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는 속담을 낳은 이디오피아 하라르의 커피. 그러나 정작 농민들은 수익성이 낮아 커피 농사를 기피하고, 환각제가 있어 인근 에리트레아에서는 마약으로 분류되는 차트 농사를 짓는다.
"지옥만큼 어둡고 죽음만큼 강하고 사랑만큼 달콤하다"는 속담을 낳은 이디오피아 하라르의 커피. 그러나 정작 농민들은 수익성이 낮아 커피 농사를 기피하고, 환각제가 있어 인근 에리트레아에서는 마약으로 분류되는 차트 농사를 짓는다. ⓒ 김성호

나는 지금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점심 후에 내가 늘 마시는 커피는 네슬레사에서 만든 인스턴트 커피인 '클래식 네스카페'였는데, 지금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는 그게 아니다. '트레이드 에이드(trade aid)'사에서 만든 '공정 거래(fair trade)'라는 낯선 브랜드의 갈아놓은 커피이다.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 근처의 대형 쇼핑센터 안에 '트레이드 에이드'라는 간판을 내건 상점이 하나 생겼다. 그게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그들이 생산한 제품만을 판매하는, 이른바 '세계상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선뜻 발길이 향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일요일(6일), 나는 그 곳에 들러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브랜드의 커피 한 봉투를 샀던 것이다.

나는 지금 '공정 거래'표 커피를 마시고 있다

ⓒ 서해문집
커피도 일종의 기호품이어서, 자신이 즐기는 브랜드에 대한 중독성이 강한 식품이다. 그래서 평소에 즐기는 종류 말고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법이다. 나 역시 지난 몇 년 동안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경우에는 언제나 '클래식 네스카페'였다.

그런데 듣도 보지도 못한 브랜드의 커피를, 그것도 시중의 다른 커피들보다 30~40% 정도 더 비싼 가격의 커피를 사왔으니 어찌된 일인가.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적당히 섞은 달짝지근한 인스턴트 커피 맛에 길이 들어있는 내 입맛에 변화라도 생겼던 말인가.

내 입맛이 변한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이 변한 것이다. 식사 후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마셔왔던 커피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바뀐 것이다.

내가 그동안 마셔왔던 커피에는 가난한 커피재배 농부들이 흘린 피땀이 녹아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농부들에게 제 값을 치르지 않고 헐값을 지불해 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뒤늦은 깨달음과 부끄러움은 최근에 읽은 한 권의 책으로부터 왔다. 멕시코의 가난한 커피재배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한 신부와 그들이 재배한 커피를 세계시장에 제 값을 받고 팔기 위하여 '공정 거래'를 개발한 한 시민운동가가 함께 쓴 <희망을 거래한다>가 바로 그 책이다.

원조나 동정이 아니라 제 값을 지불하는 공정한 거래야말로, 제3세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멍에처럼 짊어지고 있는 가난을 덜고 개선하는 길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이 책의 주장이 내 양심을 깊이 설득했던 것이다.

그들은 거지가 아니다, 동정이 아니라 공정이 필요하다

<희망을 거래한다>는, 부자와 빈자로 양극화되어가는 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원조가 아니라 공정한 거래가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시킨다.

이것은 이 책의 지은이 프란스 판 데어 호프와 니코 로전이 1985년에 처음 만나서 논의하고 추진하고 마침내 결실을 본 막스 하벌라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막스 하벌라르 프로젝트의 기저에는 '우리들은 당신들의 선물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공정한 가격으로 지불해 준다면 우리는 원조 없이 홀로 설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인디언 커피재배 농부들의 말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 신학적 측면이나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커피재배 농부들의 주장은 내가 할 일의 핵심이었다. (38쪽)"

제3세계 농부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싼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는 다국적 기업체들의 커피와는 달리 막스 하벌라르 커피는 생산자에게 보다 공정한 가격, 즉 제값을 지불하려는 기획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프란스 신부는 멕시코의 가난한 커피재배 농부들을 조직화하여 커피협동조합을 설립함으로써, 그동안 농부들과 커피 거래회사 사이에서 엄청난 폭리를 취했던 중간상인을 배제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시민단체 '참여연대'에서 일하고 있던 니코가 미온적이고 때로는 악의적이까지도 한 커피 제조사들과 슈퍼마켓 체인점들과 수없이 접촉한 끝에 막스 하벌라르 재단을 설립하여 자체 브랜드를 가지고 시장에 진출하는 데 마침내 성공한다. 프란스 신부와 만나 막스 하벌라르 프로젝트를 처음 논의하고 난 지 3년 반만의 일이었다.

공정거래, 인간 뿐 아니라 지구도 살린다

'트레이드 에이드' 상점에서 커피를 사면서 집어온 판촉용 엽서.
'트레이드 에이드' 상점에서 커피를 사면서 집어온 판촉용 엽서. ⓒ 정철용
이것은 결코 쉽게 이룬 성취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멕시코의 중간상인들로부터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프란스 신부와 네덜란드의 커피 제조사들과 슈퍼마켓 체인점들의 뻔뻔스런 위협과 기만적인 책략을 몸소 경험해야 했던 니코 로전의 생생한 증언이 그것을 말해준다.

막스 하벌라르 프로젝트는 그 모든 어려움에도 이루어 낸 첫 성취였기에 그 이후에 카카오·차·꿀·바나나·파인애플·청바지 등으로 확대된 공정거래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 중에서 오케(Oke) 바나나·구이치(Kuyichi) 청바지 사례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공정거래 운동은, 주로 유럽에 집중되어 있는 시장의 분포나 품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미미한 시장점유율을 고려해 보건대, 세계 무역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가격에 의한 자유경쟁 원칙을 흔들어 놓기에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해 있는 전지구적 환경오염 문제와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 문제를 생각해보면, 공정거래 운동이 갖는 의미는 실로 막중하게 다가온다.

"공정거래는 지속적인 경제를 미리미리 취하는 것이다. 효율적이고 동시에 사회적이며 생태학적이고 항구적인 경제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생산의 사회적·환경적 측면이 경제적 차원으로 정의된다. 인간과 환경을 위한 보호 조치들은 생존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세계국민 다수의 빈곤화와 주변화의 경제 비용은 점점 높아졌다. 항구적인 경제를 향한 발전이 필요하며 이는 전체 세계 경제를 위한 목표로 적용될 수 있다. 사회적 비용과 생태학적 비용을 통합하는 것이 시급하다. (266쪽)"

다시 말하자면, 공정거래는 거래의 대상이 되는 농산물들을 환경친화적인 유기농 방식으로 재배하고 수확하고 유통시킨다.

초기에는 다소 비용이 더 들더라도 지속적으로 이러한 유기농 방식을 유지해 나가고 또한 생활을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농부들에게 보다 높은 수입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환경 문제와 가난의 문제를 동시에 겨냥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커피, 그 '책임'은?

문제는, 이런 이유로 해서 공정거래 상품들은 시중에 유통되는 동종의 상품보다 다소 높은 가격이 책정된다는 데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맺어지는 관계가 익명으로 유지되는 오늘날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서는 아무리 의식 있는 소비자라 하더라도 막상 상품을 구매하려는 순간에는 습관적으로 가격에 의해 그 결정이 좌우되기 쉽다.

따라서 공정거래 운동은 상품의 질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시장의 익명성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인 홍보 그리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생태학적·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선택을 하도록 고무하는 교육을 매우 중시한다. 이 책의 출판도 이를테면 그러한 홍보 및 교육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우리가 입버릇처럼 늘 말하는 '자유' 시장의 의미가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 프란스 신부의 말이었다. 그는 말한다.

"자유는 책임을 수반한다.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권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와 같은 논리를 경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커피협동조합(UCIRI)의 커피재배 농부들은 '자유' 시장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정의를 내렸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정의는 진정한 의미로 내려진 것 같다. (55쪽)"

내가 어떤 커피를 선택하느냐는 자유이겠지만 그것은 책임, 즉 그 커피를 재배한 농부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데 충분한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책임을 수반해야만 진정한 자유다. 그러한 논리가 관철되고 적용되고 유지되는 시장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시장이라는 것을 프란스 신부는 내게 가르쳐 준 것이다.

국민은행 명동 본점에 위치한 스타벅스
국민은행 명동 본점에 위치한 스타벅스 ⓒ 오마이뉴스 박수원
오는 토요일 '희망무역' 하러 나들이 나가볼까

책을 다 읽고 나서 한국에서는 공정거래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나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반가운 뉴스가 눈에 띈다. 올해 4월 초에 여성환경연대가 한국 최초의 공정거래 회사인 ㈜희망무역을 설립했다는 소식이다.

지난 2002년부터 5월 둘째 주 토요일을 '세계 희망무역의 날'로 정해 매년 전 세계적으로 축하 행사를 펼치고 있는데, 올해 한국에서는 이번 토요일(5월 12일)에 열리는 '세계 희망무역의 날' 한국 페스티벌 행사에서 ㈜희망무역의 첫 공정 거래 의류인 오가닉코튼 브랜드 '그루(Gru)'가 선보일 예정이라는 소식도 눈에 띈다.

한국에서는 '공정거래'라는 조금 딱딱하고 학술적으로 들리는 용어를, 보다 어감이 좋고 일반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희망무역'이라고 바꾼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읽은 이 책의 원제도 영어로는 'Fair Trade(공정 거래)'인데 한국에서는 <희망을 거래한다>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의식된다.

하지만 희망은 변화가 실제 이루어지는 가운데 현실이 되는 법이다. 희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희망은 쉽게 실망으로 변질되고 만다. 우리의 선택이 그들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우리 동네 쇼핑센터의 '트레이드 에이드' 상점에서 '공정 거래' 브랜드 커피를 사오면서 함께 집어온 판촉용 엽서에 적혀 있는 구절을 간곡하게 들려주고 싶다.

"오늘 바꾸십시오(Change today)!
공정거래 상품을 선택하십시오(Choose Fairtrade)!"


2007년 '세계 희망무역의 날' 홍보 포스터에 실린 사진.
2007년 '세계 희망무역의 날' 홍보 포스터에 실린 사진.
/ 정철용

덧붙이는 글 | <희망을 거래한다 : 가난한 사람들의 무역회사 막스 하벌라르>

ㅇ 프란스 판 데어 호프(Frans van der Hoff)ㆍ니코 로전(Nico Roozen) 지음
ㅇ 김영중 옮김
ㅇ 도서출판 서해문집 펴냄
ㅇ 2004년 1월 24일 초판 1쇄
ㅇ 값 1만2000원
 
이 기사는 인터넷 서점 예스이십사의 독자 서평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거래한다 - 가난한 사람들의 무역회사 막스 하벌라르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외 지음, 김영중 옮김, 서해문집(2004)


#커피#무역#제3세계#막스 하벌라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