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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의 뒷문을 열면 푸른 보호 시설로 덮힌 선사유적지가 보인다.
 마루의 뒷문을 열면 푸른 보호 시설로 덮힌 선사유적지가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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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서당(東湖書堂)은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 91번지에 있다. 세칭 '동구 혁신도시' 안으로 들어가 도로가 끝나는 지점까지 거의 닿았을 즈음에야 만날 수 있는 서당이다. 이름이 동호서원이 아니라 동호서당인 것을 보면 이곳에는 사당(祠堂)이 없다.

하지만 서당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첫 문장은 '이 건물은 의병장 면와 황경림(勉窩 黃慶霖, 1566-1629)을 위하여 하양현의 사림(士林)들이 1820년에 세운 동호사(東湖祠)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부터 말한다. 1820년 처음 건립되던 당시에는 서당이 아니라 사당이었다는 뜻이다.

 동호서당 앞면
 동호서당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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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서원 철폐령을 겪은 동호사는 '1875년 본 건물을 중건하였고, 1921년 중수하면서 서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2013년 12월에 다시 중수'되었다. 그 탓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동호서당 건물은 아직 대패질 자국이 은은하게 남아 있는 듯한 새 목재와, 회색빛 창연한 옛날 목재들로 뒤섞여 있다.

동호서당은 왼쪽에 온돌방 두 칸을 두었고, 오른쪽에는 마루를 두 칸 두었다.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로 방을 놓지 않은 점이 눈길을 끈다. 안내판은 동호서당이 '전반적으로 소박하게 건물을 꾸몄다'라고 종합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물론 안내판이 황경림에 대한 해설을 빠뜨릴 리 없다. '조선 세종 때 정승이던 황희의 후손으로 이곳 동내동 (황씨의) 입향조(入鄕祖, 마을에 처음 살기 시작한 조상)'인 황경림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양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응수, 곽재우 등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을 높게 평가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사후 창의공신(倡義功臣)의 휘호를 받았다.'

 선사 유적지에서 내려다 본 동호서당. 보호수로 지정된 두 그루 은행나무가 인상적이다.
 선사 유적지에서 내려다 본 동호서당. 보호수로 지정된 두 그루 은행나무가 인상적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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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앞뜰을 좌우로 가득 채우고 있는 두 그루 거대한 은행나무가 우람하다. 나무 앞에는 이 두 그루 은행나무가 '수령(나무의 나이) 200년, 수고(나무의 높이) 20m, 나무둘레 1.2m'이고, 2000년 11월 18일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은 '보호수의 특징(연혁 및 전설) : 조선 후기 서원 철폐 시기에 재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재실의 무사 건재를 기원하면서 옮겨심었다'로 끝난다.

동호서당은 뒤편에도 특별한 볼거리를 거느리고 있다. 선사 유적이다. 고인돌 등 역사 시대 이전의 유적들을 서당 바로 뒤 개울 건너 얕은 구릉에 모아 놓았는데, 하나하나 친절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답사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특히 땡볕이 뜨겁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에도 전혀 불편없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늘을 푸른 보호 시설로 덮어놓았다. 이만하면 동호서당은 선사 시대와 임진왜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역사유적지라 하겠다.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 내렸지만 사양한 황경림

    
 마루 뒷문을 열고 앞을 바라보면 건설 중인 혁신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마루 뒷문을 열고 앞을 바라보면 건설 중인 혁신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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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서당이 황경림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집이므로, 의병장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경산문화원이 펴낸 <경산의 산하>는 1592년 4월 25일에 왜적 100여 명이 와평, 지금의 와촌마을로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민가를 약탈하였는데, 신해 의병대장 등 하양 지역의 의병들은 악전고투 끝에 적들을 격퇴, 영천 경계까지 맹렬히 추격했다고 전한다. 그날 의병들은 장창 35자루, 조총 25자루, 백납으로 도금한 나무칼 여러 자루, 사람의 눈을 현혹시킬 수 있는 이상한 장식을 한 병기들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았다.

4월 27일, 경산의 최대기 의병장이 하양 의병진에 합류한다. 이 무렵 최동보 의병장은 (대구 동구) 해안과 (연경서원이 있던) 화담 사이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다. 그런데 4월 30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용궁현감 우복룡이 아군을 몰살시킨 사건으로, 이곳에서는 생략. '의병들 반란군으로 몰아 학살한 사건, 사실일까?' 기사 참조)

5월 2일, 하양 일대 신해 의병대장은 최대기 장군과 논의 끝에 대구의 최동보 의병장에게 서신을 보낸다. 영천의 권응수 장군과 세를 합치자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다음날 신해 의병대장은 "하양은 작은 마을이고 왜적도 크게 쳐들어오지 않을 것인즉 그리 염려할 게 못된다, 우리 모두 신령으로 가자!"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황경림 장군은 생각이 달랐다.

"군사의 일에는 항상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어서 늘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왜적이 이러한 허점을 노려서 공격해 온다면 우리 고장은 누가 지킬 것입니까? 차라리 군사를 나누어 역할을 수행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결국 신해 의병대장은 군사를 나누어 그날 바로 신녕으로 가서 권응수 장군과 합세한다. 5월 8일, 하양의 선비들은 다시 서당에 모여 신해 장군 대신에 황경림 장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다. 황경림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자처하면서 사양했지만 결국 많은 이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의병대장의 소임을 맡게 된다. 요약하면, 황경림은 하양 지역의 2대 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선비였다.

 동호서당 뒷면
 동호서당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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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황경림 의병장에 대한 기록은 <대구 시지>가 아니라 <경산 시지>에 실려 있다. <경산 시지(1997)>는 '하양현 창의 8의사(八義士)' 소개 지면을 별도로 마련하고 있다. 여덟 분의 의사는 신해, 김거, 허대윤, 허경윤, 박능정, 박붕, 허응길, 그리고 황경림을 가리킨다. 황경림 의병장 소개 부분을 읽어본다.

'(황경림은) 장수(長水) 황씨로 자는 경서(景瑞)요, 호를 면와라 하였다. 세종 때 명상(名相) 황희(黃喜) 정승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에 신해와 창의하여 하양 향병(鄕兵, 의병)을 이끌고 영천의 싸움에 참전하여 성을 회복하였고, 신해가 진지를 옮긴 후에 하양의병의 대장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창녕 화왕산성에서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와 화왕산성을 고수하였다. 순조 20년 경진(1820)에 향사(鄕士, 지역의 선비들)가 안심 동곡동(東谷洞)에 동호사(東湖祠)를 세워 제향하였다.' 

 경북 경산시 하양읍 중심부의 구 하양읍사무소 부지에 세워져 있는 '임진 창의 제공 하양 사적비'
 경북 경산시 하양읍 중심부의 구 하양읍사무소 부지에 세워져 있는 '임진 창의 제공 하양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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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읍에는 황경림 등 하양 지역 의병장들을 기려 세워진 비석도 있다. 하양읍 중심부의 구 읍사무소 자리에 건립된 '임진 창의 제공(諸公) 하양 사적비'가 바로 그것이다. 1958년부터 2013년까지 54년 동안 하양읍 사무소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었는데, 사적비는 공원 중에서도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사적비 좌우에는 10여 기의 선정비와 '4월 학생혁명 기념비'도 있어 한층 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호서당은 대구에, 사적비는 경북 하양에

사적비는 앞면에 비의 이름, 뒷면에 여덟 의사의 개인별 소개 및 공적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경산문화원이 2001년에 펴낸 <경산의 문화유적 기문>은 황경림을 두고 '장수인이라, 자는 경서요 호는 면와이니, 익성공 희(황희)의 후손이라, 임란에 신해 장군과 더불어 향병을 이끌고 영천으로 가서 영천성을 되찾는 데 힘을 보태었고, 신해 의병장이 신녕으로 진지를 옮겨간 이후에는 하양 의병대장을 이어받았으며, 충익공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지켜내었다. 동호사에 제향되었다'라고 소개한 후 비문 원문의 한글판 번역문을 싣고 있다.

번역문은 '삼가 살피건대 제공의 사적 모두가 족히 세상에 모범될 만하나 아직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이제 그 후손과 지역 유림에서 상호 협력하여 행정기관에 건의, 바야흐로 비문을 읍사무소에 세우게 됨에 박석노와 도병채가 나(이호대)에게 명(銘, 비에 새겨넣을 글)을 청하여 왔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로 시작된다. 본문은 아래와 같다.

'학산은 높고 가파르며, 금호강은 길고 푸르러 누르고 띠가 되어 만물이 영화로웠다.
지난 임진란을 생각하건대 오랑캐가 창궐하자 하양의 제공이 토멸할 것을 함께 맹세했다.
뛰어난 신해 공이 창의하여 단에 올라 이름이 조정에 보고되고 어려운 자리에 올랐다.
서남방의 황경림 공은 병권을 이어받아 영청선 전투에 공을 세우고 동호사에 제향되었다.
누가 충익공을 따랐는가? 후원의 김거 공인데 화왕산을 사수하여 논공할 때 공이 높았다.
난형난제 허씨 형제 번갈아 수문장을 하여 함께 녹훈에 기록되었다.
교나무와 재나무는 박씨 문중의 두 사람, 아버지는 순국하고 아들은 수성에 골몰했네.
허공이 있는데 인끈을 버리고 전통에 메었고 향기로운 그의 말은 동악과 망우당이 전했다.
팔공회맹록에 보면 공적이 다르지만 의는 같은데 어찌 모두 위국헌신이 정충(貞忠)이 아니랴. 
교룡으로 구전되니 정려각의 쐐기를 바꿔야 한다 산이 높고 강이 길어 풍습이 그치질 않네.'


#동호서당#황경림#신해#임진왜란#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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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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