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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강기훈 자살방조 무죄'라는 판결 직후 공판에 참석했던 검사는 방청석쪽 출입문이 아닌 법정 앞쪽 판사 출입문을 통해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23년만에 내려진 무죄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사건을 다시 대법원으로 끌고 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14개월동안 진행된 재심 공판 내내 검찰은 1991년의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당시 주장을 그대로 되뇌었으며, 그보다 더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상고 포기를 기대하기에는 검찰이 너무 멀리 와버렸다.

1991년도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인 검찰

'유서대필사건' 강기훈-김기설 필적 감정 결과
 '유서대필사건' 강기훈-김기설 필적 감정 결과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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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6일 재심 결심공판에서 검찰 측 최종진술에 나선 변철형 검사(창원지검 특수부장. 연수원 28기)는 1991년의 주장에서 한발짝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강기훈씨가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썼다는 당시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그에 더해 1992년 대법원 판결 이후 새롭게 더해진 무수한 직접·간접 증거들을 탄핵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2005년 경찰 과거사위에 제출됐고 진실화해위에 의해서도 채택됐던 김기설씨의 전대협노트와 낙서장 등 새로운 필적 자료들이 김씨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진실화해위 조사관이 김기설의 필적자료로 둔갑된 자료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등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아니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까지 말했다.

또한 검찰에 유리하게 나왔던 1991년 국과수 감정은 철저히 옹호하고, 불리하게 나온 2007년과 2013년 국과수 감정은 배척했다. 그는 1991년 감정에 대해 "선입견이 완전히 배제된 공정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진행됐고, 당시 치열한 법정공방을 통해 감정에 대한 신빙성을 부여받았다"고 했다. 반면 2007년과 2013년 감정은 "선입견이 개입된 상태에서 나온 결과물로서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검찰 "김기설 아버지, 돈 받고 말 바꿨다" 주장

특히 검찰은 10년 넘게 지난 시점에서야 "유서는 아들의 글씨가 분명하다"고 밝힌 김씨의 아버지 김정렬씨의 증언을 탄핵하기 위해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했다. 변 검사는 "김정렬이 진술을 번복하기 시작한 시점이 2002년도인 점을 보면 그의 진술 번복은 이 사건 당시 전민련 인권위원장이던 서준식의 도움으로 보상금을 지급받자, 이에 대한 고마움,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순수성을 의심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고 판사 앞에서 말했다.

검찰이 말하는 '보상금'은 2001년 김기설씨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원위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면서 유가족이 받게 된 보상금 2억800만원을 의미한다. 이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자살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다가 돈을 받고 '자살이 맞다'고 말을 바꿨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주장을 법정에서 하면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변호인단은 "극히 유감스럽다"고 항의했다.

이날 변 검사는 마지막에 재판부에 이렇게 요청하면서 최후 진술을 마쳤다.

"피고인(강기훈) 측이 전대협 노트, 낙서장을 김기설의 새로운 필적 자료로 둔갑시킴으로써 결국 현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재심 대상 사건에서의 진행 경과를 잘 모르는 언론과 국민들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공안정국을 타개하고자 필적 감정을 했던 국과수, 재심 대상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 이를 판단했던 사법부가 합작하여 억울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시되 피고인이 전대협 노트, 낙서장을 조작하는 등 관련 증거를 조작하여 국민과 언론을 호도하여 공권력을 불신케 하는 얼마나 크나큰 잘못을 하였는지, 국민과 언론이 알 수 있도록 판결문에 상시 적시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강기훈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날 강 씨는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며 "저는 당사자로 재판받았지만 주변에서 똑같이 아파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 분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고 바람"이라고 말했다.
▲ '유서대필' 강기훈 23만에 무죄 판결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날 강 씨는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며 "저는 당사자로 재판받았지만 주변에서 똑같이 아파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 분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고 바람"이라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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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판부의 최종 판결문은 이런 검사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강기훈씨는 최후진술에서 "재심 법정에서 여전히 과거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검찰에게 한마디 남기고 싶다"면서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다. 국민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검찰이 조롱거리가 된 현실의 책임은 검찰 스스로에게 있다"고 말했다.

강씨의 무죄 판결 직후 함세웅 신부는 "과거 정부가 조작한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다른 사건들은 경찰과 보안사, 기무사, 안기부, 국정원 등이 조작하고 검찰은 하수인으로서 그들이 송치한 것을 받아서 기소하는 꼭두각시 역할을 했지만, 유서대필 사건은 검찰이 앞장서서 조작을 했다"고 비판했다. 함 신부는 "검찰 전체의 사죄를 촉구한다, 검찰 정화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태그:#강기훈, #유서대필, #재심, #무죄,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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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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