇게 하는 거 아니네."

남편 회사의 사장님도 직격탄을 날렸다.

"우리 회사 공장 앞에 양을 기르는 농장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지나가다가 잠깐 양들을 쳐다봤는데 아주 재미난 모습을 하나 봤어. 녀석들이 울타리 너머에 있는 풀을 먹고 싶었나봐. 울타리가 아주 낮았는데 뛰어 넘지를 못하고 울타리 사이로 자꾸 고개만 들이밀고 있는 거야. 울타리라는 게 넘어 갔다가도 다시 넘어 들어올 수 있는 건데 말이야. 바깥세상, 그러니까 울타리를 넘으면 일어날 일들을 지나치게 걱정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모두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남편은 이렇게 말하며 울타리를 넘었다. 25일간의 휴가를 냈고, 유럽 여행을 강행했다. 나는 내가 가르치던 50여명의 아이들과 작별을 했다. 8년을 다닌 회사를 완전히 그만 두었다. 아이들 역시 공부를 완전히 접었다. 여름방학을 통째로 유럽 여행에 투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울타리 안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지금 대학생, 그 해 여름을 보충수업에 투자했다면 좀 더 좋은 대학에 갔을까? 남편은 여전히 같은 회사에서 자신의 일들을 똑부러지게 감당하고 있다. 사장님 말씀대로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해 있을까? 나는 여행을 다녀와서 새 출발을 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만학도로 공부하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일들을 만났다. 회사를 그만 두지 않고 아주 잘 나가는 사교육 선생님으로 계속 지냈다면 지금의 나는 돈을 아주 많이 버는 캐리어우먼이 되어 있을까? 그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순 없지만 우리는 다시 평범하다.

울타리를 넘는 일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일탈의 짜릿한 쾌감 또한 선사한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서는 보지 못했던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따뜻한 집이 있는 울타리 안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 울타리 너머 세상을 보고 온 우리는 이제 울타리 안에 안주하던 우리와 같은 우리가 아니다.

총 23박 24일, 다녀온 나라 11개국, 2주간의 캠핑카 여행, 이어진 영국과 이탈리아 여행, 꿈만 같았던 우리의 유럽 여행은 그렇게 '울타리 넘기'로 시작되었다.


#유럽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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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말하고. 책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독서 탐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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