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성노동자의 대나무숲, '어디가서 말하겠어' 23일 오후 7시 30분,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성미산마을극장 지하에 ‘대나무숲’이 열렸다. 진짜 대나무 한 그루 없는 이 대나무숲의 이름은 ‘어디가서 말하겠어’. 한국여성민우회가 20?30대 여성의 노동 경험담을 풀어내기 위해 주최한 행사다.
▲ 여성노동자의 대나무숲, '어디가서 말하겠어' 23일 오후 7시 30분,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성미산마을극장 지하에 ‘대나무숲’이 열렸다. 진짜 대나무 한 그루 없는 이 대나무숲의 이름은 ‘어디가서 말하겠어’. 한국여성민우회가 20?30대 여성의 노동 경험담을 풀어내기 위해 주최한 행사다.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23일 오후 7시 30분,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성미산마을극장 지하에 '대나무숲'이 열렸다. 진짜 대나무 한 그루 없는 이 대나무숲의 이름은 '어디가서 말하겠어'. 한국여성민우회가 20·30대 여성의 노동 경험담을 풀어내기 위해 주최한 행사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올해 청년 노동 담론에서 소외되고 있는 20·30대 여성 노동자 20명을 인터뷰했다. 이날 행사에선, 그중 6명의 여성이 무대에 올라 어디서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자신의 노동 경험을 말했다. 비밀을 숨겨줄 대나무는 없었지만, 30여 명의 청중이 함께했다.

귀 막고, 눈 감고... 괴로운 '인턴살이'해도 해피엔딩 아냐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교과서에 <시집살이>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그 노래에 '귀먹어서 3년이요, 눈 어두워 3년이요, 말 못해서 3년'이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3개월짜리 계약서를 3번 쓰면서 9개월을 보냈던 인턴살이를 노래한다면 '귀먹어 3개월, 눈 어두워 3개월, 말문 막혀 3개월 그리고 내내 앉은뱅이 마냥 열서너 시간 앉아 일했던 9개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건 홍개(활동명)씨다. 홍개씨는 한 회사에서 9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했다. 그나마 처음엔 인턴으로, 다음엔 정규직으로 면접을 보고 결국 인턴으로 합격했다. 홍개씨는 면접이 "마치 세자빈을 뽑는 것 같았다"고 했다. 지원자의 능력과 경력을 치열하게 검증하는 드라마 속 면접 장면은 현실이 아니었다. 인사담당자는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물었다.

어렵사리 시작한 인턴 생활은 생각과 달랐다. 인턴의 탈을 썼을 뿐, 업무 강도는 정규직과 다를 바 없었다. 홍개씨는 입사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국가 기관에서 발주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인턴'이 아닌 '연구원'이란 직함이 찍힌 명함도 주어졌다. 당시엔 "내 능력을 믿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거의 두세 달 정도를 새벽에 집에 들어갔어요. 가족들마저 "적당히 빼면서 하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로 매일 늦게 퇴근했지만, '엄마, 이렇게 해야 정규직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하며 첫 계약 기간에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정규직 전환은 되지 않았다. 입사 초기, 상사는 "3개월 후엔 자리가 날 것이고, 늦더라도 6개월 후엔 정규직 전환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약속은 계속 미뤄졌다.

홍개씨는 9개월간 인턴 계약서를 세 번 새로 썼다. 계약서를 쓸 때마다, 상사는 변명과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홍개씨가 야근에 치여 일을 하고 있는 사이, 정규직 공채가 진행된 적도 있다. 부서 내 누구도 홍개씨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사람들에게 저는 인턴만큼 돈 주고, 연구원처럼 사용하는 '가성비' 좋은 사람이 되어있는 거잖아요."

홍개씨는 "일하는 사람을 비용으로만 생각하는 것에 대한 배신감"이 컸지만,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당시 홍개씨는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태였고,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해도 돈이 필요했다. 지난한 인턴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인턴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 정규직 전환이 이뤄졌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이 마냥 '해피엔딩'이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생활은 말그대로 "노답"이었다. 업무 강도는 더 커졌지만, 보상은 적었다. 심지어는 여자 직원에 대한 '사상검증'도 이뤄졌다.

홍개씨는 상사로부터 "여자들은 이렇다던데,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종류의 질문을 종종 받았다. 홍개씨 앞에서 대놓고 다른 여직원에 대한 외모품평을 늘어놓은 적도 있다. 홍개씨는 '시집살이'처럼 이 모든 것을 그저 참고, 견뎌야 했다.

여직원은 동료가 아닌 '꽃' '우리 회사의 꽃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칭찬같지만 전혀 칭찬이 아닌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여성은 직장에서 '동료'로 인정받지 못하며, 끊임없는 외모 품평을 경험한다.
▲ 여직원은 동료가 아닌 '꽃' '우리 회사의 꽃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칭찬같지만 전혀 칭찬이 아닌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여성은 직장에서 '동료'로 인정받지 못하며, 끊임없는 외모 품평을 경험한다.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대기업에 존재하는 '섬',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해온 그림자(활동명)씨의 경험도 비슷하다. 그림자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책상의 크기부터 차이가 났다"고 했다. 그림자씨는 '독서실'같이 책상이 촘촘히 배열돼 있는 공간에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일했다.

비정규직은 물리적 여유뿐만 아니라, 심적 여유도 부족했다. 늘 계약 연장과 정규직 전환을 기다리며 불안에 떨어야 했기에, 부당하고 속상한 일을 겪어도 그저 참고 견디는 이들이 많았다. 한 대기업은 6개월 계약직으로 채용 공고를 냈지만, 막상 면접에 가니 1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한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같이 있던 지원자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았습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아닌지 되묻고 싶습니다. 영혼을 좀먹는 일자리에 제시간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괴롭습니다. 이게 저의 현실이고, 이 땅의 현실이고, 고졸 30대 여성의 현실입니다."

'행동강령'에 술 시중, 성희롱까지... 뒤틀린 직장 문화

'여성'이기에 겪는, 성적 위계질서를 이용한 차별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도 터져 나왔다. 클로이(활동명)씨는 영상을 통해 '소심한 성희롱 대처법'을 소개했다. 클로이씨 또한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클로이씨는 "내게도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랐었다,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 무기력하고 절망스러웠다"며, "그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내일도 출근을 해서 그 '망할 놈'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것이었다"고 토로했다.

클로이씨는 퇴사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피해자인 클로이씨가 잃을 것은 많아도, 가해자는 그렇지 않았다. 결국 고민 끝에 "모든 것을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회사생활을 '할 만큼 한' 친구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안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잘못한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후 클로이씨는 '소심한' 방법으로 가해자에게 가해 사실을 상기시켰다. 성범죄자 관련 뉴스가 나올 때면 동료들과 큰 목소리로 욕을 했고, 여성 단체에서 온 소식지를 사무실에 붙여놓기도 했다.

말이야 방구야? 이날 행사장 한 켠에 마련된, 직장생활을 하며 들었던 황당한 말을 소개하는 ‘말이야 방구야’ 전시에서도 성희롱 발언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OO씨는 (손끝으로 S라인을 만들며) 이렇게 하면 사회 나가서 훨씬 예쁨 받을 거다”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 말이야 방구야? 이날 행사장 한 켠에 마련된, 직장생활을 하며 들었던 황당한 말을 소개하는 ‘말이야 방구야’ 전시에서도 성희롱 발언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OO씨는 (손끝으로 S라인을 만들며) 이렇게 하면 사회 나가서 훨씬 예쁨 받을 거다”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말이야 방구야? 실제 여성들이 직장에서 전해들은 말들.
▲ 말이야 방구야? 실제 여성들이 직장에서 전해들은 말들.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실제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노새(활동명)씨는 20·30대 여성 노동자 2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36번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장 한 켠에 마련된, 직장생활을 하며 들었던 황당한 말을 소개하는 '말이야 방구야' 전시에서도 성희롱 발언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OO씨는 (손끝으로 S라인을 만들며) 이렇게 하면 사회 나가서 훨씬 예쁨 받을 거다"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비정규직 여성에게) 여자는 사실 집에 있으면 되지 왜 나와서 이런 일 하는지 모르겠다", "남자를 뽑고 싶어도 똘똘한 애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여자를 뽑았다", "OO씨는 남자가 되고 싶은 거야? 왜 이렇게 머리를 짧게 짤랐어?" 등 성차별적인 발언도 여럿 있었다.

직장 내 군대문화도 소개됐다. 남성 비율이 높은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 똘(활동명)씨는 입사 초기, 사수로부터 회사 안에서 지켜야 할 '행동강령'에 대해 전해 들었다. '초등학교 때나 해본' 화장실 갈 때 허락 받기, 상사가 나갈 때는 문을 열어주기, 상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기 등이 그 내용이었다.

"'모든 회사들이 다 이렇고, 사람들은 이걸 견디면서 다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판단이 잘 안 섰어요. 그때 당시 취업도 잘 안 되던 시기였는데, 정직원 제의를 뿌리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결국 똘씨는 정규직 제안을 거절하고,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불편한' 상황이 존재했다. 회식이 있을 때면 사장의 양 옆자리엔 꼭 여자 신입 직원을 앉혔다.

"그 불편한 자리에서, (신입 여직원들이) 앉아서 가시방석처럼 술을 먹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작년엔 저 자리에 있었는데'하며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 마음을 아니까. 그런데, 이기적이긴 하지만 '난 벗어났다'라는 해방감에 기분이 좋기도 하거든요. 이런 미안한 마음이 제 잘못은 아닌데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미안한 마음은 누구의 잘못인가, 차별받지 않는 직장 원해"

키워드로 본 청년, 여성, 노동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모구씨가 20,30대 여성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결과를 요약 설명하고 있다.
▲ 키워드로 본 청년, 여성, 노동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모구씨가 20,30대 여성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결과를 요약 설명하고 있다.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 모구(활동명)씨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진행한 20·30대 여성노동자 인터뷰 결과를 '남자는 스펙', '롤모델의 부존재', '존중은 회사에 없는 것', '여직원은 동료가 아니라 그냥 꽃' 등의 문장으로 요약했다.

그러면서 "임금 적고, 길게 일하는 문제는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전제로 하되 또 다른 방안을 고민해봤다"며, ▲청년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청년 구직 수당제 ▲채용 결과까지 투명하게 공개되는 평등이력제 ▲업무 시간 외 연락 금지 ▲신입 직원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연차 유급 휴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모든 참석자들이 꼽은 '괜찮은 직장의 조건'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월급이 200만 원 이상인 직장, 탄력근무와 육아 병행이 가능한 직장, 정규 근무 시간에만 일을 하는 직장, 회사와 직원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직장 등 다양한 바람이 소개됐다. 하지만 그 모든 바람은, 한 참석자가 마지막으로 말한 조건으로 수렴됐다.

"섹슈얼리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는 직장을 원합니다."

'괜찮은 직장의 조건'  이날 행사장 입구엔 '괜찮은 직장의 조건'을 쓰는 공간이 마련됐다. 한 참석자가 남긴 메모.
▲ '괜찮은 직장의 조건' 이날 행사장 입구엔 '괜찮은 직장의 조건'을 쓰는 공간이 마련됐다. 한 참석자가 남긴 메모.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자, #여성 , #노동, #인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