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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정치가 문제라고 말한다. 여론 조사를 해보면 현재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정치라는 답변이 나온다. 국론이 분열되면 정치가 나서서 소통하고 타협을 이끌어야 하는데, 오히려 정치가 나설수록 문제가 악화되는 것만 같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은 일단 젖혀두고, 현실에서 정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혹시 문학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작품이 있을까? 선뜻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정치, 혹은 정치인은 악역이나 방관자, 은폐자 역할을 도맡는다. 욕먹는 것도 정치의 주요 역할이지만, 비난을 뒤집어쓰는 것 말고 정치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성찰하는 문학작품은 흔하지 않다. 더구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민주 정치에 대한 작품을 쓰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SF와 아동문학 분야에서 정치를 다룬 두 작품을 소개한다.

일본의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이하 <은영전>)은 1982년에서 88년에 걸쳐 쓰여진 총 10권 짜리 SF 소설이다. 물론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쓰여진 정통 SF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은영전>을 스페이스 오페라나 라이트 노벨의 시조로 보는 의견이 강하다. 물론 지금의 일본 라이트 노벨과 <은영전>은 상당히 다른 작풍을 보인다. 그보다 이 작품이 일으킨 폭발적인 인기 덕분에 <은영전>과 유사한 소설들이 연속 히트를 치며 라이트 노벨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게 옳겠다.

일본 대중문화계에 <은영전>이 일으킨 영향은 미국 문화에 끼친 <스타워즈>의 영향과 종종 비교된다. <은영전>의 독특한 점은 과학적, 신화적 상상력보다 정치 체제의 대결과 국가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물론 레이저가 슝슝 발사되고 우주 항공모함이 날아다니는 등 SF 팬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행성 간 전쟁 묘사도 나온다. 그럼에도 <은영전>을 떠받치는 핵심적인 갈등은 정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영전>에는 세 가지 세계가 있다. 은하제국, 자유행성동맹, 그리고 자치령 페잔이다. 은하제국은 절대군주 황제를 모시는 전형적인 파시즘 국가이다. 황제는 반대파를 학살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며 엄청난 군대로 평민들을 억압한다. 유색인종을 탄압하고 강고한 신분제를 유지하며 열성 유전자를 골라내어 박멸하기에 전념한다. 부패한 귀족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평민들은 도망치거나 자살하기에 이른다. 은하제국은 평민들을 골수까지 쥐어짠 끝에 급격한 인구 감소로 뿌리째 흔들린 지 오래였다.

자유행성동맹은 은하제국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건국했지만 여기도 그다지 이상적인 체제로 보기 힘들다. 자유행성동맹의 체제는 현대 민주주의와 매우 유사하며 직선제 선거, 지역구 정치인, 최고평의회 의장으로서의 국가원수 등을 두고 있다. 동맹은 제국에 맞서기 위해 과다한 국방비 지출로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내부의 관료주의와 집단 이기주의, 무능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또한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은 능력보다 잘생긴 얼굴과 연기력으로 표를 긁어모으기도 한다. 이 동맹을 지배하는 정치인들은 겉으로는 은하제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면서 전쟁에 따르는 의무는 내버리기 일쑤다. 이러한 무책임한 주전론을 비판하던 양심적인 정치인 제시카 에드워즈는 군사쿠데타 세력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제국과 동맹의 군사적인 긴장이 깨지는 순간

자치령 페잔은 제국과 동맹 사이에서 자치권과 장사할 권리를 인정받은 조그마한 행성이다. 제국과 동맹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덕분에 페잔은 사이에서 막대한 이윤을 챙긴다. 또한 장사꾼들의 행성답지 않게 인류의 발상지 지구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펼치는 사이비 종교 지구교의 본산이기도 하다. 다나카 요시키는 어지간히 종교를 싫어했던지, 지구교를 가리켜 "머나먼 과거에 있었던 압제자들의 후예"라고 불렀다.

요약 서술만 읽어도 답답할 정도로 팽팽하게 맞붙던 제국과 동맹의 군사적인 긴장은 군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오글거리는 이름!)이 제국의 실권을 쥐면서 회전하기 시작한다. 로엔그람은 부패한 황제를 끌어내리고 새 왕조의 초대 황제가 된다. 그리고 자유행성동맹에 회유와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동맹은 각자의 정치적 이해득실만 계산하는 정치인들의 난립으로 제대로 된 의사결정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렇기에 로엔그람에 맞설 군사적 재능을 지닌 단 한 사람, 양 웬리만이 자유행성동맹을 지키게 된다. 제국은 비록 썩어빠졌지만 그래도 황제의 명령이 통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동맹은 최악의 결정조차 내릴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크게 보면 <은영전>의 줄거리는 로엔그람과 양 웬리가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서로를 알고 감탄하고 신뢰하게 되는 과정이다. 로엔그람은 양 웬리의 재능을 높이 사서 제국원수의 자리를 제안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기도 한다. 동맹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양 웬리는 은퇴 후 군인연금이나 받아먹으며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나날을 꿈꾸는 지극히 자유로운 개인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둘이 승리와 패배를 주고받는 가운데 군국주의 신분제로 지탱되지만 로엔그람의 개혁 정치로 국력을 회복하는 은하제국과, 비록 민주정치의 체계는 유지하지만 중우정치의 온갖 병폐를 끌어안고 비틀거리는 자유행성동맹이 대조된다. 더구나 은하제국이 양 웬리의 철벽수비를 우회하여 자유행성동맹을 침공하자 부패한 정치가와 무능한 군인들은 일찌감치 도망쳐 버린다. 군사 천재 양 웬리는 이러한 판세를 뒤집어 로엔그람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지만, 동맹의 썩어빠진 정치인들은 양 웬리에게 반역 음모를 뒤집어씌운다.

다나카 요시키는 <은영전> 곳곳에서 전쟁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은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호전적'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명언이다.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과 정치의 본질을 꿰뚫는 명언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국가란 불로불사가 아니며 주체적인 개인이 모여 구성한 것'이며, '정치의 부패란 정치가의 부정축재가 아니라 뇌물을 받은 정치인을 비판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말은 지금도 곱씹을 가치가 있다. 그중 '최악의 민주정치는 최선의 전제정치를 낳지 못하지만, 최악의 전제정치는 일시적이나마 최선의 민주정치를 낳아준다'는 말에도 상당한 통찰이 있다.

로엔그람이 지배하는 은하제국과 양 웬리가 지키는 자유행성동맹간의 대결은 하나의 화두로 압축된다. 좋은 사람이 운영하는 나쁜 제도와 나쁜 사람이 운영하는 좋은 제도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다나카 요시키는 이 문제에 대해 바로 답을 내려주진 않는 것 같다. 결말에서 로엔그람과 양 웬리는 둘 다 요절해 버린다. 동맹은 멸망하지만 정식 국가 지위를 역사적으로 인정받는다. 제국에서는 로엔그람의 갓난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지만 그 갓난애가 좋은 황제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렇듯 <은영전>은 그 어느 쪽에도 명확한 승리를 안겨주지 않는다. 다나카 요시키가 살아온 일본은 150여 년의 짧은 역사 속에 봉건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를 모두 겪었다. 좋은 제도가 반드시 이상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며, 나쁜 제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모조리 악당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겹도록 겪었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니다. 길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은하영웅전설 완전판 스페셜 박스세트 - 전15권

다나카 요시키 지음, 김완 옮김, 미치하라 카츠미 그림,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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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은하영웅전설, #양웬리, #로엔그람,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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