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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오래된 낡은 공책 한 권이 있다. 두껍지는 않지만 검정 가죽 표지에 둘러싸여 고풍스럽고 묵직한 분위기를 뽐내는 공책이다. 매년 해밑이면 거의 예외 없이 사무실 자리 이동이 이루어진다.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책자와 수첩, 공책들이 폐지함으로 들어간다. 그런데도 이 공책만은 지금까지 꿋꿋이 살아남아 책꽂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내 단어 공책. 사전을 일일이 들춰보며 고른 단어들을 하나하나 적는 일이 짜릿했다.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내 단어 공책. 사전을 일일이 들춰보며 고른 단어들을 하나하나 적는 일이 짜릿했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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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단어 모음집이다. 나는 단어들을 2004년부터 모으기 시작했다. 그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한 장편소설(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소설이 언제쯤 나올지는 나도 알 수 없다!)을 위해서였다. 소설 문장에, 오늘날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순우리말이나 고풍스러운 한자말 등을 멋들어지게 쓰려는 운산에서였다. 18세기 중·후반이라는 소설 배경에 걸맞은 어휘문체를 나름대로는 구사하고 싶었다.

사전 속에서 새로운 단어 찾을 때마다 짜릿

단어 수집은 대학 시절에 산 낡은 국어사전을 맨 첫 장부터 직접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음에 드는 낯선 말들을 고르는 식으로 했다. 서점엔 '아름다운 우리말 사전' 류의 제목을 단 책들이 많다. 인터넷에도 '사라진 순우리말 단어' 등의 자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그대로 옮겨적는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난생처음 만나는 말이지만,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골라 공책에 적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공책에 단어 하나 하나를 채워 넣을 때마다 내 언어 감각을 이루는 세포들이 소리없이 분열하는 듯했다.

사전 낱장을 넘겨가며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골라 하나 하나 정리하는 일은 2006년 3월 15일자에서 멈췄다. 핑계는 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목줄을 죄오는 직장 일로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때문이었다. 내 미완성 단어 공책에 실린 마지막 단어 세 개는 '부라질', '부룩송아지', '부모구몰'이다. 나는 이들을 공책에 옮겨 적은 뒤로 한 번도 사전을 펼치지 않은 듯하다.

사전을 찾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이 사전을 전혀 보지 않는 건 아니다. <세계일보>가 전국 16~6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 설문조사 결과, 모르는 단어를 만났을 때 60.7%의 성인들이 국어사전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다만 이들이 이용한 건 인터넷 사전(포털 내 사전)이나 스마트폰 사전 앱이었다. 비율이 95.6%나 되니 대다수다.

종이사전을 이용한다는 사람은 3%에 지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사전을 보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해야겠다. 학교라고 다를까. 4~5년 전까지만 해도 교실에서 종이사전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국어사전은 드물긴 했어도 영어사전은 꽤 많았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책장을 펼쳐놓고 밑줄 치는 아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사전 사라진 교실 풍경

내가 작년까지 근무했던 고등학교에 '특이한'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한자사전을 쓰게 하신 한문 선생님이셨다. 수업 시작 즈음이면 각 반 주번이 한자사전이 담긴 바구니를 가지러 교무실에 온다. 주번들이 낑낑거리며 들고 간 사전들은 아이들 한 명 한 명 손에 쥐어졌다. 집에서 사전을 챙겨오라고 해도 변변한 사전 한 권 없는 게 대다수 아이들의 현실이다. 한문 선생님이 통째로 사전을 구비하신 이유일 게다.

이즈음 몇 년 새 사전 보는 아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교사인 나조차 사전을 이용하지 않는다. 교실에서 사전이 사라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3일 오후, 올해 내가 맡은 한 중학교 2학년 교실에 들어가 물어보았다.

"혹시 최근 한 달 사이에 종이사전 이용해 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볼래?"
"종이사전만 손 들어야 해요?"
"그래, 국어사전이든 영어사전이든, 아니면 그밖의 다른 사전이든, 종이로 만들어진 사전을 최근 한 달 사이에 한 번이라도 이용했으면 손 들어봐."

아이들 35명 중에 6명이 손을 들었다. 17%다. 그나마 학생들이기 때문일까. <세계일보>가 전하는 성인 종이사전 이용자 비율 '3%'보다는 훨씬 높았다.

"6명이나 되니 훌륭하다. 그럼 이중에 국어사전을 본 사람 있을까?"

6명의 아이를 번갈아보며 다시 물었다. 2명이 손을 들었다. 내처 집에 국어사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25명이 손을 들었다. 어린이용(초등학생용) 사전인지 일반사전인지도 물었다. 대다수가 어린이용 사전에 손을 들었다. 그야말로 온전한(?) 사전을 가지고 있는 집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전이 없으니 아이들의 어휘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말하기나 쓰기는 단조롭고 상투적이다. 물론 아이들은 끊임없이 소통한다. 쉬는 시간이나 하교길에 아이들이 내뱉는 말들은 엄청나다.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 또한 대표적인 말 공장이다. 자기네만의 카톡방이나 밴드를 만들어 무수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런데도 그 많은 말과 글들은 조각조각 파편화돼 있다. 말이 말을 잡아먹는 형국이랄까. 소통이 불통이 되는 역설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뜻"

영화 <행복한 사전>
 영화 <행복한 사전>
ⓒ 아트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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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을 보았다. 지난 3월 7일, 일본 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다 8개 부문을 수상한 <행복한 사전>(감독 이시이 유야).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15년에 걸쳐 <대도해(大渡海)>라는 이름의 사전 만드는 사람들을 극화한 작품이다. '도해(渡海)'는 바다를 건넌다는 뜻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수천만 개의 단어를 하나하나 수집해 분류하고, 현재 시점에 맞게 일일이 뜻풀이를 하게 만든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단어는 생겨나기도 하고 또 소멸하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의미가 변하기도 하지요.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뜻이죠. 그건 타인과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도해'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전이 되어야 합니다"

주인공 미쓰야 마지메(마츠다 류헤이 분)에게 사전편집부의 고참 편집주간이 전해주는 말이다. <대도해> 편찬의 시작을 알리는 첫 회의 자리에서였다. 마지메는 숫기 하나 없는 언어학 전공자였다. 체질에 맞지 않는 영업 일을 하다가 사전편집부로 발탁되어 왔다. 마지메를 사전편집부로 부른 것은 단어(말)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이었다. 그는 평소 모르는 말을 만나면 사전부터 뒤적였다. 놀이기구를 타던 중 사랑하는 애인이 묻는 말에 사전을 꺼내 대답하려 할 정도였다. 사전 편찬이 그의 천직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행복한 사전>은, 1976년생으로 이미 일본 문학계의 거장 반열에 오른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가 원작이라고 한다. 사전 만드는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 이야기에 갑자기 웬 '배'가 등장할까.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지요. 그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습니다.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과, 누군가와 연결되는 기적을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사전 편찬 일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편집주간은, 장차 마지메의 '좌우명'이 되는 이 멋진 말들을 술에 취해 불콰해진 목소리로 들려준다. 사전을 보는 일은 바다를 건너는 일과 같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가며 낯선 단어를 만날 수 있으니 정말 '기적'인지 모른다. '대도해'라는 말에 담긴 작가와 감독의 주제의식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영화 <행복한사전>
 영화 <행복한사전>
ⓒ 아트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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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쓰여 사람들이 그 뜻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말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오른쪽'은 어떻게 정의할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오른쪽'을 '북쪽을 향하였을 때의 동쪽과 같은 쪽'으로 풀이해 놓았다. 영화에는 주인공들이 편집회의에서 '서쪽을 향했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쪽', '시계의 문자판을 보고 섰을 때 1시에서 5시까지가 있는 쪽' 등으로 풀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베테랑 편집자인 편집주간은 이렇게 풀이한다.

"숫자 10에서 0이 있는 쪽"

좋은 사전을 보면 좋은 뜻풀이를 만날 수 있다. 마지메를 비롯한 '우직한' 사람들의 손끝에서 15년 동안 만들어진 <대도해>가 그렇다. 마지메가 사전 편찬에 생을 거는 데 큰 자극을 준, 기획에서 완성까지 28년이나 걸렸다는 <산세이도 대사림 사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종이사전은 힘이 세다. 종이에 인쇄된 단어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또 다른 단어로 이끈다. '오른쪽'과 '북쪽'을 모르는 아이가 먼저 '오른쪽' 표제어로 가서 '서쪽을 향했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쪽'을 찾은 다음, 자연스럽게 '북쪽'이 있는 페이지로 가서 '서쪽을 향했을 때 오른쪽에 해당하는 방향'을 알게 되는 이치와 같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의 전자식 사전에서는 접하기 힘든 아날로그적인 경험이다. 종이사전에 있는 이 단어 저 단어를 한가하게 만나보라. 그리고 스쳐가는 단어들에게 마음의 손길을 건네보라. 단어 바다를 건너는 어휘력이란 배가 튼튼해지고, 그 배를 부리는 감각도 점차 정교해질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수준 또한 깊고 넓어지리라. 마지메의 선임 편집장이 말한 다음 대사를 읊조려 보라.

단어 바다 속으로 풍덩, 새로운 어휘 만나는 짜릿함 느껴보라

"내 손끝이 단어를 만진다는 건 세계와 접하는 기쁨이라 할 수 있지."

사전은 귀한 들무새다. 우리에게 드넓은 세계를 맘껏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절로 아련해지는 '부라질', '부룩송아지', '부모구몰' 들도 그 귀한 사전이 없었다면 어찌 만날 수 있었겠는가. 갈수록 사람들이 구저분한 말만 쓰는 사특한 세상이다. 당장 서점으로 가 <대도해> 같은 종이사전 한 권 구해보는 건 어떨까. 도스르고만 말기에는 우리네 말글살이가 참 야멸차다.

(집에 종이사전이 있는 독자라면 위 마지막 문단의 다섯 단어들을 어휘 바다인 사전을 여행하며 그 뜻풀이를 만나보자!)


태그:#종이사전, #단어, #<행복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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