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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을 읽고 써 주신 기사를 잘 읽었습니다. 면도날 같은 지적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에 대해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관련기사 : 역사 교과서 논쟁, 더 시끄럽게 합시다)

오해를 없애기 위해 제 신상발언을 하겠습니다. 정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분'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진보 성향의 교원단체 소속 교사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시장주의에 잠식되더라도 교육현장만큼은 사람 냄새가 나고, 정이 살아있는 공동체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교육운동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고, 응원하는 시민입니다.

몰매 맞을 걸 뻔히 알면서도 '불순'한 글을 <오마이뉴스>에 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어떤 분은 제 글을 '내부 반란'이라고 하시더군요. '불순'한 글을 실어주시는 <오마이뉴스>의 넉넉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한겨레> 기사의 제목은 사실 왜곡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지난번 제 글의 초점은 <한겨레>의 보도가 아니라 학계와 언론이 정략적으로 근현대사를 해석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살짝 언급을 하겠습니다.

우선 지난 5월 31일자 <한겨레>에 실린 <뉴라이트 교과서엔 "5·16은 혁명, 5·18은 폭동">이라는 기사는 그 제목부터 사실이 아닙니다(지금은 <'이승만·박정희 독재 미화' 뉴라이트, 역사흔들기 본격화>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교과서포럼이 펴낸 이른바 '뉴라이트 교과서'에서도 분명히 "5·16쿠데타(180쪽)", "5·18광주민주화운동(218쪽)"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구체적 서술에서 눈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용어는 개념의 틀이며, 의미의 감옥이지요. <한겨레>는 사실이 아닌 자극적 표현을 동원하여 특정 교과서와 오버랩시켰고, 저는 그것을 지적한 겁니다. 역사논쟁이 치열한 것도 좋지만 먼저 공정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이 교과서에서 우려되는 대목은 제주4·3사건이나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국가가 민간인에게 저지른 폭력을 단순히 '폭동'으로 기술하는 등 역사적 사실관계를 왜곡할 가능성이다. 이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산업화의 아버지'로 보고 그 시절 이뤄진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은 축소하고, 긍정적인 면은 지나치게 부풀린다는 비판을 받아왔다"는 구절은 그대로 인용하기가 너무 길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식민통치와 군부독재를 미화했다"고 저 나름대로 일반화했던 것인데, 여기에 제 예단이 들어갔다고 비판하신다면 그 부분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최소한 말은 할 수 있어야

정 선생님께서는 "도대체 '사실'과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역사적 '사실'조차도 언제나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줄임) 역사 서술에서는, 아니 그 어떤 글에서도 '사실'과 '가치'는 구분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고 쓰셨습니다. 원론적으로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기억하실 겁니다. 1998년 <월간조선> 11월호는 최장집 교수의 논문에 들어 있는 "6·25전쟁은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표현을 들추어 매카시즘적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앞뒤 문맥을 잘라버리고 특정 단어만을 표적으로 삼아 마녀사냥을 감행하는 <조선일보>의 고전적 수법이죠. 결국 소송전까지 갔고, 재판부는 <월간조선>의 해당호를 발행 금지시켰습니다.

당시에 제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월간조선>의 행태보다, 그걸 바라보는 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모두 대학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이 <월간조선>의 마술에 말려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과 '가치'의 혼동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통일"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말에는 이미 절대선의 가치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6·25전쟁이 통일전쟁"이라는 말이 '불순'하게 들리기도 했던 겁니다.

저는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6·25전쟁은 통일전쟁이었다.(사실) 그러나 그것은 무력을 이용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가치)

저도 이 글 때문에 '그분'들한테 혼나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무슨 말을 못하게 하니까요.

지난번 기사를 쓰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지적이 식민지 시대를 학문적으로 조명하면 뉴 라이트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말려든다는 것입니다. 동의합니다. 충분히 그럴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평가할 만한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이런 게 궁금할 뿐입니다. 뉴라이트가 아니면 식민지 시대를 연구하면 안 됩니까? 식민지 시대의 생활사를 연구하면 안 되나요? 우리가 이 문제에 좀 더 당당하게 그들을 대하면 안 될까요?

1920년대 서울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면 어떨까요? 백화점, 카페, 극장, 댄스홀, 화려한 네온사인의 야경, 쇼핑과 외식을 즐기는 모던보이·모던걸, 헐리우드 영화의 폭발적 인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이것은 뉴라이트 '우빨'들의 주장이 아닙니다. 현행 고교 한국사교과서(삼화출판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284쪽).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구요. 참고로 이 교과서는 <조갑제닷컴>이 '좌빨' 교과서로 낙인 찍은 책입니다. 또한 필자들의 신상을 책으로 정리해서 각 학교에 배포하는 친절까지 베풀었죠.

저는 이런 서술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민족해방운동의 가치를 손상시킨다고 보지 않습니다. 일제가 없었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했을 일들이고, 대중이 식민지'적' 자본주의에 취해있을 때 만주에서 추위, 배고픔, 외로움을 견디며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운 분들은 더욱 고귀한 것이니까요. 역사에서 '사실'과 '가치'를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구분하기가 애매한 경우도 있겠죠. 저는 역사해석의 태도와 지향성을 말한 것입니다.

'화이트 콤플렉스'?

만약 저의 지난번 기사를 '그분'들이 읽었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북한을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들겠다는 것인가? 바보인가? 순진한 것인가? 이런 인물이 교사라니 어린 학생들이 걱정이다. 친북좌파 교과서만 문제가 아니야. 주사파가 될 위험이 있으니 북한에 대해서는 입과 귀를 닫아야지…."

이런 걸 '레드 콤플렉스'라고 하지요? 혹시 진보 진영에는 식민지 시대와 뉴라이트에 대해 이런 증상이 없을까요? 세상을 살아갈수록 마음에 와닿는 말이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태그:#사실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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