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수시 군자동 165번지에 가면 여수향교가 있다. 향교 뒤뜰에 가면 '기실비'가 있는데 "강희, 옹정, 건융연간의 세 번에 걸쳐서 삼복삼파( 三復三罷)라는 사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복현 삼파현이란 여수가 이조 때 순천부로부터 '세 번 독립 현이 되었다가 세 번 깨졌다'는 뜻이다.

 

이씨조선이 개국하여 전국에 교지를 반포하자, 고려말부터 여수현령으로 있던 오흔인(오한림)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하고 불사이군(한 사람이 두 명의 왕을 모시지 않는다)의 절개를 지켜, 이태조의 칙사를 여수현성(석창성)에서 맞지 않은 채 관직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이태조는 태조5년(1396) 10월 전국의 행정구역을 새로 제정하면서 여수현을 역향(逆鄕)으로 규정하여 혁파하고 순천부에 귀속시켰다. 이때부터 여수라는 지명자체도 없어지고 '원여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옛날의 지방제도인 주, 목, 부, 군, 현에는 보통의 양민들이  살고 '향'이나 '부곡(部曲)'에 사는 사람들은 천민계급이 사는 고장을 일컫는 말이다. 이태조가 여수현을 순천부에 예속시키면서 이 고장은 천민이라는 이유로 순천과는 혼인길도 끊겼다.

 

학대와 모멸의 대상이 된 원여수의 율촌부곡, 소라부곡, 진례부곡, 적랑부곡, 삼일포향은 성종 10년(1479)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자 더욱 어려운 방향으로 고통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같은 국난을 당해서는 순천부도 좌수영의 통솔을 받아 별탈없이 지냈지만 평화시에 접어들자 이들 양관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쌓이기 시작했다.

 

까닭은 순천부사는 비록 종4품인 당하관이지만 조정에 직속해 여수지방까지를 다스리는 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본관이다. 반면 전라좌수사는 군사적으로는 순천부사를 통괄할 수 있는 정3품의 당상관이라지만 행정에서는 실권이 없는 한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서로 시기와 갈등으로 지새기 일쑤여서 주민들만 고통을 받아야 했다.

 

예를 들면 여천군 율촌면은 옛날부터 밤이 많다하여 율촌이란 지명이 붙었는데, 좌수사가 매년 밤으로 세공을 받아들이면서 수량이 모자라면 순천부에 책임을 물었다. 화가 난  순천부사 이봉징은 밤중을 이용해 인근 주민들을 동원해 밤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 당시 순천부와 좌수영과의 불편한 관계를 경종대왕실록 권 39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내고 있다.

 

"여수현을 혁파하여 순천부에 예속시킨 뒤에도 좌수영에는 그 구진(舊鎭)이라는 이유로, 순천부에서는 관할이라는 이유로 각기 세금을 호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한 고을 백성으로서 두 고을에 속한 것 같은 이중부담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한다."

 

여천군 율촌면 출신 정종선의 '복현상소문'을 보면 그 고통이 얼마나 가혹했는가를 알 수 있다.

 

"여수5면은 좌수영과 순천부 사이에 끼어있는데 순천부에서는 좌수영 밑에 있다하여 잘 돌보지 아니하고 좌수영에서는 순천부 관할이라 하여 사랑하지 아니하니 의지할 곳 없는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순천부의 백성이오 또 한편으로는 좌수영의 졸인지라 두 곳의 백성노릇을 하다 보니 살자니 살 틈이 없고 죽자니 죽을 틈이 없습니다.

 

여수백성은 한 몸에 두 지게를 진 꼴이 되어 가령 한집에 4~5명의 일손이 있다 치면 아버지는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아들은 본부의 부역에 나가야 하며 형이 수영의 부역에 나가면 동생은 본부의 부역에 나가야하고, 어떤 때는 하루에도 오전에는 수영의 부역에, 오후에는 본부의 부역에 나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좌수영과 순천부의 혹심한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여수 주민들은 늘 순천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고 순천부에서는 그 때마다 이를 막으려고 애썼다.

 

특히 강희연간부터 건융연간(1663~1795)의 기간에는 세 차례에 걸쳐 어렵사리 복현되었다가 그때마다 순천부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일 년도 못돼 와해돼 버렸다. 이때마다 복현에 관계되는 것으로 보이는 좌수사들은 나포되거나 파면당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숙종 때부터 불붙기 시작한 여수복현운동은 몇 번씩이나 상소를 올리는 등 갖가지 수단방법을 다해서 맹렬한 복현운동을 벌였지만 그때마다 순천부에서는 "거짓 상소를 올려 임금의 천덕(天德)을 어지럽히는 여수백성을 벌해달라"는 상소로 맞서 결국 차동궤, 오석사, 차국태, 황성룡 4명이 신문고를 울렸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여수는 이조 5백 년 동안 영영 순천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1897년(고종34)에 와서야 그것도 개화바람을 타고 어렵사리 복현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요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일이 실제로 반복되었으니 이조시대의 정치가 얼마나 원칙도 규범도 없는 엉성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정치인들의 잘못과 욕심이 백성을 못살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여수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삼복현삼파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