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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의 '상화 시비'
 대구 달성공원의 '상화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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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시비는 대구 달성공원에 있는 '상화 시비'이다. 시비의 제자 '尙和 詩碑(상화 시비)'는 서동균이 썼고, 본문은 11세 소년 이태희의 글씨로 새겼다.

대구가 낳은 서예 대가 서동균은 1919년 만세운동 때 일제에 의해 투옥된 경력이 있고, 이태희는 시인의 3남이므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 저항시인을 기리는 시비에 글씨를 남길 만한 충분한 자격의 소유자들이다.

시비 뒷면의 글은 수필가 김소운의 것이다. 1947년 가을 어느 날, 대구의 문인들을 만난 김소운은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를 세우는 것에 대해 제안을 했고, 그렇게 하여 1948년 3월 14일 드디어 제막식이 열리게 되었다. 제막식 때 경과 보고도 김소운이 했다.

윤장근의 <대구 문단 인물사>에 따르면, 본래 시비에는 제호, 시문, 건립 연월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입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시비 제막 때 보니 뒷면에 김소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김소운이 임의로 자기 이름을 써넣었던 것이다. 이 일은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상화 시비>로 문학사에 이름 남긴 김소운은 친일 문인

게다가, 상화 시비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한 가지 더 있다. 김소운이 <친일 인명 사전>에 당당히(?) 등재되어 있는 친일 문인이라는 사실이다. 식민지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한 대표적 민족시인의 시비에 친일 문인이 헌사를 남기고, 제막식 행사도 그가 주도했다니 '민족의 정신사'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경우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친일 예술인들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유지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래 일제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상화 시비>의 주역 김소운도 줄곧 '국정 국어 교과서'에 수필이 게재되어 어린 학생들의 마음속에 '예술 거장'으로 각인되어 왔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저학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현상은 '결과주의'를 재생산한다. 과정이야 어쨌든 지금 당장 그의 실상이 어떠한가에 주목하는 민심을 낳는다. 정의는 사라지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속적 가치관이 세상을 주름잡게 된다.

경북 고령에 있는, 가야금 형상의 우륵박물관과, 들어가는 입구의 악기를 켜는 우륵 좌상
 경북 고령에 있는, 가야금 형상의 우륵박물관과, 들어가는 입구의 악기를 켜는 우륵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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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은 어떤가? 그는 551년(진흥왕 12) 신라에 투항했다. 자신의 조국 대가야가 562년(진흥왕 23)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끈 신라군에게 멸망당하기 11년 전이었다. 이를 삼국사기는 우륵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國亂) 악기를 들고(操樂器) 신라에 투항했다(投我)'고 증언하고 있다.

이미 우륵은 대가야의 가실왕으로부터도 총애를 받고 있었다. '가야국의 가실왕이 12현금(가야금)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열두 달의 음률을 본떴다. 가실왕은 우륵에게 명하여 그 악곡을 짓게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우륵은 '어지러워진' 조국을 배신했다.

고령읍에서 우륵이 머물면서 12곡를 창작했다고 전해지는 금곡리로 들어가는 산자락 모퉁이 위에는 우륵기념탑과, 탑 바로옆에 우륵을 제향하는 사당(영정각)이 있다. 사진의 우륵기념탑도 우륵박물관처럼 가야금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탑 뒤편에서 보면 금곡리와 박물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령읍에서 우륵이 머물면서 12곡를 창작했다고 전해지는 금곡리로 들어가는 산자락 모퉁이 위에는 우륵기념탑과, 탑 바로옆에 우륵을 제향하는 사당(영정각)이 있다. 사진의 우륵기념탑도 우륵박물관처럼 가야금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탑 뒤편에서 보면 금곡리와 박물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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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은 550년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여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아 증축한 뒤 군사 1천을 주둔시켰다. 그리고 진흥왕은 우륵이 투항한 551년 정월,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나라를 연다'는 뜻의 이 연호는 진흥왕의 기세등등한 호기를 잘 보여준다. 7세에 즉위한 진흥왕은 나이 18세에 접어들면서 천하를 호령할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던 듯하다.

배신은 잊혀지고 예술만 남는다?

이런 정세를 보면서 우륵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구한말 고위 권력자들이 잽싸게 나라를 팔아먹고, 식민지 말기 유명인사들이 친일파로 변신한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근대사인 일제 강점기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질타와 분노하면서 우륵에 대해서는 잊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부일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똑 같이 잊고, 그들을 '훌륭한 예술가'로 칭송할 것인가? 배신은 잊혀지고 예술만 남아 칭송받는다면 '예술가의 정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륵기념탐 바로옆의 영정각(우륵 사당)
 우륵기념탐 바로옆의 영정각(우륵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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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기록은 또 하나의 사실을 말해준다. '악기를 들고' 신라에 투항한 것으로 보아 우륵의 조국을 버린 대의명분은 "예술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터이다. 하지만 우륵의 이후 처신을 보면 '겉 다르고 속 다른' 기회주의자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우륵박물관의 게시 내용을 읽어보자. 
 
신라의 관료 개고, 법지, 만덕은 우륵에게서 12곡을 전수받아 5곡으로 줄였다. 우륵은 연주를 듣고난 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樂而不流)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哀而不悲) 과연 바른 음악(可謂正也)"이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탄했다.

박물관은 이 일을 두고 '우륵이 제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는 것은 제자들의 높은 안목과 창의적인 음악성에 기꺼워하는 명인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망명 음악가의 남모를 고뇌를 보여주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륵이 신라 관료들이 자신의 음악을 대대적으로 개작한 결과물을 듣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 장면을 두고 '제자들의 높은 안목과 창의적인 음악성에 기꺼워하는 (우륵의) 명인다운 모습'이라고 풀이한 박물관의 해설은 우륵에 대한 '예의상의 수사'일 뿐이다.

우륵박물관 내부 전시실 첫머리에서 만나는 '우륵'
 우륵박물관 내부 전시실 첫머리에서 만나는 '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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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그 다음 표현이다. 우륵의 눈물이 '망명 음악가의 남모를 고뇌를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해설이다. 남모를 고뇌는 무엇인가? 자신의 음악을 신라 관료들이 멋대로 고치고 축소했는데도 감동한 양 눈물을 흘리며 찬사를 늘어놓아야 하는 신세에 대한 한탄 때문에 우륵은 눈물을 쏟았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악기를 들고' 신라에 투항했는지 우륵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악기를 들고' 간 것은 음악을 지키겠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게 분명하다. '나라가 어지러워' 제대로 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적국인 신라에 투항한 우륵 아닌가? 자신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 남들보다도 앞서 조국을 배신했던 것 아닌가?

자신 음악을 잃고도 신라 관료들에 아부한 우륵

우륵박물관은 아주 훌륭하다
우륵박물관 입구에 있는 여러 작은 이정표 중 하나에는 왼쪽으로 가면 '우륵의 집'에 닿는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물론 우륵이 실제로 거주했던 집은 아니며, 그저 상상으로 초가 한 채를 지어둔 것이다.
 우륵박물관 입구에 있는 여러 작은 이정표 중 하나에는 왼쪽으로 가면 '우륵의 집'에 닿는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물론 우륵이 실제로 거주했던 집은 아니며, 그저 상상으로 초가 한 채를 지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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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우륵을 비난했다. 그러나 고령의 우륵박물관은 아주 훌륭하다.

우륵박물관에 가면 우리나라 고대 전통 악기들의 모습을 두루 눈에 담을 수 있고, 가야금의 제작 과정, 변천사, 악기를 연주하는 토우상, 고대 벽화 속의 음악 연주 장면, 그리고 가야금이 일본에 전파된 성과까지 아주 세세한 내용들이 단정하게 게시되어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심지어 박물관 옆의 우륵국악기연구원과 뒤의 가야금줄 제작체험장에서는 가야금을 만들고, 연주하고, 가야금 줄을 만드는 것까지 직접 체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4월-9월 중 실시한다.
멸망을 앞둔 조국의 정세에서는 예술 활동이 어려워지자 '악기를 들고' 적국에 투신했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자신의 예술을 잃은 예술가, 그것이 우륵의 정체성이라면 너무 가혹한 평가인가?

자신의 음악을 잃고도 신라 관료들 앞에서 곡학아세의 눈물을 흘리며 감동한 체 처신한 우륵을 '악성'으로 우러르는 일은 타당하지 못하다.

좀 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조 행위가 예술이라면,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도 버리고, 자기 예술의 정체성도 버린 우륵을 '악성' 운운하며 숭앙해서는 안 된다.

'우륵, 조국을 배신한 가야금의 대가' 정도가 적당하다. 예술가의 창작물과 그의 인간 됨됨이를 별개로 보는 인식은 '예술의 인간화'를 발해하는 저급한 결과주의이므로 엄격하게 배척해야 옳다.

우륵박물관에는 '진흥왕이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국원(충주)으로 옮겨 편안하게 연주에만 전념하게 했다'는 게시물이 붙어 있다. 사진은 우륵이 머물렀다는 탄금대가 강 너머로 보이는 충주의 풍경.
 우륵박물관에는 '진흥왕이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국원(충주)으로 옮겨 편안하게 연주에만 전념하게 했다'는 게시물이 붙어 있다. 사진은 우륵이 머물렀다는 탄금대가 강 너머로 보이는 충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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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상화, #우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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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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