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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9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된 데는 제도적 문제도 있지만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거수기로서 역할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신기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9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된 데는 제도적 문제도 있지만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거수기로서 역할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 남소연

헌법은 지난 1948년 7월 제정된 이래 총 9차례에 걸쳐 수정됐다. 하지만 헌법으로서(혹은 국민에게) 의미있는 개헌은 지난 1960년 3차 개헌('내각제 개헌')과 지난 1987년 9차 개헌('직선제 개헌')뿐이다. 나머지는 권력자들을 위한 개헌이었다. 3차 개헌에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사전허가나 검열을 금지하는 등 기본권을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되긴 했지만, 헌법으로서(혹은 국민에게) 의미있었다는 두 차례 개헌조차도 내각제나 직선제, 5년 단임제 등 권력구조 개편이 핵심이었다.

최근까지 국회와 정치권 안팎에서 진행되어온 개헌론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확고한 개헌론자인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개헌을 말하다>(2013년)라는 저서에서 "헌법의 기본권 조항을 더욱 확장하고 적극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우 의원뿐만 아니라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등 여야 개헌론자들의 관심은 권력구조 개편에 쏠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헌법의 구성상 '기본권'이 '권력구조'(통치구조)나 '경제'보다 앞서 배치돼 있는 것과도 모순된다.  

그런 가운데 4선의 신기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최근 <기본권 개헌을 위한 방향과 과제>라는 정책보고서를 낸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기본권 생활 개헌'을 본격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권력구조 개편에만 머물던 개헌 논의 수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추천사에서 보수의 이재오 의원이 "이 책의 내용들을 가지고 밤낮으로 토론해보고 싶다"라고, 진보의 노회찬 전 의원이 "개헌 논의의 균형을 바로잡는 쾌거다"라고 호평했을 정도다.

"그동안 여당은 청와대 거수기에 안주해왔다"

신기남 의원은 9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의회주의자라면 누구나 개헌에 찬성할 수밖에 없다"라며 "그런데 권력구조만 다루다 보니까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세력들이 개헌에 반대한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동안 개헌론은 많았지만 개헌에 이르지 못한 이유와 관련, 그는 '반성문'에 가까운 발언들을 쏟아냈다. 자신을 포함해 '여당 의원들의 역할'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신 의원은 "대통령들은 개헌이 국정을 운영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여당 의원들이 청와대에 굴복하면 안 된다"라며 "제왕적 대통령제가 된 데는 제도적 문제도 있지만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거수기로서 역할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도 개헌을 꺼려하고 만류했다. 집권당으로서 혜택을 누리는 데에만 만족하고, 한국 정치를 의회민주주의로 정상화할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고치는 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당 의원들이 근시안적이었고, 청와대의 거수기였다."

신 의원은 "여당 중진의원들과 지도부는 총리나 장관으로 입각하거나 산하기관, 공기업 등의 임원 인사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느냐에만 힘을 기울이다 보니 청와대에 굴종적일 수밖에 없었다"라며 "국회의 권위와 의회민주주의를 세우고 제도와 관행을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거수기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왔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신 의원은 "야당은 정권을 쟁탈하기 위해 맹공을 가하고 여당은 매사 대통령과 청와대 보호에 진력을 다한다"라며 "이렇게 여당이 제 구실을 못한 것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신 의원은 "대통령이 공공연하게 장관들 앞에 놓고 일장 훈시하면서 누구를 찍자 여당은 자신들이 뽑은 원내대표를 사퇴시키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라며 "의회민주주의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완전히 굴복한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당이 거수기 관행을 되풀이한 것이다. 심각한 사태다.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다. 개헌해야 한다는 압도적 여론에도 개헌이 진척되지 않는 것이나 유승민 사태와 같이 의회민주주의가 굴욕당하는 것은 여당 의원들의 잘못된 행태 때문이다.

우리 진보세력도 이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두 번에 걸쳐 집권했지만 우리 대통령을 잘 감시하고 인도해 우리 당이 주장했던 내용을 잘 수행하도록 독려했어야 하는데 관행처럼 거수기로서 역할하고, 굴종적 태도를 취했다.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다."

"제헌헌법 이후 한 번도 헌법을 고친 적이 없다"

 최근 <기본권 개헌을 위한 방향과 과제>라는 정책보고서를 낸 신기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기본권 생활 개헌'을 본격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권력구조 개편에만 머물던 개헌 논의 수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최근 <기본권 개헌을 위한 방향과 과제>라는 정책보고서를 낸 신기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기본권 생활 개헌'을 본격적으로 제기함으로써 권력구조 개편에만 머물던 개헌 논의 수준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 남소연

신 의원은 "실질적이고 진정한 개헌은 1960년 4·19혁명과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한 개헌 두 번뿐이고, 나머지 개헌은 권력층 편의대로 주무른 것이다"라며 "4·19혁명이나 6월항쟁 이후에 한 개헌도 급급한 나머지 제헌헌법이 가진 문제들을 제대로 망라하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신 의원은 "헌법 제정 당시 유진오 박사는 의원내각제로 가려고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거부해 헌법기초 위원들이 하루 아침에 줄을 긋고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어 버렸다"라며 "미국 등 몇 나라가 예외이긴 하지만 민주국가들은 대부분은 의원내각제가 상식이다"라고 말했다.

"4·19혁명 직후 3차 개헌을 통해서 의원내각제로 갔다. 이것의 의미가 큰데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인해 다시 대통령 중심제로 되돌아갔다. 지금 헌법은 5·16 헌법, 제3공화국 헌법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6월항쟁 이후에도 대통령 중심제라는 권력구조는 바꾸지 않고 대통령 선거방법만 직선제로 바꾸었다. 너무나 당연한 대통령 직선제를 다시 되찾은 것 외에 마지막 개헌(9차 개헌)에서 얻은 것은 없다."

신 의원은 "9차 개헌은 각 당에서 차출된 8명의 의원들이 한 달 만에 만든 것이어서 기본권 등 제헌헌법의 미비한 점을 고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라며 "기본권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제헌헌법 이후 헌법을 한 번도 고친 적이 없었다"라고 아프게 꼬집었다. 실제로 그동안 진행된 개헌 논의에서도 기본권에 천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가 지금 기본권에 중점을 둔 개헌을 제기하는 이유다.   

"헌법의 진정한 존재 가치는 이처럼 기본권 수호의 '권리장전'이자 공동체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회통합적 역할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본질'에서 개헌의 논거를 찾아야 한다. (중략) 따라서 이번 개헌 추진은 정치세력 위주의 '권력 개헌'이 아닌, 국민 기본권 중심의 진보적인 '민생 개헌'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최근까지 정치권에서 나오는 개헌 발언은 온통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견해뿐이다. 이미 과잉 상태인 권력구조 담론에 여론은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정치권의 선도세력이 담론의 초점을 이동시켜 기본권 분야를 집중적으로 이슈화함으로써 개헌에 대한 국민의 호감과 광범위한 공감대를 견인하는 방식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중략) 현재의 개헌 논의는 선후가 뒤바뀌었다."(<기본권 개헌을 위한 방향과 과제>, 36~37쪽)

신 의원은 "기본권 개헌과 관련해 개별사항들을 지적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본권 개헌을 제시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라며 "내용이 미흡할 수 있지만 내 지식과 생각, 경험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크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기본권을 중시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

또한 신 의원은 "우리나라는 국가주의적인 색채가 너무 강해 국민의 기본권이 경시되는 경우를 변호사 시절 법정에서 많이 봤다"라며 "국회에 들어와서도 그 근원을 따져 보니 국민의 기본권을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의식이 상당히 약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의식이 약한 원인 중 하나가 헌법 자체의 미흡함이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대로) 규정해줘야 하는데 기본권 조항도 적고 불충분하다. 헌법 자체가 워낙 미흡하고 불충분하니까 좋은 헌재 판결이 안나온다. 보수적인 헌재, 보수적인 판결로 흐를 수밖에 없다."

신 의원이 제기하는 '기본권 개헌'에는 ▲ 남녀의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규정 ▲ 가사와 직장 생활의 양립을 보장하는 모성보호 조항 ▲ 미혼모의 특별한 보호 ▲ 어린이집 폭행 등을 방지하기 위한 아동인권 조항 신설 ▲ 공무원의 노동3권 보장 ▲ SNS시대의 정보기본권 신설 ▲ 군인 기본권 보호 ▲ 평시 군사법원 폐지 ▲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허용 ▲ 장애인의 실질적 평등권 강화 ▲ 토지공개념의 명문화 등이 포함돼 있다.

남녀 동일임금 규정이나 평시 군사법원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허용 등은 상당히 논쟁적인 사안이다. 신 의원은 "명문규정을 두는 등 헌법이 구체적으로 역할해야 인권의식도 높아진다"라며 "70년이 지난 헌법도 이제 새로운 시각으로 보강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저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청산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해 시급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쉽지는 않다. 이것을 돌파할 능력이 우리 사회나 정치권에 있을지 우려된다. 국회의 권능이 강화되는 것을 싫어하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보수언론과 현직 대통령을 품은 세력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권 개헌에 반대할 명분이 있을까? 정치적 입장 차이 때문에 권력구조 개헌이 어렵다면 그것보다 기본권 개헌을 먼저 할 수 있지 않을까?"

신 의원은 "국가주의자, 국가우선주의자는 국민의 기본권을 강화하자는 안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고, 우리 사회에 국가주의가 강한 것도 사실이다"라며 "하지만 남녀 동일임금이나 선출직 동수, 대체복무 허용 등이 논란이 많다면 논쟁하자, 그 논쟁을 통해서 사회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본권을 중시하는 것이 진정한 보수다"라고 강조했다.

"아이슬란드처럼 국민 참여형 개헌으로 가자"

신 의원은 <기본권 개헌을 위한 방향과 과제>에서 '아이슬란드 사례'를 들었다.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함께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위기 타개와 국가 쇄신을 위해 국민들이 참여하는 개헌안을 만들기로 하고 지난 2010년 '개헌포럼'을 출범했다. 정치권은 개헌 논의 과정을 국민에게 공개했고, 국민들은 포럼과 SNS를 통해 의견을 냈다.

이렇게 마련된 개헌안은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헌법심의회의 숙의를 2년간 거쳤고, 그 결과물(개정헌법 초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그리고 지난 2012년 11월 국민투표를 통해 '아이슬란드 경제를 외부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개정헌법이 확정됐다. <뉴욕타임즈>는 이를 두고 "세계 최초의 집단지성을 통한 개헌작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신 의원은 "아이슬란드는 개헌을 통해 국가 위기를 극복한 사례다"라며 "더 경쟁력있는 국가, 더 올바른 국가로 만들기 위해 헌법을 좀 더 나은 헌법으로 만드는 것부터 출발했고, 이것은 국민의 의식을 새롭게 하고 국력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라고 평가했다.

"헌법기초심의도 정치권이 독점하지 않았다. 헌법심의회에 시민들과 전문가를 참여시켜 헌법 개정안을 기초하고 심의했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통해 국가제도를 효율적으로 만들었고, 국민 의식도 새롭게 진작시켰고, 국민을 다시 뭉치게 했다."

신 의원은 "우리에게는 국가, 인권, 역사, 미래 등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우리 국가 노선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고민하는 계기가 없었다"라며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국민들은 어디에 위치해 있나, 어디로 가야 하나 등을 광범위하게 토론할 때가 됐다"라고 강조했다. 즉 아이슬란드처럼 '국민 참여형 개헌'을 시도하자는 제안이다.

신 의원은 "권력구조 개편이든 기본권 개헌이든 개헌 논의가 국가를 총체적으로 재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라며 "다음에는 의회민주주의에 강한 소신을 가진 대통령이 나와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대통령이 개헌에 앞장섰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신기남#기본권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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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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