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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 제주도 중산산지역이 사려니숲(신령한 숲)길을 걷는 여행자들, 내가 찾았을 때(18일) 그곳엔 눈보라가 휘날리고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김민수
착륙 전 비행기 창가로 바라본 제주의 바다는 하얀 포말의 크기로 보아 바람이 제법 많이 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비행기 트랙에 내려서자 '제주의 찬바람'이 "훅!" 하고 폐부 깊숙이 들어와 내가 제주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내가 상상하고 원했던 1월의 날씨가 아니었다. 올 겨울 내내 날씨가 따스했기에 부지런히 올라온 제주의 꽃들도 만나면서 미리 봄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일정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내렸고, 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일단 식후경, 식당 앞에 있는 바다는 높은 파도와 바람과 눈발때문에 서 있을 수 조차 없었다. 이런 날씨엔 실내이거나 그나마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숲을 여행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사려니숲을 떠올렸다. 지금은 제주도를 찾은 많은 여행자들의 필수코스가 되었지만, 내가 살 때만 해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길이었으며, 물찻오름 입구까지 차량통행이 가능해서 사려니숲길을 걷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사려니숲의 야생화에 취해 안방 드나들듯 숲길을 걷곤 했었다.

'그래,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불고 눈이 오는 날은 그곳이 제격일거야. 아직 폭설까지의 수준은 아니니 조심조심 가면 입구까지는 차량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돌탑 사려니숲길 계곡에 쌓여있는 작은 돌탑들이 하얀 눈과 어우러져 풍경을 만들어 낸다. ⓒ 김민수
그렇게 사려니숲 입구에 도착하니 5시경이었다. 숲은 해가 빨리 떨어지는데, 거기에 눈보라까지 휘날리고 있으니 물찻오름 입구까지 왕복 9키로미터를 걷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싶었다.

젊은 친구 둘이 장갑도 없이 캐리어를 끌고 사려니숲길로 들어선다.

"케리어를 끌고, 장갑도 없이, 모자도 없이 힘들 텐데요."
"오래 걸려요?"
"왕복 9키로미터가 넘는데, 조금 걷다 돌아오려는 것이 아니면 모를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탐방안내소에도 사람들이 없어서 젊은 친구들은 그냥 캐리어를 끌고 사려니숲으로 접어들었다. 한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젊은 친구들은 안 되겠는지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해요?"
"아직 초입인데. 계속 이런 숲길인데 이 추위에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은 무리예요."

그 친구들을 설득해서 돌려보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휘날렸고, 숲 위로 부는 바람에 부디끼는 나무들은 성난 파도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칼바람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달려들기도 했으니 그냥 평상복차림으로 걷기엔 무리였다.
사려니숲 사려니숲의 계속, 오랫동안 쌓여있던 눈이 아니라 아침부터 내린 눈이 쌓인 것이다. 갓 내린 눈이 쌓인 제주의 계곡풍경은 검은 현무암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인다. ⓒ 김민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젊으니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험한 날씨에 사려니숲길을 걷던 이들이 밀물처럼 빠져나왔다. 밀물이라야, 열명 남짓이었지만 이런 날씨에 사려니숲길을 걷는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더군다나 날도 어두워지고 있는데 지금쯤은 숲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나는 물찻오름 입구까지는 갔다오고 싶었으며, 눈이 쌓여 있으니 아무리 깜깜해져도 길을 잃을 염려도 없을 것이며, 더군다나 제주도에 살적에 안방 드나들듯이 다닌 곳이니 일행들에게 "계속 전진!"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걸음을 멈출 수 없게 한 것은, 이런 험한 날씨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광들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바람만 불었더라면 돌아나왔을 터이지만, 눈보라가 휘날리면서 만들어 내는 풍경은 신비스러웠다.

신비스러움과 오로지 숲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과 그럼에도 의지할 수 있는 우리가 있다는 것이 걷는 행위를 즐겁게 만들었다.
사려니숲 하늘에서 내린 눈은 물에 떨어지는 순간 다시금 물이 된다. 계곡에 작은 돌 하나, 그 위에 쌓인 눈들은 물이 되기 전 잠시라도 사려니숲을 구경할 수 있으니, 저 작은 돌맹이 하나가 얼마나 고마울까? ⓒ 김민수
"야, 저것 좀 봐."
"저 돌에 쌓인 눈은 정말 행운아다."

그랬다. 어차피 물에서 왔으니 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겠으나 하얀 눈으로 내려 잠시라도 쌓였다가 가는 것은 또 얼마나 큰 행운인가?

바람때문에 눈은 하늘에서 내리지 않았고, 땅에서 옆에서 몸으로 부닥쳤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면 이내 카메라에 눈이 다닥다닥 붙어버린다. 카메라의 성능을 믿기로 했다. 설마, 어느 정도의 방수기능은 있겠지 하는 믿음이었다. 다행히 여행을 마친 지금도 카메라는 그 믿음을 지켜주었다.

제주도에 살았더라면 이 험한 날씨에 이곳에 올 생각일랑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제주를 떠난 지 10년, 여행자로 이곳에 왔으며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몇박 며칠인데 하루라도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광을 느끼고 싶고,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렬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풍광은 여간해서는 만나기 힘든 풍광이다. 뷰파인더에 기록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마음 속 깊이 새겨질 순간들을 걷고 싶었던 것이다.
사려니숲 사려니숲 입구에서 물찻오름 입구까지는 4.6키로미터, 왕복 9키로미터의 거리다. 동장군의 기세에 단단히 무장한 여행자가 사려니숲길을 걷고 있다. ⓒ 김민수
손이 시렵다. 얼굴은 이미 칼바람과 눈보라에 노출되어 붉어졌다. 바람을 등지며 걷고 또 걷는다.

알겠다. 왜 사람들이 극한에 도전하고, 그 극한의 상황에서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지 알겠다. 내가 걷는 길에 눈보라와 칼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올수록, 그럼데도 걷고 있는 내가 더 대견스러워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간에는 걷는 일에만 집중했으므로, 정말 오랜만에 내 머릿 속에서 잡생각이 다 사라졌다.
사려니숲 사철 푸른 나무의 이파리에 하얀 눈이 쌓였다. 하얀 눈과 초록의 빛깔이 잘 어울린다. ⓒ 김민수
얼마만일까? 내 머릿속의 잡생각들을 모두 비워버린 것이 언제였는지 알 수 없다. 최소한 지난 연말부터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내 머릿속을 비운 적이 없는 생각들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나의 정신건강에 좋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모든 것들을 비운 것이다.

"야, 좋다!"

나는 손나팔을 만들어 사려니숲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에서는 사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의 말들을 뱉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부질없어 보였고, 지금 이 순간에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함으로써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가치도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목이 터질 정도로 "야, 좋다!"를 연발했다.
사려니숲 사려니숲에서 만난 노루, 백록담이 그리 멀지 않으니 백록담의 전설을 간직한 어느 조상의 후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김민수
마음껏 소리를 질러본 적도 언제인지 가물거린다. 그렇게 꾹꾹 가슴에 눌러삼고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잘했다. 소리지르길 참 잘했다.

사려니숲길에 접어들면서 일행에게 자랑을 했다.

"내가 제주도에 살 적에 이곳에 오기만 하면 노루를 만났어. 눈이 얼마나 예쁘던지."
"오늘도 만날 수 있는거야?"
"이렇게 추운데 집에 있겠지. 게다가 날도 어두워지는데......"

그러나 기적같이 노루를 만났다. 노루는 한참동안 신기한 듯 경계하며 우리를 바라보다 숲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는 것일까?
사려니숲 사려니숲을 걷다보면 간혹 계곡이 나온다. 많은 제주의 계곡들이 건천인 반면 사려니숲길의 계곡은 늘 물이 있다. 물찻오름도 오름 정상에 물이 가득하니 이 지역은 수량이 풍부한 지역인 듯하다. ⓒ 김민수
사려리숲 조릿대와 나목, 눈이 옆으로 쌓여 진풍경을 자아낸다. 칼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숲길에서 흔하지 않은 풍경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 김민수
점점 어두워진다. 눈발은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했고, 나무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흔들렸다. 검은 현무암은 하얀 눈으로 덮혀 그 자태를 더욱 빛내고 있었으며, 하얀 눈 역시도 그러했다. 이제 물찻오름입구, 반환점까지는 1키로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어둑해진 숲길이지만 또 걸었다.

다행히 물찻오름을 향하는 길은 바람을 등지고 가는 길이었다. 눈이 하늘에서 내리지 않을 수도 있으며, 눈이 옆으로 쌓인다는 증거를 본 날, 저마다 나무는 분단장을 한 듯했다. 조릿대는 하얀눈을 이고 푸른 이파리를 더욱더 빛내고 있었으며, 가장자리의 노란 이파리의 테두리는 두 빛을 조화롭게 이어주는 고리 같았다.

눈보라에 숲은 마치 안개가 자욱한 듯했다.

"여기 텐트 치고 자고 내일 아침 일출을 이곳에 맞이하면 기가 막히겠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파고드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크, 여름도 아니고 겨울에? 정말, 멋있긴 하겠다. 조금만 젊었어도 그럴 수도 있겠다."
물찻오름입구 물찻오름은 2018년까지 휴식년에 들어갔다. 이름 그대로 오름 분화구에 물이 가득차 있어 진풍경이다. ⓒ 김민수
그렇게 물찻오름 입구에 도착했다. 이전에 물차오름을 올랐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제 온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온만큼 다시 걸어가야 한다. 올 때에는 바람을 등지고 왔지만, 갈 때에는 바람을 맞서서 가야 한다.

날은 어두워졌으므로 카메라도 이젠 자동초점을 맞출 수 없다. 하얀 눈이 쌓인 길만 바라보며 걷고 또 걷는다. 우리가 남겼던 눈길 위에 발자욱은 하나도 남질 않았다. 이젠 세상물정을 다 몸소 겪은 나이들이 되어서 그런지 어두운 숲을 걸으면서도 무서워하는 일행은 아무도 없다.

"혼자였으면 무서웠을 거야."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삶의 도반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해줘서가 아니라,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그런 도반 말이다.

갈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려 나왔고, 사려니숲길 주차장에는 예상했던 대로 우리가 주차해 놓은 차량 외에는 없었다. 눈도 많이 쌓였기에 운전은 현지 도로사정에 해박한(?) 내가 맡기로 했다. 사려니숲에서 교래방향으로 가는 길, 절물휴양림 커브길 부근에서 미끄러진 차량 한 대가 숲에 처박혀 있다. 길을 예측하지 못해서 일어난 사고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사려니숲은 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월 18일(월)에 다녀왔습니다.

#사려니숲#물찻오름#눈보라#현무암#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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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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