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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74년부터 33년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배움의 등불이 되어온 '성동야학'
ⓒ 손기영
70, 80년대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보금자리였던 '야학'이 세월에 따라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 어려운 운영난에도 야학의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이 있다. 서울 상왕십리 성동청소년회관 내에 있는 '성동야학'이 바로 그곳이다.

지난 4일 성동야학을 찾았다. 성동야학은 1974년 성동경찰서에서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을 하는 청소년에 대한 선도활동의 하나로 설립됐다. 지금까지 33년 동안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진행되는 수업을 통해 15명의 학생들이 배움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오래된 계단을 따라 건물 2층으로 올라가자 조그만 강의실 하나가 나타났고, 그 옆 교무실에서 성동야학 강학이자 홍보부장인 김회광씨(24·서강대 경영학과)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자 김씨를 비롯한 성동야학의 강학(야학에서는 강사를 '강학'이라고 부른다. 강사들도 학생들로부터도 배움을 얻기 때문이다)들은 1교시 수업준비로 분주했다. 그렇지만 여느 곳과 다른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저녁식사를 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요리준비가 그것이다.

"성동야학 전통인데요. 2교시 끝나고 학생들과 함께 먹을 저녁식사를 1교시 수업시간 전에 강학들이 손수 준비하죠. 저도 조금 전까지 유부초밥을 만들고 있었는데, 여기에 있는 강학들의 요리 실력은 웬만한 가정주부 못지 않아요. 이를 통해 학생들과 친목도 나누면서 유대감 있는 수업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죠."

김회광씨는 요리 얘기를 하며, 교무실 한편에 놓여 있는 자료집 하나를 가지고 왔다. 1974년부터 지금까지 성동야학의 발자취와 선배들의 경험담이 담긴 자료집이었다. 그는 지난 시절 성동야학의 모습과 시대적으로 변화해온 과정을 함께 이야기해주었다.

▲ '성동야학'의 강학 김회광씨. 그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야학의 사회적 역할과 성격은 달라지고 있지만, 어려운 이웃을 향한 야학의 근본정신만큼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손기영
"주변에 여러 공장들이 있던 80년대, 성동야학을 이끌었던 선배 강학들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이곳에 다니던 사람들 대부분은 주변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주경야독으로 공부하는 노동자들이었죠.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처우도 좋지 않았죠. 그래서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선배들은 야학이란 공간을 노동운동과 결부시키려고 했었죠."

하지만 김씨는 90년대 들어서는 그동안 노동운동의 또 다른 공간으로 자리 잡았던 야학의 사회적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성동야학을 이끌어 갔던 선배 강학들의 운동권 성향도 많이 약해져 갔어요. 또한 야학을 찾는 사람들도 주변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제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주부, 노인 그리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청소년들로 다변화되어 갔죠. 그래서 자연히 야학의 방향도 제도교육이 갖는 근본적인 모순을 이들로부터 소외된 계층과 함께 극복해보자는 의미로 바뀌어 갔죠."

그는 90년대 야학의 사회적 역할 변화가 '생활야학'의 탄생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즉 노동운동의 공간으로서의 성동야학이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위한 '생활교육의 공간'으로 변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시기 성동야학에서는 학생들에게 한글과 재봉틀 기술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쳐 주며, 대안학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사회 곳곳에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대안학교들이 생겨나면서 야학의 '생활교육 기능'과 사회적 영향력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많은 야학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성동야학과 같이 명맥을 잇는 야학들은 대입 검정고시 혹은 고입 검정고시를 위한 '검시야학'으로 변모되어 갔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야학을 이끌어가는 강학들의 생각 역시 좀더 현실적으로 바뀌어 갔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80년대 선배 강학들의 생각이 그들을 위한 야학 즉 거대담론을 위한 야학이었다면, 지금 저희의 생각은 우리를 위한 야학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다시 말해 야학봉사를 통해 제 삶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봉사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게 성동야학에서 강학을 맡고 있는 이유입니다."

▲ 성동청소년회관 2층에 위치한 '성동야학' 모습
ⓒ 손기영
김씨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야학의 사회적 역할과 성격은 변화해가고 있지만, 야학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나눔과 이웃사랑'의 정신은 소중히 지켜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변용해 만들었다는 자작시 한 편을 들려주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어합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어합니다.
성동야학에서 우리는 서로의 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그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김씨와 더불어 이곳에서 봉사하고 있는 강학들은 모두 급여 없이 일하고 있다. 비록 '돈'을 받진 못하지만 그들은 성동야학에서 '아름다움'을 얻어간다고 한다.

사회적 변화에 따라 야학의 사회적 역할이 점점 바뀌어 가고 있지만, 어려운 이웃을 향한 그들의 따뜻한 마음만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태그:#성동야학, #야학, #교육, #김회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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