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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5년째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직업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현행 세계사교과서에 필자로 참여한 터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교과서 필자로서 요즘 재연되고 있는 한국사교과서 논쟁에 대해 몇 마디를 적고자 한다. 

사실이 아닌 추측으로 기사를 쓴 <한겨레>

5월 31일자 <한겨레>의 '뉴라이트 교과서엔 "5·16은 혁명, 5·18은 폭동"' 기사 화면 갈무리.
 5월 31일자 <한겨레>의 '뉴라이트 교과서엔 "5·16은 혁명, 5·18은 폭동"' 기사 화면 갈무리.
ⓒ 한겨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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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믿었던 사람들이 상식 밖의 행태를 보일 때 느끼는 실망은 그 무엇보다 크다. 내년부터 사용할 고교 <한국사교과서>(교학사)에 대한 <한겨레>의 최근 보도가 그렇다. 지난 5월 10일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역사교과서 검정결과를 발표하고, 그 후속 조치로 현재 수정·보완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8월 말에 최종본이 나올 예정이다.

그런데 <한겨레>의 기자들은 무슨 신통력을 지녔는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해당교과서가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식민통치와 군부독재를 미화했다는 것이다(5월 31일자 <한겨레>의 해당 기사 '뉴라이트 교과서엔 "5·16은 혁명, 5·18은 폭동"'을 자세히 읽어보면 교학사의 한국사교과서에 문제의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요 필자들의 성향을 볼 때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얘기이다).

교과서를 집필할 때에는 교육부가 지정한 '편수용어'를 써야 한다. 만약 그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검정에서 탈락하거나, 설사 통과를 했더라도 수정을 해야 한다. <한겨레>가 주장하는 대로 해당 교과서가 국민정서에 어긋나는 표현을 썼다면 몇 단계에 걸쳐 걸러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100보, 200보를 양보하여 상식 밖의 교과서가 최종 합격을 하더라도 교육현장에 있는 교사들에 의해 결국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교사들이 바보가 아니다. 또한, 교과서가 검정에서 탈락하면 해당 출판사는 막대한 개발비용을 날리게 된다. 출판사 편집인들이 바보가 아니다. 검정교과서 제도의 개념과 운영원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한겨레>의 이번 행태는 반일 민족주의에 기댄 '황색 저널리즘'이다. 미래 지향적인 정치 이념을 친북 이데올로기로 몰아가며 마녀사냥을 일삼는 수구세력의 행태와 다를 것이 없다. <한겨레>는 정정 보도문을 내고, 해당출판사와 필자들에게 사과하기 바란다. <한겨레>가 그 정도의 품성은 갖춘 언론이라 믿는다. 교과서 최종본이 나온 뒤의 사과는 구차하다.

좌파 민족주의와 뉴라이트를 넘어

지난 2004년,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권철현 한나라당 의원이 "금성출판사의 고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적이고 좌파적으로 기술됐다"고 주장한 이래 보수 세력은 교과서의 역사서술을 비판하며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켜왔다. 이번에 소동을 일으킨 <한겨레>의 보도에는 지금까지 수세에 몰렸던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의도도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싸우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이렇게 되풀이되는 한국사교과서에 대한 논쟁의 밑바닥에는 '좌파 민족주의'(진보)와 '뉴 라이트'(보수)의 서로 다른 역사인식이 깔려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로 보려는 시각과 식민지 근대화와 산업화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역사인식의 차이는 현실 정치 구도와 맞물려 사회갈등의 토대가 되고 있다. 가령, 여야 정치권이 이승만, 박정희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반가운 일이지만, 문제는 두 진영이 근현대사 해석을 상대 진영에 대한 정치적 공격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고 하면 '친북 좌파세력'으로, 식민지 시대를 학문적으로 조명하려 하면 '반민족 친일세력'으로 여론몰이를 한다. 여기에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의 행태가 다르지 않다. 이성적 토론은 없고, 감정적인 기 싸움만 있다. 편을 가르면 행동의 일관성이 생기고, 조직의 결집이 강화되는 법이다.

이런 갈등을 줄이려면 두 진영이 솔직해져야 한다. 상대진영이 정말로 '친북 좌파세력' 또는 '반민족 친일세력'이어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그들은 이런 사실을 서로 다 알고 있다. 그들은 적대적 공존관계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학자들만이라도 그래야 한다. 역사를 해석할 때 '사실'과 '가치'를 냉정하게 구분하고, 생산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전공자의 정체성과 자존심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런 논쟁은 소모적이고, 사치스러운 것이다. 우리 앞에는 더 중요한 사회현안들이 많다. 올여름 전력부족 사태를 어떻게 대처할지,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 갈등은 어떻게 풀어갈지, 바닥난 어린이집 보육지원비는 어떻게 조달할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때로는 정치인과 역사전공자들이 고급 한량으로 보일 때가 있다.


태그:#한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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